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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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39화
39화
독고무령은 곧장 철검보로 향했다.
진중의 장가장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발길을 돌렸다.
제왕성의 눈과 귀는 산서 곳곳에 퍼져 있다. 노태릉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 대한 것을 조사하고 있을 터. 공연한 불똥이 장가장에 떨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독고무령이 철검보로 간다고 하자 진사혁이 물었다.
“왜 철검보로 가려는 거지? 요즘 제왕성과 무천련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아져서 언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독고무령은 간단하게 이유를 밝혔다.
“산서에서 제왕성에 대항할 수 있는 곳이 무천련 말고 없기 때문이지.”
제왕성과 싸우기 위해 간다는 말.
진사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왕성과 원수라도 졌나?”
독고무령은 자세히 말하지 않고 몇 마디 말로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제왕성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사람이야.”
“으음, 솔직히 말해서, 무천련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제왕성에 비할 정도는 아니네.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 보네만.”
독고무령도 모르지 않았다.
마음먹고 공격한다면 무천련이 일 년도 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제왕성은 막강했다.
그런 힘으로 무천련을 왜 그대로 놔두고 있는지 의문이지만, 그 이유는 제왕성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어. 혹시라도 진가철방이 걱정된다면 자네는 철검보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네.”
“하, 하, 하. 조부님의 말씀 못 들었나? 강호에 나가는 순간부터 진가의 사람이 아니라 하셨지 않은가?”
진가철방에는 무정할 정도로 냉정한 율법이 하나 있다.
-강호에 나가는 순간 진가의 사람이 아니다.
돌아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강호에서 맺은 은원을 모두 털어내든지, 아니면 군이나 관에 몸담아 강호에서 맺은 은원을 스스로 감당해낼 정도가 되면 돌아갈 수 있다.
“나 진사혁, 한번 결심한 일은 절대 후회하지 않는 성미네. 그리고 진가철방도 제왕성을 겁내지 않아. 그러니 내 걱정일랑 조금도 말게.”
진가철방이 제왕성을 겁내지 않는다는 말에 독고무령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진사혁의 말은 자신감의 발로였다.
진가철방에는 절정고수가 부지기수다. 특히 진원명은 자신조차 그 경지를 알 수 없는 고수다.
만일 제왕성이 진가철방을 핍박하려 한다면 엄청난 출혈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진가철방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 * *
철검보까지 가는 길은 순탄했다.
모래가 섞인 삭풍조차도 두 사람의 걸음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진사혁은 태원부의 영역을 벗어나자 희희낙락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렇게 독고무령과 진사혁이 철검보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정오 무렵이었다.
철검보의 정문에는 대여섯 명의 무사들이 방명록에 이름을 올리려고 줄을 서 있었다. 대부분 낭인으로 보이는 자들이었다.
정문 옆에 방문이 붙어 있는 걸로 봐서 제왕성과의 싸움을 목전에 두고 무사들을 모집하는 듯했다.
독고무령은 진사혁과 함께 맨 뒤에 서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곧 차례가 오자 서기로 보이는 무사가 독고무령에게 물었다.
“이름은?”
“독고무령.”
방명록에 독고무령의 이름을 적은 철검보의 무사는 힐끔 진사혁을 바라보았다.
진사혁도 독고무령처럼 이름만 짧게 대답했다.
“진사혁.”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진사혁을 보고 철검보의 무사는 속으로만 욕을 해댔다.
‘빌어먹을 새끼, 키는 되게 크네.’
슥슥, 진사혁의 이름을 대충 적은 그가 또 물었다.
“사문은?”
“아버지와 조부께 이런저런 무공을 배웠소.”
‘별것도 아닌 놈이군.’
철검보의 무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몇 자 적고 진사혁을 바라보았다. 진사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요.”
‘이 빌어먹을 놈이!’
아무리 봐도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철검보의 무사는 허벅지만큼이나 굵은 진사혁의 팔뚝을 보고 화를 꾹 참았다.
‘그래, 니 팔뚝 굵다, 새끼야.’
