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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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44화
44화
철풍검대는 삭풍을 뚫고 두 시진을 넘게 이동해서 수양에 도착했다.
출발할 때만 해도 화창하던 하늘에는 어느새 옅은 구름이 낀 상태였다. 사람들의 얼굴도 하늘색만큼이나 가라앉았다.
눈이 오면 그만큼 움직이기가 힘들어진다.
빌어먹을 제왕성은 대체 무슨 심보로 겨울에 싸움을 거는 걸까?
사람들은 이를 갈며 조양표국으로 들어갔다.
구환검(九幻劍) 낙화인이 이끄는 철환검대는 벌써 도착해서 여장을 푼 상태.
구양손도 표국으로 들어가자마자 대원들을 쉬게 했다.
독고무령은 구조 조원들과 함께 객방 하나를 차지했다.
“어떻게 생각해? 정말 제왕성이 전쟁을 시작하려는 걸까?”
진사혁이 옆으로 다가와 앉더니 나직이 물었다.
조원들도 굳은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구양소현도 있었다. 그녀도 긴장했는지, 아니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걸어와서인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독고무령이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나직이 대답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쳇, 그 정도 대답은 누구라도 하겠네.”
두루뭉술한 대답에 구양소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독고무령은 입을 닫고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대답을 확실하게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몇 사람 되지 않는다.
위지천백과 공노명을 비롯한 제왕성의 수뇌들 말이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구조장님, 각 조 조장들은 즉시 모이라 합니다!”
독고무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그 사이 진사혁이 구양소현 옆으로 잽싸게 자리를 옮겼다.
“누님, 춥죠? 제가 손 따뜻하게 해드릴까요?”
* * *
회색빛 하늘에서 눈이 날리기 시작한다.
하얀 꽃처럼 떨어지는 함박눈이 바람에 날려 가슴으로 안겨든다.
하지만 능선 위에 서 있는 사람 어느 누구도 그 광경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았다. 손을 내밀어서 떨어지는 눈을 잡으려는 사람도 없었고.
그들에게는 함박눈이 그저 자신들의 손발을 차갑게 만드는 불청객일 뿐이었다.
휘이잉.
어느 순간 돌개바람이 능선을 휩쓸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던 눈들이 깜짝 놀라서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뿌연 눈보라가 능선 위에 서 있는 자들을 덮쳤다.
그러나 능선 위에 서 있던 백팔십 명의 무사들은 눈만 가늘게 좁힐 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들 중 뒷짐 진 채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던 중년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꽤나 많이 오는군.”
커다란 체구에 각진 얼굴, 짙고 기다란 눈썹이 유난히 눈에 띄는 그는 쉰 살 전후로 보였다.
그가 입을 열자, 우측에 서 있던 사십 초반의 중년인이 조용히 답했다.
“제법 쌓일 것 같습니다.”
“서연으로 간 검혼단의 아이들이 고생 좀 하겠군.”
“이 정도 날씨도 이기지 못한다면 제왕성의 정예로 자격이 없지요.”
“하긴……. 그래, 놈들의 반응은?”
그에 대한 대답은 좌측에 서 있던 얼굴이 기다란 중년인이 했다.
“조양표국에 철환검대와 철풍검대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부단주.”
“흠, 그럼 이백이란 말인데, 숫자가 얼추 비슷하겠군.”
“숫자만 비슷할 뿐이지요.”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자들은 없나?”
“대주인 구양손과 낙화인을 제외하고는 고수라 할 만한 자들이 없습니다.”
“호오, 인의철검이 철검오대의 대주였던가?”
“철풍검대를 맡은 지 이 년 정도 되었습니다.”
“아쉽군, 그래도 철검보 사람들 중 제법 쓸만한 자인데 말이야.”
중년인은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쓸만한 자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는 듯.
하지만 그도 잠시. 중년인, 도혼단의 부단주 사강목은 눈빛을 빛내며 짧게 명령을 내렸다.
“밤이 되기 전에 끝내도록.”
좌우의 두 중년인은 고개를 절도 있게 숙이며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부단주.”
휘이이잉!
다시 한번 강한 돌개바람이 불며 눈보라가 능선을 쓸고 지나갔다.
순간이었다.
“가자!”
