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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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46화
46화
한편, 낙화인을 구석까지 몰아붙인 사강목은 황당하기만 했다.
처음 철환검대를 칠 때만 해도 모든 상황이 자신의 생각대로 흘렀다. 곧 상황이 끝날 것 같았다.
그런데 철풍검대가 기습에 당황하지 않고 대항하는 것이 아닌가?
의외였다.
‘역시 인의철검 구양손이군.’
문제는 상황이 자신의 생각보다 더 심각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대여섯 명의 도혼단 무사가 쓰러졌다. 그것도 젊은 놈 단 둘에 의해.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피해가 점점 커졌다.
그래도 자신들이 질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철환검대는 이미 반이 무너졌고, 이제 낙화인마저 쓰러뜨리기 직전이었다.
그때 유충안마저 심장이 뚫려서 죽어가는 게 보였다.
‘대체 저놈들이 누군데……!’
찰나지간 그의 마음이 흔들렸다.
비록 손을 한 번 뻗는 순간에 불과했지만, 그 바람에 낙화인에게 숨 돌릴 틈이 생겼다.
숨을 돌리고 검을 고쳐 잡은 낙화인은 철저히 방어 자세를 취한 채 사강목의 도를 막아냈다.
자신이 사강목을 오래 붙잡고 있을수록 더 많은 수하들이 목숨을 구하지 않겠는가.
‘사강목, 이 개자식!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싸움이 벌어진 지 일각이 넘었다.
이제는 비명도, 신음도,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도 사람들의 귀에 익숙해졌다.
누구도 옆에서 들리는 비명이나 신음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앞에 있는 적의 공세만 노려보았다.
조양표국에 들어온 도혼단의 무사들이 모두 몰려든 상태. 생사를 가르는 싸움은 혼전으로 치달아서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그때까지도 눈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커다란 눈송이를 퍼부었다.
그러나 전장이나 다름없는 객방 근처는 붉게 물든 지 오래였다. 마치 하얀 바닥에 붉은 주단을 깔아놓은 듯했다.
사방에 널린 시신. 붉은 주단을 펼치며 바닥을 기는 부상자. 그 위에서 미친 듯이 도검을 휘두르는 무사들.
하얀 눈송이가 그들의 몸 위로 떨어지는 순간 핏빛이 되어 녹아내린다.
눈 내리는 지옥!
그 안에선 적아가 따로 없었다.
핏발 선 눈에서 광기가 일렁거렸다.
“개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어!”
“누가 죽는지 보자, 이놈들!”
“덤벼!”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독고무령과 진사혁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특히 제왕성의 무사들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올까봐 신경을 곤두세웠다.
독고무령의 손에는 자비가 없었다. 별로 강한 것 같지 않은데도 그와 싸운 자는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반면에 진사혁의 손에 쓰러진 자들 대부분은 정신을 잃거나, 뼈가 부러져서 바닥을 기었다.
씩씩거리며 곤을 휘두르는 그는 영락없이 성난 사자였다.
짧은 시간, 두 사람에게 죽거나 쓰러진 사람이 서른을 넘었다. 유충안의 죽음은 이제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들 두 사람은 아직도 먹이를 찾아서 제왕성 무사들 사이를 누비고 있는 중이었다. 배고픈 호랑이처럼.
독고무령이 나타난 곳에는 어김없이 제왕성 무사들의 주검만이 남았다.
설령 진사혁에게 걸린다 해도 뼈가 부러져 붉은 눈 바닥을 뒹굴어야만 했다.
단 일각.
그 사이 독고무령과 진사혁은 적이나 아군에게나 사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혼전이 극에 달한 채 전세가 서서히 철검보 쪽으로 기울 때였다.
구양손의 검이 도혼단 우호장의 옆구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크억!”
자칫하면 동귀어진하겠다고 할지 모르는 일.
구양손은 상대가 멈칫한 틈을 타서 옆구리로 파고든 검을 그대로 올려 그었다.