“험, 본보에 들어오려는 특별한 목적이라도 있소?”
“제왕성이 싫어서 왔소.”
철검보의 무사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진사혁을 바라보았다. 미리부터 각오하지 않으면 한마디 할 것 같았다.
“당신은?”
“그냥 따라 왔소.”
역시나 속 뒤집는 대답이다.
철검보의 무사는 자신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곰 같은 자식!’
조금 마음이 풀어진 그는 방명록을 덮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혹시 본보에 아는 사람 있소?”
“구양손이라는 분을 좀 만났으면 하오만.”
인의철검 구양손. 그의 이름이 나오자 철검보의 무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분과 어떤 사이오?”
“전에 만나 뵌 적이 있는데, 강호에 나오면 꼭 찾아오라고 했소.”
철검보의 무사는 독고무령과 진사혁을 철풍검대로 안내했다. 방에서 나온 구양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독고무령을 한참 동안 살펴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긴 키나 덩치가 전에 비할 수 없이 커졌다. 얼굴도 각이 잡히고 검게 그을렸다.
더구나 산신당에서 만났던 당시만 해도 독고무령의 얼굴은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져 있던 터였다.
구양손이 현재의 독고무령을 보고 칠 년 전의 일을 떠올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디서 봤더라?’
독고무령이 그의 기억을 도와주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만, 어느 분께 육포를 은자 한 냥씩 받고 판 적이 있지요.”
순간 구양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육포! 산신당? 맞아, 바로 자네였군!”
독고무령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와하하하하! 정말 왔군! 잘 왔네!”
구양손은 대소를 터트리며 양손을 활짝 벌렸다.
조금도 거짓이 없는 진심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반긴다.
역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닌 듯하다.
“자, 안으로 들어가세.”
구양손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방 안을 가리켰다.
그때 진사혁이 넌지시 물었다.
“무령, 육포가 대체 얼마만 하기에 은자 한 냥이나 한단 말인가?”
“손바닥보다 조금 컸지.”
“그걸 한 냥이나 내고 산 사람이 있단 말인가? 누군지 모르지만 꽤나 멍청하군.”
몸을 돌리려던 구양손이 진사혁을 째려보았다.
“킁, 저 젊은 친구는 누군가?”
“진사혁이라고, 제 친굽니다.”
진사혁을 째려보던 구양손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뒤늦게야 진사혁의 몸에 깃든 기운의 크기를 알아본 것이다.
‘어쭈? 굉장한데?’
제왕성과의 전쟁을 앞두고 고수 하나가 절실하게 필요한 판국이다. 하거늘 두 명의 청년고수가 자신을 찾아왔다.
두 사람을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멍청이라고 말한 것쯤은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양보할 구양손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비가 많이 와서 사냥도 못할 상황이었지. 근처에 사먹을 곳도 없고 말이야. 아마 자네 같았으면, 한 냥이 아니라 두 냥이라도 냈을 거네.”
그제야 진사혁은 한 냥을 내고 육포를 사먹은 사람이 구양손임을 알았다. 하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에이,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어떻게 두 냥을 내고 육포를 사 먹습니까?”
“배가 고프다고 은덩이를 먹을 수는 없잖은가!”
“그래도 저는 안 사먹을 겁니다.”
구양손은 진사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진사혁은 고개를 슬쩍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독고무령은 엉뚱한 말다툼에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구양손을 달랬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험, 그럴까?”
구양손은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앙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흥! 어디 두고 보자, 이놈.’
“내가 본보의 오대 중 하나인 철풍검대를 맡고 있네.”
“그럼, 저희도 철풍검대에 들지요.”
“그래?”
구양손의 얼굴이 환해졌다.
조금 전까지의 찝찝하던 기분이 확 풀어졌다.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독고무령의 무위는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게다가 진사혁 역시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고.
두 사람이 합류한다면, 철풍검대가 철검보 최강의 대로 올라서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진사혁의 마음은 조금 달랐다.
“무령, 철검보에서 가장 강한 단체는 철정검대라 들었네. 기왕 철검보에 몸담을 거라면 그곳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구양손이 진사혁을 노려보았다.
