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2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0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2화
12화
무뚝뚝하면서도 단호한 대답.
철노는 독고무령의 두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깊고 막막한 어둠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눈빛. 도무지 어린 아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후우, 하긴 너 같은 아이에게는 이곳도 좁을지 모르지. 그래도 나중에, 언제든 지나갈 일이 있으면 들르도록 해라.”
독고무령이 느릿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이곳을 잊겠습니까. 제가 새로 태어난 곳인데요.’
* * *
철노와 이야기를 나눈 지 사흘째 되던 날.
독고무령은 아침을 먹자마자 떠나기 위해 짐을 쌌다.
가져갈 것이라고는 딱 두 가지뿐이었다.
가죽주머니와 검 한 자루. 그나마도 검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형태였다. 지난 사흘간 철노의 가르침 아래 담금질을 하며 모양을 잡아놓긴 했지만, 아직 날을 벼리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철노가 만들어준 검병과 검집 덕분에 그럭저럭 모양새는 갖춰진 상태였다.
독고무령은 자신이 지냈던 방을 한번 둘러보고 방문을 나섰다.
그때 저만치서 달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장유유와 장소천이었다. 장이생과 부인인 소설향은 두 남매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어제저녁에 떠난다는 말을 했는데, 그 때문에 오는 듯했다.
물론 장유유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밤새 난리를 쳤을 테니까.
그런데 이제 아는 것 같다.
“우왕! 왜 가려는 거야! 내가 싫어서 가려는 거야?”
장유유가 달려오며 울음부터 터트렸다.
항상 웃으며 지내고 다쳐도 잘 울지 않지만, 한번 울면 대책 없다는 장유유다.
독고무령은 물끄러미 장유유를 바라보며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은 가야 할 때니까 가는 거야. 나중에 놀러 올게.”
장유유는 독고무령의 고집이 황소힘줄 열 개를 꼰 것보다 질기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녀는 현명하게 붙잡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흐엉, 언제! 빨리 올 거지?”
“유유가 나만큼 커졌을 때.”
“그럼 오래 걸리잖아! 그러지 말고 손가락 하나 클 때까지 와!”
“유유가 나만큼 크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정말?”
“어릴 때는 빨리 큰다고 하잖아.”
“그럼 꼭 돌아오는 거지?”
“응.”
장유유가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소매로 훔치느라 잠깐 입을 닫은 사이 장소천이 앞으로 나섰다.
“갈 이유가 있다니까 잡지는 않을 거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라.”
“말해.”
“다음에 만나면 이렇게 도망치듯이 떠나지 마라.”
“그러지.”
독고무령이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장소천이 입술을 질끈 한 번 깨물고 말했다.
“네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알아. 네가 나보다 더 강할지 모른다는 걸.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걸 공방에 갔다가 몇 번이나 봤거든.”
단순비교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장소천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어깨를 폈다. 그리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앞으로 열심히 할 것이다. 지금보다 몇 배 더. 그래서 강해질 것이다. 그러니 너도 더 강해져라.”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장소천을 바라보았다.
“그럴 거야. 그래서 가려는 것이니까.”
장소천은 한 걸음 앞으로 더 나오더니, 두 손을 뻗어 독고무령의 어깨를 잡았다.
“좋아! 그럼 기분 좋게 보내주겠어, 친구.”
친구.
독고무령은 그 말에 장소천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입이 열렸다.
“잘 있어라……. 친구.”
그 사이 바로 옆까지 다가온 장이생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붙잡지는 않겠다. 너에게는 이곳이 좁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굳이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독고무령은 한마디에 마음을 담아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장이생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봉황이 새겨진 작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이걸 가져가라. 옷 한 벌과 약간의 은자다. 강호를 돌아다니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다. 많지는 않지만 당분간은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안에 든 유지는 육포를 싼 거니까, 가다가 배고프면 먹도록 해라.”
“괜찮습니다.”
“거절하지 마라. 나보다 저 사람이 더 원하니까. 네가 거절하면 저 사람이 슬퍼할지 모른단다.”
독고무령은 눈을 돌려 소설향을 바라보았다.
보기는 자주 봤지만, 소설향과 마주 앉은 적은 단 네 번뿐이었다. 그나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잘 지내느냐는 것, 몸은 안 아프냐는 것 정도가 대화의 전부였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그때마다 가슴에서 뜨거운 뭔가가 올라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생각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어머니’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어머니……. 나에게도 어머니가 있었겠지?’
그럴 것이다. 어머니 없이 세상에 나온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왜 아버지는 한 번도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은 걸까?
나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
저분처럼 곱고 자상한 분이었을까?
아니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어머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을 것이다.
‘반드시…… 알아보겠어. 반드시. 내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는지…….’
독고무령은 코끝이 찡해지자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소설향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언뜻 독고무령의 눈가에 어린 물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말을 걸면 눈물이 떨어질지 모르는데, 그럼 공연히 미안할 것 같았다.
그녀는 독고무령이 고개를 든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몸조심해야 한다.”
“예.”
‘어머니…….’
독고무령은 하마터면 입 밖으로 흘러나올 뻔한 말을 급히 주워 삼켰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오빠! 일찍 와야 돼!”
장유유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독고무령은 목구멍까지 치민 격정을 억누르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강호는 험하다 했다.
생사가 하루아침에 갈리는 도산검림이라고도 했다.
언제 또 이곳에서와 같은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있거늘, 왜 자신은 비옥십팔호실과 같은 지옥에서 태어났을까?
왜……?
독고무령은 저릿한 가슴을 틀어쥐고 장가장의 정문을 나섰다.
제5장 희망을 위해 동쪽으로
바람이 눅눅하다.
