암천제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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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6화
26화
독고무령은 몸을 반쯤 돌리고, 떨어지는 칼날을 손가락으로 쳐냈다.
땅!
그러고는 칼이 튕겨진 여력에 휘청거리는 장한의 목을 손날로 후려쳤다.
퍽!
장한은 끽소리도 못 지르고 그대로 무너졌다.
독고무령은 자신의 손에 목이 잡힌 장한에게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죽고 싶은가?”
목이 잡혔을 뿐인데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
상대는 칼날을 손가락으로 튕겨낼 정도의 강호고수.
뭔가가 잘못되었다. 이런 고수가 새끼배수(扒手)들의 무리인 작서파(雀鼠派)의 왕초일 리가 없다.
빼빼마른 장한은 혼신을 다해 머리를 저었다.
독고무령이 다시 물었다.
“나는 그 아이의 대형이 아냐. 알겠나?”
“꺼, 꺽…….”
어느새 수십 명의 구경꾼들이 몰려든 상태.
독고무령은 눈이 뒤로 돌아간 장한을 이미 바닥에 누워있는 자 위에다 던지고는,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태원은 제왕성의 턱밑이다. 자신의 얼굴이 널리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었다.
* * *
동문로를 빠져나온 독고무령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며 중문대로로 향했다.
걸어가는 그의 입가에 실소가 걸렸다.
‘그놈, 분명히 내 품속에서 주머니를 슬쩍하려 했던 거 같은데…….’
자신의 손을 뿌리치던 소년이 손을 뻗었다.
독고무령은 가슴 속으로 반쯤 파고든 소년의 손을 느끼고 잡았던 팔을 밀치듯 놓았다. 소년이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영악한 머리. 은밀하면서도 빠른 손. 기묘한 신법.
괘씸한 한편으로 호기심이 일었다.
‘흠, 소매치기라면 흑도의 상황을 잘 알 텐데…….’
독고무령은 소년을 확실하게 잡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흑도의 일을 알아보는 방법은 그 소년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많았다.
그가 중문대로를 거의 다 지날 때였다.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는 소년이 하나 보였다.
왼쪽 어깨가 찢어진 옷, 눈에 익은 체구 그리고 조심스런 걸음걸이.
비록 뒷모습인데다 머리가 흐트러져 다른 사람처럼 보였지만, 독고무령은 곧바로 그 소년이 누군지 알아보았다.
자신을 놀렸던 그 소년이었다. 날다람쥐.
‘훗,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그가 바라보는 사이, 소년은 주위를 슬쩍 훑어보고는 중문대로 끝자락의 구석에 있는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독고무령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뒤에 몸을 숨겨서 소년의 눈을 피했다. 그러고는 소년이 들어간 건물 앞에 도착해서 입구 위에 달린 색 바랜 현판을 바라보았다.
‘운가고서점(雲家古書店).’
조금은 의외였다.
소매치기가 고서점에는 무슨 일로 들어간 것일까? 뭘 훔치려고 들어갔나?
‘들어가 보면 알겠지.’
독고무령은 일단 의아함을 접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서점 안에는 오래되어서 색 바랜 책들이 가득했다.
미처 서대에 진열되지 못한 책도 상당했는데, 그 책들은 한쪽에 탑처럼 쌓여 있었다.
오래된 책 때문인지 고서점 안에선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제법 독하게 풍겼다.
독고무령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곰팡이 냄새가 비옥십팔호실의 비릿한 혈향처럼 느껴졌다.
그때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 뭘 찾으러 오셨습니까? 저희 운가고서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백삼십 년 전통의 명문 고서점으로…….”
언뜻 봐도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의 청년이었다.
하얀 얼굴만 보면 유약해 보였는데, 일자로 길게 늘어진 눈을 보니 고집이 상당할 것 같았다.
독고무령이 가만히 서 있자, 청년은 운가고서점에 대해서 숨도 쉬지 않고 설명했다.
“……하하하, 어떤 종류의 책을 찾으시는지요?”
독고무령은 그의 긴 설명이 끝나자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가 찾아보겠소.”
“…….”
청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감히 자신의 친절을 무시하다니!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지었다.
“하, 하, 하. 뭐 그러시다면야…….”
‘무식하게 남의 도움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다니. 어디 먼지구덩이 속에서 실컷 고생해봐라.’
하지만 독고무령은 그의 기대(?)와 달리 별 고생을 하지 않았다. 본래 책이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독고무령은 서대 사이를 돌아다니며 소년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가난해 보이는 학사들만 보일 뿐 소년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갔나?’
들어올 때 언뜻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었다. 아마도 운가고서점의 주인이 사는 안집인 듯했다.
그곳까지 들어가 볼 수는 없는 일.
