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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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0화
20화
그가 내민 것은 호두알만 한 검은 단약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준 어떤 선약보다 컸다.
“그게 뭡니까?”
“뭐긴? 이 어르신이 심혈을 기울여 연단한 성단이지.”
독고무령은 치선이 내민 단약을 받아 냄새를 맡아보았다.
고약한 냄새에 절로 머리가 띵해졌다.
하지만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고 담담히 물었다.
“향기가 아주 진하군요.”
“그렇지? 허허허, 원래 몸에 좋은 약은 냄새가 고약한 법이니라. 어서 먹어라. 약효가 잘 돌도록 내가 도와줄 테니까.”
냄새가 고약한 약이 몸에 좋다고? 그런 말도 있었나?
솔직히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이걸 먹고 열흘 간 설사를 하다가 몸이 썩어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먹지 않을 수도 없었다.
먹지 않으면 삐칠지도 몰랐다. 자신을 무시했다고 황보세가 제자들 오십 명을 한 달 동안 방 안에 눕게 만든 사람. 그게 치선이라는 것을 귀도와 마불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은 터였다.
물론 귀도에 대해서는 마불과 치선에게, 마불에 대해서도 귀도와 치선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귀도는 자신의 표정을 보고 시비를 건 열두 명의 화산제자를 일수에 팔병신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불은 누구의 외공이 더 뛰어난가 알아본다며 숭산 소림사에 찾아가서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고 한다.
삼괴는 그렇게 독고무령이 수련하는 동안 옆에서 침을 튀기며 자리에 없는 두 사람을 헐뜯었다.
하도 듣다보니, 그들 세 사람의 괴행에 사십 년 동안 골머리를 앓아야만 했던 강호인들이 불쌍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곤란에 처한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후우, 설마 먹고 죽지는 않겠지.’
독고무령은 눈을 딱 감고 단약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치선이 그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더니 팔을 걷어 올렸다. 마치 누군가와 싸우려는 사람처럼.
“이제 앉아서 약효를 사지백해로 돌려라. 선단에 제법 강력한 독이 들어 있는데. 제때에 독기를 빼내지 않으면 죽을지 모르거든. 내가 도와주마.”
약에 강력한 독이 들어 있다고?
‘제길! 그럼 그렇지!’
* * *
세 노인은 하루씩 돌아가며 독고무령을 다그쳤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순수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 노인의 가슴에 경쟁심이라는 괴물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한시도 독고무령을 가만두지 않았다.
“흥! 삼월인(三月刃)은 천하무적 고금제일의 쾌도수다! 평생 배워도 모자라는데, 그렇게 해서 언제 기초를 다지고, 본격적인 수련을 하겠냐! 안 되겠다. 오늘부터는 직접 대련을 하면서 배워보자!”
“킁, 내 부드러운 손으로 때리는 게 뭐가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려? 이제 겨우 삼백 대밖에 안 맞았다. 아직 칠백 대나 남았어! 힘내!”
“허허허. 무령아, 힘들지? 오늘은 이거 먹어라. 별로 독하지 않은 약이란다. 그거 먹으면 내가 술 취한 나비를 잡는 법, 취접라(醉蝶拏)를 알려주지.”
그렇게 석 달이 지나자, 그러잖아도 독고무령의 깊은 눈빛이 더욱 깊어져서 만장 심해처럼 변해갔다.
그리고 가끔은 그토록 깊은 눈빛에서 싸늘한 한기가 흘러나왔다.
죽을 뻔한 위기를 열흘에 한 번씩 겪다보면 누구라도 그런 눈빛이 될 것이었다.
‘빌어먹을 노인네들!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그렇게 겨울이 다가왔다.
그런데 십일월의 어느 날 아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독고무령은 멍하니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찬바람이 불더니 첫눈이 내린 것이다. 첫눈치고는 엄청나게 많은 눈이.
비옥십팔호실에서도 눈을 보긴 했다.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면 구멍에서 눈을 떼지 않고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건 그것이 전부였다.
천지를 온통 하얗게 덮어버린 눈이란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바위 위에도, 나무 위에도, 온통 하얀 솜이 가득 쌓여 있었다.
