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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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4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3화
23화
갈의장한, 소엽은 앞에 있는 가죽포대를 보고 묘한 눈빛을 번뜩였다.
비록 물에 젖고 이끼가 붙어 있지만, 가죽포대는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이었다.
“혹시 그것이……?”
남조경이 손을 들어 소엽의 입을 막고 나직이 명을 내렸다.
“순찰당의 삼조가 승룡호에서 발견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 비밀은 철저히 지키고.”
“알겠습니다, 당주.”
* * *
태행산맥의 산줄기에 둘러싸인 우현(盂縣)은 인근 약초꾼들과 사냥꾼들의 집합지였다.
독고무령이 우현에 도착한 것은 삼불곡을 떠난 지 만 하루 만이었다.
거지나 다름없는 몰골의 그가 커다란 봇짐을 메고 대로를 걸어가자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러나 옆구리에 달린 투박한 검 때문인지 시비를 거는 자는 없었다.
그는 일단 피혁을 취급하는 곳을 찾았다.
다행히 피혁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남북으로 뚫린 대로 양옆으로 수십 개의 점포가 늘어서 있었는데, 대부분이 약초와 피혁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독고무령은 일단 대로를 걸으며 피혁점을 살펴보았다.
주인으로 보이는 자가 손님과 실랑이를 하는 곳도 있었고, 어떤 곳의 주인은 늦가을답지 않은 따사로운 날씨에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그렇게 대로를 중간쯤 지나갔을 때였다. 언뜻 가죽을 손질하는 노인이 보였다.
노인의 체구는 작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손에도 주름이 가득해서 만지면 부스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가죽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한시도 흔들리지 않았다. 누가 보면 가죽의 털을 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독고무령은 잠시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노인의 점포로 발길을 옮겼다.
어차피 가죽의 가치를 모르는 그였다. 기왕이면 제대로 된 눈을 지닌 사람이 봐주는 게 나을 듯했다.
독고무령의 그림자가 가죽 위로 길게 늘어진 후에야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이구, 손님이 오신 줄도 몰랐구려. 쯔쯔, 이제 늙었나 보오.”
노인은 손질하던 가죽을 한쪽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 팔러오셨소? 아니면 사러오셨소?”
독고무령은 봇짐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팔러왔습니다.”
“호, 그래요? 어디 봅시다.”
노인은 흥이 인 눈빛으로 독고무령의 봇짐을 응시했다.
활도 없고, 사냥꾼의 복장도 아닌 사람이 가죽을 팔러왔다고 한다. 노인이 아는 한 그런 사람이 가져온 가죽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별 볼일 없는 물건이든가, 아니면 아주 특별한 물건이든가.
노인이 바라보는 사이, 독고무령은 묵묵히 봇짐을 풀었다.
차곡차곡 접힌 가죽이 모습을 드러냈다.
독고무령은 입을 열지 않고 노인이 가죽을 다 살필 때까지 기다렸다.
노인은 봇짐 속에 든 가죽을 보고는 놀라지 않기 위해서 눈에 힘을 주었다.
그는 삼십 년 이상 가죽만 봐온 전문가였다. 굳이 펼쳐볼 필요도 없이 가죽의 종류, 상태를 열에 여덟아홉은 짐작할 수 있었다.
‘완벽해! 흠이 없어!’
그가 짐작했던 대로였다.
가죽을 가져오는 사람 중 활이 없는 사람은 대부분 강호의 무인이었다. 그들은 활이 없이도 짐승을 잡을 수 있었다. 그것도 맹수를 상처 하나 없이.
그래서 가끔 그들이 가져온 것 중 특별한 물건이 나오는 것이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노인은 손을 뻗어 가죽을 펴봤다.
하나, 둘, 셋…….
모두 열세 장이었다.
개중에는 여우 가죽도 있었고, 곰 가죽도 있었다. 그리고 호랑이 가죽도 두 장이나 되었다.
여우 가죽은 황금빛이 날 정도로 윤기가 흘렀고, 그중 하나는 은빛에 가까운 하얀색이었다. 그리고 곰 가죽은 가슴에 하얀 무늬가 선명하고, 털에선 검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모두가 상처 하나 없이 완벽했다. 심지어 호랑이 가죽까지.