심장이 갈라지며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눈앞에서 피가 솟구치자, 인의철검이라 불리는 구양손마저도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사강목! 이제 네 차례다!”
살아남은 도혼단의 무사들은 이제 칠십여 명. 그에 비해 철검보의 무사들은 아직도 백 명 이상 남아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도혼단의 무사들이 밀렸다.
사강목은 낙화인을 강하게 몰아붙여 한쪽으로 밀어내고는, 이를 뿌드득 갈며 악을 쓰듯이 외쳤다.
“돌아간다!”
도혼단의 무사들이 떠나는데 누구도 막지 않았다. 아니, 막지 못했다.
혼신을 다한 이 각의 싸움.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다.
그저 싸움이 끝났다는 것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거늘, 쫓을 정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독고무령도 적을 쫓지 않고 검을 회수했다.
쫓아가면 몇 사람 더 쓰러뜨릴 수 있겠지만, 제왕성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면 좋을 게 없었다.
‘오늘 일이 보고되면 나에 대한 판단을 내리겠지.’
최대한 단순한 초식을 써서 적을 죽였다.
절정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신진고수.
그들은 그 정도로 판단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절정고수 둘이면 제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 당장은.
“개자식들!”
누군가가 잇새로 쌍소리를 씹어 뱉었다.
아마 울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들이 죽었으니까.
하지만 도검 위를 걷는 강호인이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운명. 모두가 그 점을 알기에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일 뿐이다.
독고무령은 깊게 침잠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양표국의 객방 건물 주위에만 적아 불문하고 이백여 구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다.
아마 다른 곳에서 죽어간 표국의 무사들까지 합하면 삼백은 족히 될 듯했다.
‘너무 많이 죽었어.’
조금만 빨리 알았더라도 이렇게 많은 피해가 나지는 않았을 것을.
독고무령은 이를 지그시 악물고 구조가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구조원뿐 아니라 석도명과 유원위, 연사성, 조원화 등 팔조의 조원들도 함께 모여 있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은 듯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긴 해도 그들의 얼굴에는 큰 고통의 빛이 없었다.
‘경험이 저들을 살렸다고 봐야겠지.’
그때 구양손이 정신을 차리고 명을 내렸다.
“뭐하느냐? 부상자는 빨리 방으로 옮기고, 사망자의 시신은 한쪽으로 모아 놓아라!”
눈사람처럼 서 있던 사람들이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조차 잦아든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이 그들의 머리와 어깨 위로 쌓였다.
아마 만근 무게도 더 될 터였다.
“으아아아! 개새끼들!”
너무도 무거운지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무게를 털어내려는 듯 악을 쓰며 소리쳤다.
제8장 눈이 녹은 날, 또 하나의 명령이 떨어지고……
아침이 되어서야 표국이 대충 정리되었다.
밤늦도록 내린 눈은 종아리까지 쌓인 상태.
평소라면 표사들까지 나서서 눈을 치웠겠지만, 오늘만큼은 누구도 눈을 치우는 데 나서지 않았다.
밤새 고생한 바람에 지친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치울 마음이 없었다. 눈을 치우면 얼어붙어 있는 붉은 바닥이 그대로 드러날 테니까.
정리가 끝나자 정확한 피해상황이 집계되었다.
조양표국에선 국주인 양유당이 중상을 입고, 그의 세 아들 중 검을 들고 적과 맞선 두 아들이 죽었다.
그의 가족 중 살아남은 사람은 막내아들인 열네 살의 양조영과 부인인 한씨, 그리고 딸인 양수영뿐이었다.
표국의 표사 백여 명 중 살아남은 자는 이십여 명. 대부분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철검보의 무사들은 모두 아흔다섯이 살아남았다.
철풍검대가 예순여덟, 철환검대가 스물일곱. 그나마도 이십여 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낙화인도 내상이 심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구양손은 보고를 받고 힘이 쭉 빠졌다.
“피해가 너무 컸어…….”
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왕성의 도혼단을 상대로 해서 이 정도면 이겼다고 봐야 했다. 더구나 기습까지 당한 상황이었지 않은가.
