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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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38화
38화
이 장의 높이, 넓이는 칠 장쯤 되는 석벽.
그 거대한 석벽을 가득 메운 그림 맨 앞에는 일곱 개의 글자가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수천제마 구겁무(守天劑魔 九劫舞)
그리고 그 옆에는 그림을 새긴 자의 마음이 작은 글씨로 남겨져 있었다.
[이어지는 게 두려워 버리려 했다. 하나 이것이 세상에 남겨져 나에게 이어졌음은 그 뜻이 있을 터, 어찌 내 자의로 버릴 수 있으랴. 버리는 대신 나의 혼으로 겁(劫)의 기운을 최대한 억눌러 남겨 놓노니, 얻고 얻지 못하고는 모든 게 하늘의 뜻. 연이 없으면 무리한 욕심을 내지 말고 떨치도록 하라.]
진원명이 아득해진 눈으로 글을 읽어보고는,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바로 저 그림이다.”
깊이는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선은 깊이가 다섯 치나 될 정도로 깊고, 어떤 선은 손으로 문질러도 지워질 것처럼 얕았다.
‘허억!’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독고무령은 숨이 콱 막혔다.
“백여 년 전, 선조께서 남기신 것이지. 듣기로는 멈추지 않고 단번에 그리셨다고 하더군. 나는 나가 있을 테니, 다 보았다 싶거든 나오도록 해라.”
옆에 서 있는 진원명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도(舞圖).
춤을 추는 남자의 형상이 거대한 석벽을 가득 메운 채 그려져 있다.
그림은 그림이다. 그러나 절대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몸이 오그라들 것 같은 충격을 주는 그림이 어찌 단순한 그림이랴.
독고무령은 진원명이 나가는 동안에도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일 각이 지나자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렸다.
악다문 입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땀으로 젖은 온몸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이, 이건……. 대체 어떻게 이런 것이!’
지난 세월 익혀온 무공, 그 어느 것으로도 그림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강하게 반발할수록 그림에서 느껴지는 압박감도 커진다.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
심장이 타들어가고,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것만 같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항할 수 없는 상황.
독고무령은 무의식중에 태천일심법을 끌어올리고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순간 중단전에서 은은히 피어오른 기운이 온몸으로 흩어졌다.
귀에서 이명이 들린 것은, 그렇게 반 시진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후우웅!
동시에 그림 속의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그림의 손이 저어지면 몸이 산산이 쪼개진다.
그림의 손이 내려쳐지면 몸이 터져나간다.
허상이다.
하지만 손이 떨어질 때마다 실제처럼 두려움이 밀려든다.
한 시진째.
콰르르릉!
이명이 점점 커졌다.
항거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상황.
독고무령은 대항할 생각도 못한 채 넋을 잃고 그림의 움직임만 쳐다보았다.
몸 안에서 휘도는 기운이 태천일심법의 기운인지 아닌지조차 잊어버린 지 오래. 세상도 잊고 자신도 잊었다.
얼마가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정신이 아득해진 가운데 시간의 흐름조차 멈춰 버렸다.
이제 춤은 절정에 달해서 마지막을 향해 치닫는 상황.
그런데 언제부턴가 자신의 몸이 춤을 따라 춘다. 아니, 그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 추는 춤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눈앞에 거대한 손이 나타났다.
항거할 수 없는 하늘의 손이다. 세상을 덮을 것 같은 그 손이 자신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린다.
찰나였다.
쾅!
머릿속에서 뭔가가 터져나갔다.
어떻게 된 것일까?
독고무령은 눈을 뜨고 석벽을 바라보았다.
그림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괴이했다. 전과 달리 눈앞의 그림에서 자신을 압박하던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꿈이었나?’
그렇게 생각해보기도 했다. 아니라면 머릿속에 뭔가가 남아 있어야 했으니까.
자신이 보았던 춤, 그림 속 사람의 손 움직임, 그리고 마지막에 보았던 그 거대한 손.
