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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9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7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9화

 

9화

 

 

 

 

 

 

안간힘을 쓰자 겨우 한마디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뜻이 전달되기에 충분했다.

 

장이생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호수에서 네가 불쑥 튀어나온 걸 보고 유유와 소천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유유와 소천이?

 

여자아이와 저 소년을 말하는 걸까?

 

“처음에는 나도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검으로 찌를 뻔했으니까 말이다, 허허허. 한여름에 가죽옷을 입고, 거기다 가죽포대까지 뒤집어썼으니 그게 어디 사람 형상이었겠느냐?”

 

그랬다. 정신을 잃기 전 갈라진 가죽포대 속에 머리를 끼워 넣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두어 모금이라도 숨을 쉬기 위해서. 하다못해 머리가 다치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

 

그런 상태로 갑자기 떠올랐다면, 괴물처럼 보인 것도 당연했다.

 

“가죽옷이 물에 불어서 벗겨내는 데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게다가 온몸이 멍들어서 부은 바람에 조심스럽게 벗겨내야 했지. 그래도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났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얼마나 다행이냐고?

 

당신은 모를 거야. 지옥으로 가는 길인 줄 알면서도 몸을 던져야만 했던 나의 심정을 당신이 어떻게 알까?

 

“조금만 참아라. 해가 지기 전에는 고교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가서 약도 좀 짓고, 죽이라도 먹으면 금방 나아질 게야.”

 

고교현이라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짐작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제왕성이 아니다.

 

독고무령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희열의 눈물이었다.

 

꿈이라면 절대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독고무령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가, 가죽은……?”

 

“네가 머리에 쓰고 있던 가죽포대는 너를 꺼낼 때 벗겨서 호수에다 버렸다만, 네가 입고 있던 가죽옷과 품에 있던 작은 주머니는 옆에 있단다. 그러니 걱정 말고 네 몸부터 다스리도록 해라.”

 

독고무령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죽포대는 물이 차서 바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죽포대가 호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곳은 제왕성의 영역.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남조경, 그는 정말 나에 대한 수색을 완전히 포기한 것일까?’

 

 

 

* * *

 

 

 

진중(晋中)의 장가장은 말이 진중에서 제일가는 무가(武家)이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도 진중에서 객잔과 포목점 그리고 대규모 철기점을 운영하고 있어서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었다.

 

일만 평의 장원에 기거하는 사람들의 수는 모두 삼백여 명.

 

그중 친족이 삼십여 명이고, 무사들의 수는 백여 명 정도 되었다. 나머지는 야장과 하인들로 사실상 무가라기보다는 상가(商家)에 가까웠다.

 

독고무령이 탄 마차는 진중까지 도착하는데 이틀이 걸렸다.

 

본래는 꽉 찬 하루거리였다. 그런데 독고무령의 몸 상태가 엉망이다 보니 고교와 태원에서 하루씩 쉬고 이틀 만에 도착한 것이다.

 

장이생은 독고무령을 배려해서 가족들이 사는 별원에 방을 마련했다.

 

 

 

독고무령은 진가장에 도착한 지 닷새가 지나서야 홀로 방을 나설 수 있었다.

 

부상이 완쾌된 것은 아니지만, 움직여야 빨리 낫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움직였다.

 

누워있으면서 계속 운기행공을 해서인지 뼈가 욱신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큰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독고무령은 묵묵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방이 있는 곳은 별원의 구석진 곳이었다.

 

앞마당에는 오밀조밀하게 정원이 가꿔져 있고, 옆쪽에는 장주의 식구들이 지내는 건물이 있었다.

 

독고무령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

 

때마침 별원으로 들어오던 장유유와 장소천이 방을 나선 독고무령을 보고 달려왔다.

 

“어? 벙어리 오빠! 이제 괜찮아?”

 

“걸어 다닐 만한가 보네?”

 

장유유는 매일같이 독고무령의 방에 놀러왔다. 

 

그녀는 독고무령이 하루에 한두 마디밖에 하지 않자, 그를 보고 벙어리오빠라고 놀려댔다.

 

그리고 장소천은 그와 자신의 나이가 비슷하다 생각했는지 서슴없이 반말을 하며 친근하게 굴었다.

 

독고무령은 두 사람의 환한 표정에 묵묵히 고개만 끄덕여 답했다.

 

“피이. 벙어리 오빠, 그러다 진짜 벙어리 된다.”

 

장유유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독고무령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다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봐야 미미하게 입술이 일그러진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런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장유유가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와아! 벙어리 오빠가 웃었다!”

 

웃은 것뿐만이 아니었다. 입도 열렸다.

 

“장주님은……?”

 

장소천이 대답했다.

 

“아버님은 일을 보고 계셔. 왜? 아버님을 뵈려고?”

 

독고무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지금 떠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당장은 아니다. 그러나 떠나지 말라고 붙잡아도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

 

객잔에서 이틀을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제왕성에서 호수에 잠긴 가죽포대를 발견한다면 일대를 수소문할 것이 분명했다.

 

단 일 푼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 일 푼도 안 되는 가능성으로 살아났으니까.

 

독고무령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시면…… 알려줘.”

 

 

 

장이생이 독고무령을 찾아온 것은 그날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

 

장유유는 뭐가 그리도 할 말이 많은지 종일 떠들다가 장이생이 들어온 다음에야 입을 다물었다.

 

“허어, 우리 유유가 고생하는구나.”

 

떠든 것도 고생이라면 고생이겠지.

 

“에헤헤헤. 아버지, 오늘은 벙어리 오빠가 말을 많이 했어요.”

 

“그래?”