땅은 백색주단으로 덮은 것처럼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눈이 부셨다.
독고무령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마당 가운데로 걸어간 다음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눈을 만져 보았다.
차갑고 부드러운 촉감이 손끝을 타고 녹아내린다.
그때 뒤에서 귀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럽게 많이 왔네. 눈 처음 보냐? 뭐해, 인마? 쓸어!”
이렇게 보기 좋은 것을 치우라고?
독고무령은 못들은 척 일어나서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갔다.
뽀드득, 뽀드득.
묘한 촉감과 소리가 발을 거슬러 올라 머릿속까지 울렸다.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차가워서 더 좋았다.
“자식, 누가 보면 진짜로 눈 처음 본 놈인 줄 알겠네.”
마불이 고개를 삐죽 내밀고 실실 웃는다.
독고무령은 눈을 반쯤 감고 사방을 둘러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쌓인 것은 처음 봅니다. 제가 살던 곳에서는 볼 수가 없었거든요.”
그제야 귀도가 일전에 말한 독고무령의 말을 기억해냈다.
“맞아, 무령이 너, 뇌옥에서 살았다고 했지?”
“예.”
“그래도 인마, 들어가기 전에는 봤을 거 아냐? 설마 갓난 애기 때부터 거기에서 살지는 않았을 테고…….”
독고무령의 무심한 눈빛이 잔잔하게 파동 쳤다.
문득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가슴 속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덩어리가 조금이라도 풀어질 것 같았다.
강호를 떠나 삼불곡에서 수십 년을 산 삼괴라면 괜찮지 않을까?
독고무령은 두어 번 입을 달싹이다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여기에 오기 얼마 전까지……. 어머니가 절 거기서 낳았다고 하더군요.”
방에서 막 나와 기지개를 켜던 치선이 입을 쩍 벌리고 두 손을 든 채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귀도는 흘겨보던 자세에서 고개를 더욱 아래로 떨어뜨리고, 마불은 콧구멍을 파다 그대로 굳었다.
“뇌, 뇌옥에서 태어났다고?”
“여기 오기 전까지…… 거기서 살았단 말이지?”
“그게…… 정말이냐?”
털어놓고 나니 조금 기분이 나아진 듯하다.
독고무령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예. 그런데 어머니 얼굴은 저도 모릅니다.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아버지는?”
“아버지도 저를 살리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죠. 그렇게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후 죽음을 무릅쓰고 겨우 빠져나오긴 했는데…… 막상 나오니 갈 곳이 없더군요. 그래서 태행산으로 들어왔지요.”
바람이 휭 하니 불더니 눈보라가 독고무령의 몸을 쓸고 지나갔다.
여기저기 찢어진 옷자락, 수세미처럼 엉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눈가루가 파고든다.
냉기에 벌겋게 변한 맨발.
허공을 바라보는 공허한 눈빛.
오늘따라 더욱 외롭게 보이는 독고무령이다.
삼괴는 짐짓 별것 아니라는 투로 한마디씩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흥, 그래도 부모가 누군지는 아네. 나는 성도 모르는데…….”
“킁, 그래도 함께 산 사람이 있었네, 뭐. 나는 혼자 컸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때리지는 않았나 보군. 나는 매일 멍이 들도록 맞고 자랐는데. 그래서 살려고 단약 만드는 걸 배웠지만…….”
방으로 들어간 귀도는 재빠른 손짓으로 눈가를 찍었다.
‘저놈들이 못 봤겠지?’
마불도 문틈으로 밖을 보며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코를 훌쩍였다.
‘아, 그 자식. 나는 그런 이야기 들으면 콧물이 나오는데.’
그래도 치선은 두 손을 들고 있었기에 조금 나았다. 내리면서 찡한 눈을 슬쩍 문지를 수 있었으니까.
‘다음에는 조금 더 좋은 약을 줘야지.’
* * *
독고무령은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에 따로 거처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천자무서를 비롯해서 혼자 공부해야 할 것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삼괴의 집에 머물러서는 무공을 깊이 파고든다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미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으니까.