외마디 명령과 함께 능선 위에 있던 백팔십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능선 아래로 몸을 날렸다.
조양표국까지는 삼십 리. 서두르면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 * *
회의를 마치고 전각을 나오자 눈이 제법 많이 쌓여 있었다.
“제기랄, 엎친 데 덮친다더니, 하늘도 무심하군.”
철환검대의 삼조장인 가진악이 하늘을 보며 투덜댔다.
그러한 마음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독고무령은 묵묵히 눈 내리는 것을 바라보다 구조가 있는 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석도명이 그의 뒤를 따라오며 나직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놈들이 일을 저지르고 그냥 돌아갔을 거라고 보나?”
독고무령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갔다면 최소한 태원까지는 갔을 것이다.
정말로 갔다면 무천련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기 위해서 한번 찔러봤다는 뜻.
쉽게 말해서 아직 전면전을 할 의사 자체가 없다는 말이나 같다. 아무리 조양표국이 당했다고 해도 철검보가 태원까지 쫓아갈 수는 없으니까.
쫓아갈 수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제왕성이 바라는 일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전쟁할 의사가 없는 걸까?
그럼 왜 조양표국의 표행을 공격했을까?
정말로 어떻게 나오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한겨울에 이 먼 곳까지 와서?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이 아는 제왕성은 남의 눈치를 살피기 위해서 무사들을 수백 리나 보내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돌아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독고무령의 대답에 석도명이 이마를 찌푸렸다.
“돌아가지 않았다? 아직 놈들의 자취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없다고 하던데, 정말 그리 생각하나?”
조양표국에서 제왕성의 무사들을 찾기 위해 사람들을 풀었다고 했다.
‘사람을 풀었다면 태원 일대까지 조사했겠지.’
수양에서 태원까지 말을 타고 달려가면 두 시진 거리.
만 하루가 지났으니 지금쯤은 어떤 소식이라도 들려와야 한다.
그런데 아무런 소식도 없다.
하늘로 솟았는가, 땅으로 꺼졌는가.
정말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그때 문득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곳에서도 그들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없다면…….’
제왕성의 무사들이 정말로 돌아가지 않았을 경우, 보고가 없을 이유는 하나뿐이다.
중간에 끊겼다는 것.
독고무령은 걸음을 멈췄다. 뒤따라오던 석도명도 멈칫했다.
“왜 그런가?”
“한 가지 확인해볼 일이 있습니다.”
독고무령은 짧게 말하고 몸을 돌려서 다시 전각으로 향했다. 석도명은 이유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갔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네 명의 호위무사들이 앞을 막았다.
“무슨 일이오?”
철환검대의 호위무사가 둘, 철풍검대의 호위무사가 둘이었다. 아직 안에 두 대주가 있다는 말.
“철풍검대의 구조장이오. 양 국주님도 안에 계시오?”
전각 안에선 구양손과 낙화인, 조양표국의 국주인 양유당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독고무령이 들어가자 낙화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양 국주님께 두어 가지 확인해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확인? 뭘 말인가?”
독고무령은 시선을 돌려 양유당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제왕성의 무사들을 찾기 위해서 무사들을 파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돌아왔는지 알고 싶습니다만.”
볼살이 축 늘어진 양유당은 일개 조장이 별다른 인사도 없이 곧바로 질문부터 던지자 기분이 상했다.
“왜 그걸 알려고 하는 건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그럽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해서 예의를 차리는 것도 잊었는가?”
양유당이 그리 말하자, 낙화인까지도 한마디 거들며 나섰다. 자신의 질문에 대꾸도 않고 고개를 돌린 독고무령이 건방져 보인 것이다.
“아직 나이가 어리다 보니 강호의 예의를 모르는 것 같군. 어른이 물었는데 대답도 않고 고개를 돌리다니? 그런 걸 질문할 때는 인사를 먼저 하고 물어야 하지 않겠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르자 구양손이 나섰다.
“허허허, 양 국주, 낙 대주. 그만큼 다급한 일이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소? 일단 왜 그런 것인지 이유나 들어봅시다.”
그는 양유당과 낙화인을 말리고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것만 알면 되나?”