 

장이생은 새삼스런 눈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그가 독고무령을 좋게 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전신이 멍들 정도로 다쳤으면서도 신음을 내뱉지 않는 독고무령의 인내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어린나이답지 않게 과묵한 입과 호수처럼 맑고 깊은 눈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다만 너무 말이 없는 점은 마음에 안 들었다. 

 

궁금한 점이 하나둘이 아닌데, 말을 해야 알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말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드디어 말을 많이 했다지 않은가?

 

“그래, 무슨 말을 했느냐?”

 

“아버지를 찾았어요. 그리고 오시면 알려달라고 했어요.”

 

그걸로 입을 다무는 장유유다.

 

장이생은 한참 기다려도 장유유가 더 말을 하지 않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끝이냐? 말을 많이 했다며?”

 

장유유가 입을 삐죽이며 변명했다.

 

“다른 날은 한마디 겨우 했는데, 오늘은 세 마디나 했다구요.”

 

그러고는 약 오른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근데 제가 방에 들어온 후로는 안 했어요. 저는 쉬지 않고 말했는데…… 피이…….”

 

“네가 쉬지 않고 말을 했으니, 말할 틈이 없었겠지.”

 

“그 정도는 안 했는데…….”

 

장유유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채 독고무령과 장이생을 번갈아 힐끔거렸다.

 

그러자 장이생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하고 어머니에게 가봐라. 좀 전에 찾더구나.”

 

“예, 아버지. 벙어리 오빠, 나중에 봐.”

 

장유유가 발딱 일어나서 방을 나가자, 독고무령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장이생은 독고무령이 완전히 자세를 잡을 때까지 기다린 후 조용히 웃으며 물었다.

 

“나를 보자고 했다고?” 

 

“예. 부탁이 있어서…….”

 

새삼 부탁이라는 말이 이렇게 기분 좋게 와 닿을 줄이야.

 

장이생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을 재촉했다.

 

“부탁? 허허허, 그래, 말해 보거라.”

 

“몸이 나아질 때까지 당분간 이곳에 있었으면 합니다.”

 

“흠,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작은 일이라도 해서 대가는 치르겠습니다.”

 

“대가는 필요 없다. 너 하나 정도 더 있다 해서 부담이 될 정도로 가난하지 않으니까. 너만 원한다면 더 있어도 된다.”

 

그러나 독고무령은 그럴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누가 묻거든, 말없이 몰래 떠났다고 하십시오.”

 

장이생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것일까?

 

분명 자신이 싫어서는 아니다. 그렇다면 뭔가 사연이 있다는 말.

 

“너에 대해서 알려줄 수는 없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하긴 호수에서 떠오른 것부터가 기이한 일이었다. 가죽으로 만든 옷도 그렇고, 가죽포대를 뒤집어쓴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 아이는 어디서 온 아일까? 왜 호수에서 그런 차림으로 나타난 것일까?

 

하얀 얼굴에, 여인처럼 고운 피부를 지니고도 군살 하나 없는 몸은 신비하게 보일 정도였다.

 

혹시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지하세계에서 살다 온 아이가 아닐까?

 

오죽했으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장이생은 정말 독고무령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토록 심한 부상을 당하고도 신음 한마디 흘리지 않을 정도라면, 자신이 묻는다 해서 알려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일단 작은 것부터 물었다.

 

“설마 이름도 알려주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독고무령은 잠시 대답을 늦추었다.

 

이 넓은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염마귀가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장이생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아닌가.

 

유백하가 말하길, 사람이라면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했다. 설령 그로 인해서 불이익을 당한다 해도.

 

“무령이라 합니다.”

 

독고무령은 순순히 이름을 밝혔다.

 

단 성은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위험했다. 자신에게나, 장이생에게나.

 

장이생은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허허허, 칠 일 만에 너의 이름을 알게 되었구나.”

 

그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품속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내 앞에 내려놓았다.

 

“옜다. 네 몸도 어느 정도 좋아졌으니 이제 주인에게 돌려줘야겠지.”

 

독고무령은 가만히 손을 뻗어 가죽주머니를 움켜쥐었다.

 

그와 아버지의 땀이 밴 단 하나의 물건이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그때 문득, 가죽주머니를 바라보던 독고무령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단단히 봉해진 가죽주머니의 아귀 부분이 접힌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가죽이 물에 불었다 말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독고무령의 눈에는 그것이 당연한 일로 보이지 않았다.

 

‘무척 궁금했을 텐데, 주머니를 열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어.’

 

 

 

* * *

 

 

 

독고무령은 다음 날부터, 비옥에서 항상 하던 대로 몸을 풀었다. 

 

일단 시작은 아버지가 가르쳐준 백수만타(白手萬打)로 시동을 걸었다. 

 

백수만타는 무공이라기보다 뼈와 근육을 단련하는 일종의 동공(動功)이다.

 

아버지는 이십 수 년 동안 고문을 한 사람. 하기에 뼈와 근육과 핏줄과 신경의 흐름을 강호의 의원들보다 더 자세하게 알았다. 

 

게다가 무공도 그럭저럭 일류급은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죄수들이 말해준 무공구결을 혼합해서 신체단련법인 백수만타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세 살 되었을 때부터 가르쳤다.

 

“후우우웁! 후우우우…….”

 

독고무령은 양손의 손가락을 붙인 채 손을 거두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더욱 느릿하니 내뱉었다. 

 

그리고 그대로 서서 진기를 다스렸다. 

 

그의 몸에는 적지 않은 공력이 뭉쳐 있었다. 강호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이삼십 년 정도의 공력은 되었다.

 

온전히 자신 혼자 키운 기운이 아니다. 아버지가 밤마다 추궁과혈을 해주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었다.

 

백수만타로 단련되지 않았다면, 그 기운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험한 지하수로를 빠져나오면서도 뼈 하나 안 부러지고, 살도 멀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점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기에 가슴이 저렸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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