노인은 마치 사랑하는 손자 머리를 쓰다듬듯이 털을 쓰다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미안하지만,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두 장뿐이오.”
독고무령은 조금 실망했지만, 별 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고 물었다.
“나머지는 좋은 게 아닙니까?”
노인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오. 내가 가진 돈이 많지 않다는 말이외다. 다 털어도 저 여우 가죽 하나와 곰 가죽 하나를 겨우 살 수 있을 뿐이오.”
“그럼…… 나쁘지는 않나 보군요.”
“허어, 무슨 말을. 내 장사를 한 지 이십 년이 넘었소만, 이렇게 좋은 가죽은 정말 몇 번 본 적이 없다오.”
너무 좋은 가죽이라 비싸서 못산다는 말이다.
독고무령은 잠시 생각하고는 노인에게 물었다.
“그럼 어디에다 팔아야 전부 팔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아쉬운 눈으로 가죽을 바라보았다. 돈만 많다면 모두 사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겐 그 많은 돈이 없었다. 간혹 상대가 멍청해 보이면 사기 치듯이 싸게 매입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에구, 다 늙어서 욕심은…….’
두 장을 산 것만으로도 그는 횡재를 한 거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욕심내면 하늘이 벌을 내릴 것이었다.
“이 길을 따라 죽 내려가면 만수점이라고, 우현에서 제일 큰 피혁점이 있소. 그곳이라면 전부 살 수 있을 거요.”
독고무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인이 원한 두 장의 가죽을 빼고 봇짐을 다시 쌌다.
“금액은 알아서 주십시오.”
노인은 두 장의 가죽을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고 갔다. 그리고 곧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나왔다.
“여우 가죽이 열다섯 냥, 곰 가죽이 서른다섯 냥, 합해서 은자 오십 냥이오.”
은자 오십 냥.
독고무령에게는 굉장히 큰돈이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많이 나갈 줄 몰랐던 독고무령은 눈을 크게 뜨고 주머니를 받았다.
그때 노인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원래 상인끼리의 약속이 있어서 말을 하면 안 되는데……. 가시거든, 저 백여우 가죽과 호랑이 가죽만큼은 적어도 백 냥 이상씩 받으시오.”
좋은 물건이 싸게 팔릴지 몰라 안타까워하는 표정이다.
봇짐을 등에 멘 독고무령은 담담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마시고 함께 가시지요.”
“이 늙은이하고?”
“가서 팔아주시면 대가를 드리지요.”
“그건…….”
“욕심은 없습니다. 다만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싫을 뿐이지요. 저는 그저 적당한 값만 받으면 됩니다.”
노인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노인은 밖에 내놨던 물건을 안쪽으로 들여 놓고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허리에서 곰방대를 꺼내 척 물더니 종종걸음으로 독고무령을 따라갔다.
만수점은 노인의 말대로 상당히 컸다. 넓이만도 백 평은 되어 보였는데, 안쪽은 가죽을 팔러온 사냥꾼들과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어? 장 노인이 어쩐 일이쇼?”
점원 중 하나가 노인을 보더니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장 노인은 불도 붙지 않은 곰방대를 뻑뻑 빨고 짧게 되물었다.
“종 대인은 안에 계시느냐?”
“계시긴 합니다만…….”
“안내해라. 팔 것이 있어서 왔으니까.”
점원은 장 노인과 독고무령을 번갈아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섰다.
“따라오쇼.”
장 노인은 점원을 뒤따라가며 독고무령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
독고무령은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곧 어렴풋이나마 장 노인의 생각을 읽고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훗, 기세싸움인가?’
이것도 경륜이라면 경륜이었다.
하긴 노인과 점원의 기세싸움이나 강호인들끼리의 기세싸움이나 다를 게 뭐 있을까. 고문을 할 때도 죄수들과 기세싸움을 하지 않던가?
독고무령은 새삼 하나를 배웠다는 생각에, 즐거운 마음으로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봇짐이 내려지고, 곧 가죽이 밖으로 드러났다.
장 노인은 조심스런 손길로 가죽을 넓게 폈다.
하나하나 가죽이 펴질 때마다, 마주 앉아 있는 오십 초반의 중년인이 눈빛을 반짝였다.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놀란 것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가죽을 다 펴놓은 장 노인이 허리를 폈다. 그러고는 주름진 눈에 힘을 주고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잠시 신경전이 이어졌다.