그러나 꿈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독고무령은 정좌하고서 혼신을 다해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려 봤다.
거짓말처럼 무엇 하나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다.
‘하아, 내가 본 것이 정녕 허상이었단 말인가?’
허상(虛像)은 허상이되 단순한 허상이 아니다.
하늘의 힘이 담긴 허상을 어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문제는 그 모든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얻고 얻지 못하고는 하늘의 뜻이라 했다. 연이 없으면 무리하게 욕심 부리지 말고 떨치라 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인연이 아닌 것인가?
아쉬웠다. 너무 아쉬워서 자신이 못나 보일 정도다.
무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어떠한 벽을 넘을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었는데도 그냥 보내다니.
‘멍청한 놈!’
독고무령은 다시 한번 그림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열 번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훗, 얻을 만큼 얻고도 또 욕심을 부리다니…….”
독고무령은 씁쓸한 자조의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바깥쪽 방에는 진원명과 진사혁만이 있었다.
그들은 독고무령이 안쪽 방에서 나오자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독고무령의 얼굴에 어린 씁쓸함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하긴 백 년이 넘도록 깨닫지 못한 것을 하루아침에 깨닫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진원명은 쓴웃음을 지으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어떻더냐?”
“저와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뭔가를 보긴 봤는데, 생각나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뭔가를 봤다고?
단순히 그림을 봤다는 말은 아닐 터. 진원명은 눈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뭘 봤는가?”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림 속의 남자가 추는 춤을 본 것 같은데, 아무리 떠올려도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림 속의 남자가 추는 춤을 봤다고?”
단순히 춤추는 그림을 봤다는 말이 아니다. 춤추는 것 자체를 봤다고 했다.
그때 진사혁이 말했다.
“춤추는 거야 거기 그려져 있으니까 봤겠지. 그거 말고 다른 것은 못 봤나? 만 하루를 있었으니 다른 것도 봤을 것이 아닌가?”
만 하루라고?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났나?
잘해야 두 시진 정도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났다고 한다.
독고무령은 그 많은 시간을 보내고도 얻은 것이 없다는 생각에 힘이 더 빠졌다.
“글쎄. 내가 본 것은 춤추는 것과 손이 전부라서…….”
진원명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설마 진짜로 춤추는 것을 본 것은 아니겠지?”
“그것도 확실치가 않습니다. 진짜로 추는 것을 본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춤추는 그림이 그렇게 보인 것인지, 그조차도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으음…….”
진원명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거짓말을 할 거라면, 춤추는 것을 봤다는 것마저 말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본가의 사람 누구도 그림이 춤을 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남들보다 많은 것을 보긴 봤다는 말.’
진원명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진사혁을 바라보았다.
“너, 태원을 벗어나 세상에 나가고 싶다고 했지?”
진사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예, 조부님.”
“정말 나가고 싶냐?”
진가의 후예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강호에 나갈 수 없다. 무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군이나 관에 몸담아야 한다.
그런데도 진사혁은 줄기차게 강호로 나가고 싶어 했다.
그 때문에 혼도 많이 났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강호로 떠난 지 오래였다.
‘제길, 갑자기 왜 그걸 물으시지?’
난데없는 진원명의 말에 진사혁은 등줄기에서 땀이 났다.
어쨌든 그렇게 물을 때는 이유가 있을 터. 그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싶습니다만…… 아버님이 반대하셔서…….”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내가 허락해주마.”
“예?”
진사혁은 엉덩이가 의자에서 붕 떴다.
“정말입니까, 조부님?”
“단, 조건이 있다.”
“뭐든 말씀해보십시오! 소손,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너도 잘 알 거다. 강호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모든 것을 털고 돌아오기 전까지는 본가의 사람임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걸.”
“본가의 율법을 어찌 소손이 모르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조부님!”