“철정검대와 철풍검대는 거의 차이가 없네. 그곳에 간다고 해서 대우가 다른 것도 아니지.”
“그거야 그렇지만…….”
또 말다툼으로 번질지 모르는 상황. 독고무령이 재빨리 진화에 나섰다.
“사혁, 내가 이곳에 온 것은 구양 대협 때문이네. 그러니 나는 다른 곳에 갈 생각이 없다네.”
진사혁이 힐끔 구양손을 바라보고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뭐 하는 수 없지.”
구양손은 ‘이놈, 어떠냐?’하는 표정으로 씩 웃고는 독고무령에게 말했다.
“마침 구조 조장 자리가 비어 있네. 일단 그 자리를 맡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아, 혹시 석도명이라는 분이 찾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왔네. 왜……? 가만, 혹시 그들을 본보로 보낸 사람이 자네였나?”
“예.”
“하하하, 그랬구먼. 그랬어.”
구양손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고는, 사람을 불러 그를 데려오도록 시켰다.
곧 석도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독고무령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왔군.”
“지낼 만하십니까?”
“덕분에 편하게 지내고 있네. 감투도 썼고 말이야.”
석도명은 구양손에게 자신에 대한 것을 모두 말해주었다. 철마장의 비밀 결사조직을 이끌던 비호검(秘虎劍)이 바로 자신이라는 걸.
강호에 본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철마장의 남은 무사들을 이끌고 팔기보에 대항하던 비호검에 대한 이야기는 꽤나 유명했다.
어찌나 괴롭혔는지 팔기보가 천 냥의 현상금을 내걸고 잡으려 했었으니까.
당연히 구양손도 비호검에 대한 소문을 숱하게 들었던 터였다. 그는 석도명의 정체를 알고 뛸 듯이 기뻐했다.
대동의 호랑이. 전 장주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팔기보에 대항한 사나이. 그게 바로 비호검이었으니까.
그는 즉시 석도명을 팔조 조장으로 임명했다. 그게 사흘 전이다.
그리고 이제 실력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독고무령이 자신의 아래로 들어왔다.
구양손은 사흘을 굶어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하하하하, 이렇게 자네들을 보니 힘이 솟는군.”
그는 웃으며 힐끔 진사혁을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진사혁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석도명만 바라보았다.
독고무령이 천거했다는 자. 왠지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저 정도는 되어야지. 방정맞은 대주보다 훨씬 낫군.’
* * *
철검오대는 철검보 무력단체의 핵심이었다.
철정(鐵精), 철혼(鐵魂), 철풍(鐵風), 철환(鐵幻), 철양(鐵陽).
대(隊)마다 각 조 열 명씩 구조 구십 명에 대주의 직속무사 열 명 등 일백 명의 정예무사들이 속해 있었다. 합하면 모두 오백의 숫자였다.
물론 그들 외에도 철검보의 규율을 다스리는 철법당(鐵法堂), 순찰과 경비를 책임진 순경당(巡警堂), 잡무를 보는 경무당(輕務堂) 등 삼당에 삼백의 무사가 있고, 호법전과 장로전에 일백의 무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일이 터지면 언제나 철검오대가 최전방에 나섰다.
-철검오대가 무너지면 철검보가 무너진다.
오죽하면 산서의 강호인들이 철검보의 무력을 평할 때 그렇게 말할까.
그런 만큼 철검보는 철검오대의 전력유지에 만전을 기울였다.
특히 지금은 언제 제왕성과 정면충돌할지 모르는 상황. 철검오대의 전력을 더욱 강하게 다듬어야 할 때였다.
철풍검대의 대주인 구양손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면 맨 앞에서 싸워야 한다.
적보다 강하지 못하면 죽는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하거늘 때마침 조장으로도 과분한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왔다. 그로선 독고무령과 진사혁과 석도명에게 많은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구조를 맡아주게. 그리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만 하게. 지원은 아끼지 않을 테니까.
독고무령은 구양손의 말을 떠올리며 석도명과 함께 구조의 거처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