다행히 삼괴는 반대하지 않았다.
굳이 통나무집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귀도와 마불의 통나무집 사이 뒤쪽의 절벽에 그리 깊지 않은 동굴이 있었다. 그 동굴을 조금 손보면 될 듯했다.
동굴은 깊이가 삼 장 정도, 높이는 일 장이 조금 못되었다.
독고무령은 숲의 나무를 잘라 침상을 만들고, 부드러운 풀을 깐 다음에, 삼괴로부터 얻은 짐승 가죽을 그 위에 올렸다.
그렇게 침상이 만들어지자, 그 다음에는 나무문을 만들어 입구를 막았다.
조용한 자신만의 거처가 만들어진 첫날, 독고무령은 오랜만에 편하게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낮에는 계곡 안쪽의 수련장에서, 밤에는 자신만의 거처에서 수련에 정진했다.
다행이라면, 신세를 간단하게 말한 후부터 삼괴가 자신의 행동에 큰 상관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무슨 마음인지 사냥해온 짐승의 가죽으로 신발과 조끼도 만들어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삼괴의 닦달이 늦춰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경쟁하듯 몰아붙였다.
혼자 살아가려면 남들보다 더 강해야 한다면서. 강해야 대문파 놈들에게 놀림을 당하지 않는다면서!
그렇게 삼괴는 나름대로 위한다며 독고무령을 다그쳤다.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덕에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독고무령은 조금의 불평불만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무공을 수련하는 것에만 전력을 다했다.
강해지는 것. 삼괴보다 강해지는 것!
그것만이 세 노인의 닦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길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님은 그도 알았다.
세 노인이 누군가. 강호에서도 초절정고수로 이름 높은 북천삼괴가 아닌가!
그런데도 그가 희망을 가지고 묵묵히 수련에만 전념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치선의 단약!
그것이 비록 독하고, 사람을 미치게 할 정도로 속을 뒤집어 놓기는 하지만, 장복하면 상당한 공능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내장도 튼튼해지고, 혈맥도 강해지고, 거기다 공력 상승효과까지!
그는 치선도 모르는 약의 효능을 아는데 일 년이 걸렸다. 내장이 뒤틀려서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그 후부터 그는 치선의 단약을 맛있게 먹었다. 하도 먹다 보니 고약한 냄새조차 정겹게 느껴졌다.
귀도와 마불은 그런 독고무령을 미친놈 보듯 했다.
“뇌옥에서 썩은 고기만 먹었나?”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오직 치선만이 흐뭇해했다.
“다음에는 더 멋진 재료로 만들어줘야지.”
* * *
삼 년이 지나자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공력이 증진했다.
독고무령은 자신의 공력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최대한 숨겼다.
귀도와 비무를 할 때도, 마불에게 맞을 때도 반 이상은 절대 끌어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북천삼괴.
그들의 눈을 속이는 것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 년째로 접어든 지 육 개월, 그의 공력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것을 삼괴가 눈치 챘다.
“흥! 너 이 자식, 혹시 우리 모르게 어디서 영약이라도 처먹은 거 아니냐?”
“킁, 저놈이 어디서 천년 묵은 산삼이라도 몰래 캐먹었나 보군. 나쁜 놈의 새끼.”
“허허허, 그런 걸 캤으면 가져오지 그랬느냐? 그럼 내가 기가 막힌 선단을 연단해주었을 텐데……. 쩝쩝…….”
그때부터 삼괴의 손속이 달라졌다.
귀도는 비무를 하며 더욱 빠르게 손을 썼고, 마불은 신체를 단련시킨다며 더욱 강하게 몸을 두들겨 팼다.
사실을 말해준다 해도 믿지 않을 테지만, 독고무령은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기가 산 치선이 진짜 독을 먹일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독고무령은 삼괴가 매일같이 다그쳐도 시치미를 딱 떼고 자신의 힘을 키우는 데만 전념했다.
삼괴의 수법이 강해질수록 자신이 얻는 것도 많았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삼괴도 자신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고되더라도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두고 봅시다, 어르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