파란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는가 싶더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독고무령은 일단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무작정 걸었다.
동쪽의 태행산맥에는 무천련(武天聯)이 자리 잡고 있다.
일원궁(一元宮), 화천문(火天門), 철검보(鐵劍堡), 전궁산장(電弓山莊), 백마방(白馬幇).
태행산맥 일대의 다섯 개 방파가 제왕성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한 곳.
비록 제왕성에게 밀려서 중앙으로의 진출을 못하고 있지만, 그나마 산서에서 제왕성의 일갈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곳은 무천련이 유일하다.
자신이 태행산맥에 들어간다면, 만에 하나 제왕성이 자신에 대해 알아낸다 해도 함부로 추적하지 못할 것이다.
장가장을 출발한 지 세 시진.
오후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푸석푸석한 산서의 땅이 빗방울에 먼지를 일으켰다.
하지만 곧 푸석거리던 땅이 질척하게 변해 버렸다.
독고무령은 비를 맞으면서도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가 태어나 처음으로 비를 맞아본 것은 장가장에 도착한 지 칠일 만이었다.
그날의 비는 이 각가량 내리다 말았다. 게다가 빗줄기가 가늘어서 여름비 같지가 않았다.
그는 그때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젖은 그를 보고 장유유가 놀려댔다.
-벙어리 오빠, 비 맞은 생쥐 오빠가 되었네?
그래도 비가 그칠 때까지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눈을 뜨고 몸을 돌렸을 때, 장유유는 심심한지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후훗’ 정도의 짧은 웃음이었지만.
어쩌면 그날의 비로 인해서 그의 가슴에 쌓였던 찌꺼기가 많이 씻겨 내려갔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오늘의 비는 굵었다.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에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
하늘에서 화살이 떨어져 살을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비에 젖은 솜털이 올올이 곤두서는 기분.
독고무령은 기분 좋은 그 감촉을 느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비는 내린 지 반 시진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성을 내듯 세차게 쏟아 부었다.
결국 독고무령도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때문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한달음에 건널 수 있었던 작은 개울이 갑자기 쏟아진 비로 인해 성난 황룡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누렇게 변한 급류의 폭은 칠 장 정도.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 폭이 좁은 곳이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굳이 상류로 올라가지 않고 몸을 돌렸다.
오면서 송림 안에 작은 산신당이 하나 있는 것을 언뜻 봤다. 식사도 할 겸 쉬어가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 * *
산신당은 이십여 평 정도로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언제 떨어졌는지 산신당의 문은 경첩이 있던 자국만 남은 채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독고무령이 문턱을 넘어 안쪽으로 들어가자, 비를 피하기 위해 산신당에 들어와 있던 들쥐가족이 일제히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정면을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산신의 토상이 보였다.
산신당은 오래도록 관리하지 않았는지 벽에 금이 가고, 한쪽 귀퉁이는 아예 무너져서 밖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비를 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였지만.
독고무령은 좌우를 둘러보고는 그나마 조금 깨끗한 곳을 골라서 자리를 잡았다.
비를 피하자 오히려 비 맞은 옷이 거치적거렸다.
독고무령은 검과 가죽주머니와 소설향이 준비했다는 보따리가 든 봇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흠뻑 젖은 웃옷과 바지를 벗어서 물기를 짜냈다.
지하수로를 통과할 때 생긴 자잘한 상처들이 벌거벗은 그의 몸짓을 따라서 꿈틀거렸다.
그는 짜낸 옷으로 몸과 머리의 물기를 닦아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봇짐을 바라보았다. 장이생이 건네준 보따리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는 손을 뻗어서 봇짐을 풀고, 봉황이 새겨진 보따리를 꺼냈다. 흠뻑 젖어 있었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독고무령은 한참 동안 보따리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매듭을 풀었다.
깨끗한 감색 옷이 단정히 포개져 있었다.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는 무복이었는데, 소매에 정교한 구름무늬가 새겨진 걸 보니 상당히 공을 들인 듯했다.
물끄러미 옷을 바라보는 독고무령의 눈매가 잔잔하게 떨렸다.
젖은 옷인데도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이 아니었다. 바느질 한 땀 한 땀에 담긴 마음이 손끝을 통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그는 천천히 청의를 집어 들었다.
툭.
청의 사이에서 작은 주머니가 떨어졌다. 은자가 들어 있다더니 제법 묵직한 게 적지 않은 돈이 든 것 같았다.
은자주머니를 한쪽에 놓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단 웃옷부터 활짝 펼쳤다. 그러고는 세차게 털어 물기를 최대한 빼낸 후, 공력을 끌어 올려 청의에 고르게 퍼뜨렸다.
자신의 내력을 이용해서 옷을 말리려는 것이다.
제대로 될지, 아니면 헛되이 공력만 소모하는 일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소 부인이 마음으로 전해준 옷을 젖은 채로 놔둘 수는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마에 땀이 송골공골 맺힐 즈음 옷에서 뿌연 수증기가 피어났다.
동시에 독고무령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된다!’
한번 마르기 시작한 옷은 반각이 지날 즈음 물기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말랐다.
독고무령은 그나마 깨끗한 곳에 마른 옷을 내려놓고, 바지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다시 일각가량이 지나자 바지마저 대충 말랐다.
‘휴우,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군.’
힘은 들었지만 목적한 바를 이루어냈다는 것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는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물기와 뒤섞인 땀을 닦아내며 자신이 말린 옷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산신당 밖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흐, 뭔 놈의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 거야!”
흠칫하며 고개를 돌린 독고무령의 눈에 산신당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여인이었다. 그것도 이제 십칠팔 세의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