중년인은 어느새 놀란 눈빛을 지우고 담담한 눈길로 가죽을 훑어보았다.
“흠, 괜찮군요.”
장 노인은 그런 중년인을 가소로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곧 중년인, 종사민의 말투가 변했다.
“좋은데요?”
그제야 장 노인이 입을 열었다.
“욕심낼 생각은 없소이다. 딱 부러지게 말하시구려.”
종사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허허, 내 어찌 장노를 속일 수 있겠소?”
그는 천천히 몸을 의자에 기대고, 손을 들어 손가락 네 개를 구부렸다 폈다.
“모두해서 은자 육백 냥 드리겠소.”
장노인이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받아쳤다.
“구백 냥.”
종사민의 눈이 보일 듯 말듯 떨렸다.
“육백오십 냥. 더는 무슨 말을 해도 드릴 수 없소.”
가소로운 소리!
“팔백오십 냥. 나도 더 깎아줄 수 없소이다.”
저 늙은이가 감히!
“육백칠십 냥. 이게 마지막이오.”
흥정에 마지막이 어디 있어? 장사 처음하나?
“팔백삼십 냥. 사지 않겠다면 그냥 가져가리다.”
“장 노인, 정말 그러실 거요?”
“종 대인, 내 인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큰 거래요. 이해하시구려.”
종사민이 싸늘한 눈으로 장 노인을 노려보았다.
장 노인은 다시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독고무령은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칼만 안 들었지 살기가 흐르는 듯했다. 일개 장사꾼들의 흥정이거늘, 강호의 운명을 담판 짓는 분위기 저리가라 할 정도다.
끝내 졌다는 듯 종사민이 고개를 저었다.
“좋소, 내가 졌소. 칠백 냥 드리리다. 밖에 소상 있느냐?”
장노인은 넓게 펼쳐진 가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보시게. 그냥 가세. 살 생각이 없는가 보이.”
쾅!
종사민이 가죽 위에 손을 얹었다.
“정말 그렇게 하실 거요?”
싸늘한 목소리. 강압적인 눈빛.
장 노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야…… 칠백 칠십 냥만 내시오. 진짜 마지막이오.”
종사민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하지만 곧 씩 웃으며 손을 치웠다.
그때 삼십 대 장한이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대인?”
그를 향해 종사민이 말했다.
“가서 백 냥짜리 전표 일곱 장과 은자로 오십 냥만 가져오너라.”
“예, 대인.”
소상이라는 장한이 밖으로 나가자, 장 노인은 연초도 없는 곰방대를 빡빡 빨더니 빙그레 웃었다.
칠백칠십 냥이 아닌 칠백오십 냥을 가져오라 하는데도 불만이 없는 표정이었다. 이미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연초 있으면 조금만 얻었으면 하오만.”
종사민이 옆 탁자에서 연초가 든 상자를 들어 장 노인에게 내밀었다.
장 노인은 곰방대의 대통에 연초를 채우고 유등잔을 이용해 불을 붙였다.
“허허허, 종 대인의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아 부럽소이다그려.”
“하하하, 별말씀을. 다 장노 같은 분이 도와주니 이만큼이라도 되는 것이지요.”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소이까?”
“도움이 안 되다니요? 이렇게 좋은 물건을 가져오신 것만도 큰 도움이지요, 허허허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 칼부림이라도 날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언제 그랬냐는 듯 마치 수십 년 지기처럼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다.
독고무령은 흥이 인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때 문득, 혹시 두 사람 모두 처음부터 그 가격을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이 그랬다. 그럼에도 서로가 날선 기세를 세우고 버틴 것은, 한 치만 밀려도 몇십 냥의 손해를 본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만약 장 노인이 팔백 냥을 요구했다면, 종사민은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절대 칠백오십 냥을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어렴풋이 상황을 이해한 독고무령의 눈빛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이게 장사꾼들의 흥정인가?’
그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들어섰다. 둘 다 갈의를 입고 있었는데, 사십 대 중년인은 등에 커다란 칼을 메고 있었고,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은 검을 메고 있었다.
그들을 본 종사민이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