독고무령은 소년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수만 권의 책이 쌓여 있으니 기다림이 지루하지도 않았다.
독고무령은 서대를 쭉 훑어보다 대충 제목이 눈에 드는 책만 뽑아보았다.
개중에는 일천 년 전의 대학자들이 남긴 글도 있었고, 유명한 고승과 도를 깨우친 사람들이 설파한 법문을 학자들이 나름대로 해석한 글도 있었다.
그렇게 죽 걸어가며 대충 보다 보니 일각 만에 제일 구석진 곳에 이르렀다.
다른 곳에서 책을 고르던 학사들은 이미 다 나간 후였다.
독고무령은 구석진 서대에서 책을 하나 빼내 겉장을 젖혔다.
그 책에는 색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몇 장 넘기자 요상한 그림이 나왔다.
처음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던 그는 한참 동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곧 그림의 진실한 내용을 어슴푸레 알고 입이 반쯤 벌어졌다.
고서점의 주인인 청년이 그걸 보더니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자식, 방중술에 대한 책을 찾았나보군. 솔직히 말했으면 바로 찾았잖아? 아니지, 사람들이 다 나갈 때까지 기다렸나? 흐흐흐, 엉큼한 놈.’
그랬다. 구석진 서대. 그곳에 꽂힌 책은 대부분이 방중술에 관한 책이었던 것이다.
독고무령은 책을 다섯 장도 채 넘기지 못하고 재빨리 꽂았다.
문득 고서점 주인의 비릿한 조소가 눈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누가 그런 책인 줄 알았나?’
독고무령은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구석진 곳에서 나왔다.
그때 고서점에서 안쪽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더니, 소년이 고서점 안으로 들어왔다.
찢어진 옷을 갈아입고, 얼굴의 땟자국을 씻어내고, 머리까지 말끔히 정리해서 완전히 딴 사람처럼 보였다.
그나마 소년이 안으로 들어갔다는 걸 알기에 알아보았지, 만일 밖에서 봤다면 그냥 스쳐갔을지도 몰랐다.
독고무령은 쓴웃음을 지으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또 보는군.”
소년은 고개를 돌리다 말고 흠칫했다.
독고무령을 알아본 소년은 재빨리 몸을 돌려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서로간의 거리가 이 장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한 번 놓친 독고무령으로선 두 번의 실수를 반복할 마음이 없었다.
소년이 한 걸음 내딛기도 전에 독고무령의 손이 소년의 어깨를 짚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단순히 어깨를 짚였을 뿐인데 꼼짝할 수가 없다.
평소 태원의 흑도건달들을 놀렸던 신법도 무용지물로 만들 만큼 빠른 움직임.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무심한 목소리.
흑호방의 두 장한이 어떻게 당했는지, 동생에게 전해들은 소년은 오싹한 한기에 몸이 떨렸다.
“무, 무슨 이야기를……?”
“나에게 할 말이 많을 텐데, 안 그런가?”
그때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내 동생의 몸에서 손을 떼시지.”
독고무령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고서점의 주인이 대롱 하나를 든 채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은색 대롱은 크지 않았다. 오리 알 굵기에 길이는 한 자 정도. 그 끝에는 작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고서점 주인은 대롱으로 독고무령의 등을 겨눈 채 입술 끝을 밀어 올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강호의 어떤 고수도 이 거리에서 이걸 쏘면 피할 수 없어. 그리고 맞으면 몸이 녹아 죽지.”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암기의 명문인 사천당가와 산동의 벽력문에서 만든 암기통은 강호의 절정고수들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개중 당가의 절혼폭(絶魂爆)에 든 암기에는 독까지 묻어 있어서 맞으면 몸이 녹아 죽는다고 했다.
자신을 향한 것이 당가의 절혼폭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고서점 주인의 표정이나 눈빛이 거짓이 아닌 걸로 봐서, 절혼폭과 비슷한 위력을 지닌 암기통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고서점 주인을 바라보았다.
“내 장담하지만, 그게 쏘아지기도 전에 당신이 먼저 죽을 것이오.”
“어, 어디 해볼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서점 주인은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독고무령은 고서점 주인의 눈을 직시했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는 있지만, 악기가 보이는 눈빛도 아니고, 살기도 그리 짙지 않았다. 아마 자신의 동생이 위험을 당하자 암기통을 들고 나선 듯했다.
‘악한 자는 아니군.’
마음먹고 손을 쓰면 암기가 쏘아지기 전에 상대의 목을 칠 수도 있다. 설령 암기가 발사된다 해도 암기가 금강불사공을 뚫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강제로 일을 해결하려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터.
독고무령은 공연한 소란을 원치 않았기에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나에게 잘못한 게 있소. 나는 그 빚을 받으려 하는 것뿐. 그러니 그걸 거두시오.”