아마 강호에 소문이 퍼지면 모두가 놀랄 것이다.
하지만 구양손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쌓인 눈과 얼어붙은 땅 때문에 시신을 묻지도 못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구양손은 어깨가 처진 모습으로 일조장 적수등에게 물었다.
“보에는 알렸나?”
“조금 전에 전서구를 띄웠습니다, 대주. 시신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땅이 녹아야 묻든지 할 텐데…….”
몇 구라면 지금이라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삼백 구에 달하는 시신을 묻는다는 것은 눈이 녹는다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양손은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돌아가려 해도 일단 눈이 녹아야 떠날 수 있네. 그러니 다음 일은 눈이 녹은 다음에 상의하세. 그동안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도록 하고.”
“예, 대주.”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마 골짜기에는 눈이 허리까지 쌓여 있을 것이었다. 그 눈길을 뚫고 이백 리를 간다는 것은 답설무흔의 절정 경공을 익혔다 해도 힘든 일이었다.
“구조장은 어디 있나?”
“조원들과 함께 있습니다.”
“후우, 그나마 구조와 팔조 덕분에 피해가 많이 줄었어.”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해가 줄은 정도가 아니라, 구조 덕분에 모두 살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또한 그래서 의문이었다.
적수등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구양손을 바라보며 물었다.
“구조의 젊은 친구들, 대체 누굽니까?”
이름을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진실한 정체를 묻는 것이다.
구양손은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확실한 것은 모르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철풍검대의 구조 조장과 조원이라는 것이지.”
“그 정도면 절정경지에 이른 고수라 봐야 할 겁니다. 그 나이에 그러한 무위를 지닌 자가 천하에 몇 명이나 있을지 모르겠군요.”
구양손의 눈이 가늘어졌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 글쎄…….’
독고무령은 눈에 띄는 초식을 쓰지 않았다. 누가 봐도 평범하게만 보이는 단순하고 간결한 검식만 썼다. 그런데도 적은 그의 검식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맥없이 죽어갔다.
그것도 제왕성의 정예인 도혼단의 무사 이십 명 이상이.
그 광경을 대충 본 사람이라면 독고무령이 운 좋게 이겼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자신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전율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광기에 휩싸인 처절한 혈전이 벌어지고 있거늘, 얼핏 본 독고무령의 눈에서는 한 점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운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의 의지대로 그리 되었다는 뜻.
‘내가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도혼단의 숫자는 셋 정도. 아마 어제의 상황에서 그와 나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는 열 명 이상 쓰러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구양손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그는 나보다 배는 강하다.
* * *
독고무령은 조원들의 상처를 손봐주었다.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크고 작은 외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소강과 종리청의 부상이 제법 심각한 상태였다.
다행히 전날 저녁에 한 번 손을 봐서인지 더 이상 악화될 것 같지는 않았다.
조원들은 능숙하게 상처를 다루는 독고무령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쩍 벌어진 상처를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능숙하게 다루는 독고무령이다. 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냉정하게.
신기하게도 그가 손을 대면 피도 바로 멈추고, 고통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저 나이에 언제 저런 의술을 배운 걸까?
무공도 그렇고, 의술도 그렇고, 조장이 못하는 게 뭘까?
부상당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독고무령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어찌 알까. 그것이 결코 의술이 아니라는 걸. 걸음마할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고문기술이라는 걸. 단지 사람을 일찍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배웠을 뿐이라는 걸 말이다.
한 시진, 독고무령은 엄살을 떠는 진사혁의 팔에 천을 두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치료를 마쳤다.
“아이고, 이 친구. 천천히 좀 싸매지. 누님이 싸매주었으면 덜 아팠을 텐데…….”
진사혁이 죽는다고 엄살을 피우자 구양소현이 손을 뻗었다.
“그럼, 내가 다시 싸매줄까?”
흠칫한 진사혁이 재빨리 팔을 돌렸다.
“예? 아니 뭐, 됐습니다. 하, 하. 하. 남자가 참아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