세세한 강호 예법을 배우지 못해서 상황에 맞는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은 자신의 잘못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독고무령에겐 예의보다 대답을 듣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자신의 예상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그래도 구양손까지 나서자 일단 고개를 숙였다.
“실례를 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니 대답해주셨으면 합니다. 연락이 강제로 끊겼다면 적의 공격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양유당이 피식 웃고는 느물거리며 태연히 대답했다.
“훗, 그들이 여기를 공격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듣기로는 제왕성의 무사들 숫자가 백 명도 안 된다 했네. 사람을 풀었지만 다른 자들을 봤다는 정보도 없었지. 그럼 그들이 전부라는 소린데, 그들만으로 이곳을 칠 수 있다고 보나?”
낙화인과 구양손도 그 말을 옳다 생각했는지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독고무령도 그들의 마음은 이해했다.
그러나 상대는 제왕성이다.
가끔은 상식 밖의 일을 저지르는 자들.
“어쨌든 일단은 그에 대한 대답부터 해주십시오.”
“설령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해도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않는 걸 거네.”
“사안을 생각하면, 돌아오지 못해도 소식은 전했을 겁니다.”
급할 것 없다는 듯 양유당이 여전히 느물거리며 대답을 빙빙 꼬았다.
“글쎄, 그 일은 황 표두가 지휘하고 있으니 정확한 것을 알려면 그를 불러 물어봐야겠군.”
독고무령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 불러서 물어봤으면 싶습니다만.”
“자네가 부른다고 해서 그가 오겠나?”
안 되겠다 싶었는지 구양손이 다시 나섰다.
“양 국주, 황 표두는 어디 있소? 내 호위무사를 보내 불러오리다.”
“허허허, 내 어찌 인의철검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그는 지금 표운각에 있을 것입니다.”
구양손이 호위무사를 부르려 하자 독고무령이 구양손을 제지했다.
“아닙니다, 대주. 시간이 없으니 제가 찾아보지요.”
양유당이 피식 웃으며 비웃었다.
“훗, 네가 가면 그가 다 말해줄 거라 믿나 보지?”
독고무령이 싸늘한 눈으로 양유당을 직시했다.
“말해주지 않으면 말하게 만들지요. 그 정도 재주는 있으니 걱정 마시지요.”
화가 난 듯 양유당의 볼살이 푸들거리며 떨렸다.
“정말 건방진 놈이군. 조장 자리에 앉으니 눈에 뵈는 게 없느냐!”
“어허, 국주!”
구양손도 마주 소리치며 양유당을 쳐다보았다.
그에게 독고무령은 단순한 조장이 아니라 숨겨 놓은 보물과 같았다. 만일 양유당과 독고무령을 택하라면, 촌각의 망설임도 없이 독고무령을 택할 그였다.
그런데 양유당이 그런 독고무령을 질책하자 은근히 짜증이 났다.
“도와주기 위해서 온 사람들에게 그 무슨 말입니까? 정말 본보의 사람들이 그리 보잘것없이 보입니까?”
양유당이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허어, 그게 아니라…… 험, 좌정하시오, 대주. 내 어찌 철검보의 사람들을 보잘것없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 사이 구양손이 독고무령에게 명 아닌 명을 내렸다.
“자네는 빨리 가서 황 표두를 만나보게.”
독고무령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나가기 전에 구양손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아직 확실치 않아 말하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엉뚱한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구양손이라면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 해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대주, 혹시 모르니 대원들에게 완전무장을 하고 비상상황에 대기하라 명을 내려주십시오.>
갑작스런 전음에 구양손의 눈이 커졌다.
<무, 무슨 말인가? 정말 그들이 공격할 거라 보는가?>
<황 표두라는 자를 만나봐야 좀 더 확실한 걸 알겠습니다만, 제왕성 무사들의 행방이 심상치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럼.>
표운각은 조양표국의 구석진 곳에 있었다.
독고무령이 석도명과 함께 다가가자 경비무사가 무슨 일로 왔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곳은 표국의 정보를 관리하는 곳이오. 이유가 정확해야 들여보내줄 수…….”
듣고 대답할 시간도 아까웠다.
퍽퍽!
독고무령은 경비무사의 말이 길어지자, 말 대신 주먹으로 대답해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석도명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뒤따라갔다.
“대체 무슨 일인지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