“어떻게 된 놈이 가족들과 남이 된다는 걸 저리도 좋아할꼬?”
“그, 그게 아니오라…….”
“쯔쯔쯔…… 저렇게 철이 없으니, 내가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진원명은 혀를 차고 독고무령을 향해 눈을 돌렸다.
“좌우간, 너는 앞으로 최소 삼 년 동안은 저 아이를 따라 다녀야 한다. 그게 조건이다.”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조건에 진사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하지만 진원명은 진사혁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고무령에게 말했다.
“약속을 잊지 않았다면, 내 뜻을 알 거라 본다만.”
진원명은 자신이 뭔가를 얻었다고 생각하나 보다.
진사혁을 딸려 보내려는 것은, 혹시나 얻은 것이 있거든 그에게 돌려주라는 뜻.
나중에라도 얻으면 돌려주면 되고, 못 얻으면 그만이다.
독고무령으로서도 하등 불만일 것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나 지금 당장 무엇을 돌려줄 거라 확실하게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 점은 이해해 주십시오.”
“그건 나도 안다. 꼭 선조가 남긴 그림에서 얻은 것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저 멍청한 놈이 네 옆을 따라다니다 보면, 자그마한 것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딸려 보내는 것일 뿐이야.”
“조부님!”
“왜, 멍청한 놈이라고 하니까 기분 나쁘냐? 그런 놈이 관천뇌곤의 중육식도 제대로 못 펼쳐?”
“그, 그거야…….”
‘쳇, 그래도 제 나이에 중육식을 칠성 이상 익힌 사람은 저뿐이라고요!’
그 말을 해봐야 괜히 머리에 혹만 하나 더 생길 뿐이다.
진사혁은 입을 꾹 닫고 속으로만 구시렁거렸다.
“잔소리 말고,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배워, 이놈아.”
진원명은 마지막 한마디로 진사혁을 눌러놓고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주 쓸모없는 놈은 아니다. 거추장스럽지는 않을 거야.”
“제가 보기에는 무공이 대단한 것 같던데요.”
“대단하기는 개뿔이나. 어디 가서 맞아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진원명이 계속 무시하자, 진사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부님, 곧 밤이 될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흥, 그래, 가봐라. 이 늙은이도 좀 쉬어야겠다.”
“가세, 무령.”
이때라는 듯 진사혁이 재빨리 돌아섰다.
독고무령은 두 사람의 말다툼에 미소를 지었다.
정말 보기 좋은 조손이다. 자신에게도 저런 조부가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정도다.
‘그러고 보니, 삼괴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
제5장 두 줄기 바람은 동쪽으로 향하고
다음 날 아침.
독고무령과 진사혁은 일찌감치 진가철방을 나섰다.
“으하하하하! 정말 바람 한번 시원하다!”
다섯 자 길이의 곤 하나만 달랑 들고 나온 진사혁은 와우령을 넘자마자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태원 일대만 오락가락했던 그다.
익힌 무공도 마음대로 쓸 수 없었고, 싸움이 벌어져도 양보하고 물러서야만 했다. 물론 대부분은 상대가 먼저 양보했지만.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마침내 그렇게 원하던 강호로 간다. 그곳이라면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이었다.
“무령, 정말 고맙네!”
진사혁은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고맙기는. 고마운 것은 오히려 나지.”
“하하하!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조부님의 말씀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도 되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생각한 것은 한 번도 욕심내본 적이 없거든. 어차피 아무도 얻지 못했던 것, 설령 무령, 자네가 거기서 뭘 얻었다 해도 그건 자네의 복이 아니겠나? 그런데 내가 왜 욕심낸단 말인가? 안 그런가? 하하하하!”
진사혁이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도 된 것처럼 포만감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독고무령의 입가에도 잔잔한 웃음이 걸렸다.
진사혁, 정말 겪을수록 마음에 드는 자다. 덩치답지 않게 말이 좀 많긴 하지만.
‘심심하지는 않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