고서점 주인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무심한 표정. 담담한 말투.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상대의 어디에서도 일말의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이거늘,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하다.
고서점 주인, 운양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젠장, 너무 위험한 자야.’
그저 방중술에 관한 책을 찾으러 온 줄만 알았다. 그러다 뒤늦게 벌어진 상황을 보고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문제는 평범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단순히 평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위험한 자다. 자신의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왜 이런 자가 자신의 의제를 찾아왔단 말인가?
의제는 또 왜 이자를 피한단 말인가?
그는 일단 소년에게 하나를 물어보았다.
“초운, 이 사람에게 뭘 잘못했지?”
소년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동문로에서 흑호방 놈들에게 쫓길 때 만났는데…… 제가 이 사람을 조금 이용했어요.”
자세히는 몰라도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감이 잡힌다.
‘쯔쯔, 하필 이런 자를…….’
운양은 속으로 혀를 차며 독고무령을 향해 물었다.
“별로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꼭 저 아이를 다그쳐야겠소?”
“몇 가지만 대답해주면 심하게 다그칠 생각은 없소. 나를 이용했으니 그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소?”
운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슬쩍 고갯짓을 했다.
“그럼 일단 손을 내려놓으시오.”
독고무령은 순순히 손을 내려놓았다.
운양도 독고무령을 향해 겨눴던 절혼폭을 거두었다.
소년이 재빨리 운양 옆으로 다가왔다.
운양은 독고무령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소년에게 말했다.
“문 닫아라. 날도 어두워지고, 아무래도 오늘 장사 종친 것 같다.”
운양은 독고무령을 안채에서도 깊은 방으로 안내했다.
독고무령은 운양의 뒤를 따라가는 도중 몇 줄기의 기운을 감지했지만 모른 척했다.
마주 앉자 차를 직접 독고무령의 찻잔에 따른 운양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난 운양이라 하오.”
독고무령도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일단 성은 빼고.
“무령이오.”
“저 아이는 초운이라고, 내 의동생이오. 동문에서 벌어진 일은 내가 사과하겠소. 그곳에는 함부로 가지 말라고 했는데…….”
운양이 말하며 초운을 흘겨보았다.
초운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이가 놈들에게 걸려서 어쩔 수 없었어요. 보나마나 놈들이 고문을 할 텐데, 그대로 놔둘 수는 없잖아요.”
패거리 중 하나가 잡혀간 듯하다. 초운이라는 아이는 그 아이를 구하려 적진에 들어간 것 같고.
대충 상황을 짐작한 독고무령이 나섰다.
“그대가 사과할 것까지는 없소. 잘못은 저 아이가 했으니까. 다행히 잃어버린 것도 없고 말이오.”
그 말에 초운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품속에 손을 넣은 걸 알아차린 것 같지 않은가.
‘그, 그럼 그걸 알고 나를 패대기친 건가?’
독고무령이 그런 초운을 보며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남을 이용하려 할 때는 항상 뒤탈도 생각해야 한다. 만일 내가 독하게 손을 쓰기로 작정했다면, 너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예……. 죄송합니다.”
초운은 간이 콩알만 하게 오그라들었다. 하마터면 늑대 굴을 빠져나오려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뻔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운양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허험, 그런데 뭘 물어보고 싶어서 저 아이를 만나려 한 거요?”
“알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저 아이가 알지 않을까 해서 물어보려는 것이오.”
“초운이 알 수 있는 거라면 나도 대부분 알고 있소. 그러니 나와 이야기해봅시다.”
독고무령은 이제 초운이라는 소년보다 운양이라는 청년에게 더 관심이 갔다.
자신에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내공을 지니고 있다. 거기다 흔들림 없이 일처리를 하는 걸 보니 제법 사람을 부려본 솜씨다.
‘아무래도 단순한 고서점 주인은 아닌 것 같군.’
하긴 소년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정도면 그 일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다는 말.
그럼 흑도의 상황도 잘 알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강호의 일도…….
‘잘 하면 태원에 들른 목적이 쉽게 해결될 것 같군.’
독고무령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시원시원한 분이군.”
운양도 어깨를 으쓱하며 표정을 풀었다.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본 그였다. 그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앞에 있는 자는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였다.
‘무공은 어떤지 몰라도, 말로 하는 거라면 너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해.’
하지만 그가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고문을 보고 자란 사람, 열다섯 살 때 직접 제왕성의 주요 죄수들을 고문한 사람이 독고무령이라는 걸.
최소한, 사람의 심리를 읽고, 상대의 가슴에 숨겨진 진실을 꺼내는 기술은 독고무령이 그보다 한 수 위라는 걸.
그걸 알지 못하기에 운양은 웃음까지 지으며 자신 있게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래, 뭘 알고 싶소? 어디 말해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