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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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36화
36화
그 기운을 느낌과 동시에 몸속에서 울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텅 빈 곳이 빠르게 채워졌다.
독고무령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아쉽군.’
막상 망아(忘我)의 상태였을 때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깨어나면서 깨달았다. 자신이 어떤 경계에 도달했었다는 것을.
한줄기 기운이 다가오지만 않았어도 그 경계를 넘었을 지도 모르는데…….
독고무령은 눈을 뜨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이를 알 수 없는 노인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마른 몸이지만 큰 키에 허리가 꼿꼿하고, 얼굴에 주름은 많아도 붉은 기운이 도는 게 결코 평범한 노인은 아니었다.
‘굉장한 내력이 갈무리되어 있다. 대체 이 노인이 누군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삼괴보다 더 강해 보이는 노인이다. 천하에 이 정도의 고수가 몇이나 될까 싶을 정도다.
‘진가철방의 무력이 어지간한 대방파 못지않다더니, 헛말이 아니었군.’
하지만 그의 경악도 노인의 마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노인은 독고무령을 잠시 바라보더니,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이가 없군, 어이가 없어. 죽어라 가르쳐도 지푸라기 하나 못 잡는 놈이 있는가 하면, 놀러왔다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듯이 얻는 놈이 있다니. 거참, 허, 허, 허…….”
노인의 말뜻을 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이해했다.
자신이 뜻하지 않게 뭔가를 얻었다는 것.
“죄송합니다.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본의가 있었으면 얻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안해 할 것도 없다.”
뜻이 없었기에 얻었다는 말.
그랬다. 그것은 그야말로 우연이 만들어낸 기연이었다. 아마 그가 쇠 두들기는 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노인이 물었다.
“몸이 울렸겠지?”
“예, 어르신.”
“어느 정도나 울렸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나중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그 크기를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노인의 입이 살짝 벌어지고, 주름살 가득한 눈이 크게 떠졌다.
제법 많은 것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앞에 있는 청년의 말이 사실일 경우, 자신마저 도달하지 못한 곳까지 올라갔다는 말이 아닌가.
“허어…….”
탄식이 절로 나왔다. 칠십 년 동안 얻은 것이 일각 동안 얻은 것만도 못하다니.
“깨달음은 찰나의 순간에 다가오는 것이니, 억지로 욕심을 부리면 평생을 가도 얻지 못할 거라 하셨거늘……. 내 선조의 가르침을 잊어 놓고 어찌 얻기만을 바랄까?”
이번에는 독고무령이 조금 당황했다. 자신이 뭔가를 얻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노인이 이토록 놀랄만한 것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그도, 노인도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가 경계 끝까지 갔었다는 걸. 다시는 오르지 못할지도 모르는 그 벽을 눈앞에 두었었다는 걸.
시간이 지나면서 노인의 표정이 담담해졌다.
“어쨌건 그건 네 복이니 내 뭐라 하겠느냐. 오늘 얻은 것이 당장 어떤 힘으로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훗날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그 공능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이니, 나머지는 네가 노력해서 알아내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어르신.”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쯔쯔쯔쯔. 에혀, 선조님을 어찌 뵈올꼬.”
노인의 뒤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조부님! 어쩐 일이십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독고무령과 비슷한 나이의 청년이었다.
노인은 홱 고개를 돌리더니 청년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어쩐 일이기는! 누구는 지푸라기도 못 드는데, 가마니를 통째로 들고 가는 놈이 있기에 나와 봤다!”
“예? 조부님, 그게 무슨 말씀……?”
“커험, 모르면 말아!”
노인은 심술 난 노인처럼 소리를 지르고는, 몸을 돌려 철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독고무령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나타난 청년은 덩치가 컸다. 아니 잘 단련된 몸인데 키가 크다 보니 덩치가 더 커 보였다.
독고무령도 작은 키는 아닌데, 그에 비교하면 반 뼘 이상은 차이가 날 정도였다.
노인이 화난 표정으로 떠나가자, 청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본래의 표정을 되찾고서 독고무령에게 물었다.
“내가 진사혁이오. 형장이 나를 찾아온 분이오?”
상당히 낙천적인 성격 같다. 어른에게 혼이 나면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 게 보통이다. 아니면 불만스런 표정을 짓던지.
그런데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일을 잊은 것 같은 모습이다.
“그렇소. 운양이 진가철방에 가면 만나보라고 하더이다.”
“운양이? 그 친구가 웬일이지? 허, 그거 참,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좌우간 이리 오쇼.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합시다.”
진사혁이 독고무령을 안내한 곳은 정원 구석에 있는 작은 정자였다.
“그래, 그 친구가 뭐라 합디까? 설마 내 흉을 본 것은 아니겠지요? 아, 그보다 형장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오?”
진사혁이 두서없이 물었다.
독고무령은 그의 질문에 모두 대답해주었다.
“나는 독고무령이라 하오. 운양이 별 말은 하지 않았소. 어릴 때 관제산의 곰과 싸운 적이 있다는 말만 했을 뿐이지.”
“흥! 그럼 그렇지. 그 입만 살은 친구가 그냥 지나쳤을 리 없지. 혹시 곰과 싸울 정도로 무식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소?”
“그 말도 했소. 아마 그 친구가 귀하를 잘못 본 모양이오.”
그 말에 진사혁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 정말 잘 봤소. 그 친구는 나를 아주 우습게 본다오.”
맑은 웃음. 낙천적일 뿐 아니라 단순하기까지 하다.
독고무령은 진사혁이 생각보다 깨끗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 안에 절정의 기운을 지니고도 자신을 조금도 내세우지 않는다.
운양 덕분에 괜찮은 사람을 만난 것 같다.
그때 진사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나를 만나러 온 거요?”
“꼭 그런 이유로 온 것만은 아니오. 내 검을 손볼 수 있는지 알아보려 왔소.”
“검을?”
“진가철방은 강호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들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소.”
“흠, 뭐 개인의 검을 조금 손보는 정도야……. 어디 검을 줘보시오. 내 이래봬도 십 년 이상 철방 일을 해본 사람이오. 보면 어디를 손봐야 할지 알 수 있을 거요.”
독고무령은 옆구리에서 검집째 빼내어 진사혁에게 건넸다.
진사혁은 먼저 검집을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호오, 상당히 좋은 검병과 검집인데요?”
겉보기에는 특별한 무늬 하나 없이 수수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어느 곳 하나 정성스럽게 손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진사혁은 흥미가 인 표정으로 검을 잡아 뽑았다.
순간 입이 반쯤 벌어졌다.
“어? 뭐야? 아직 만들다 만 거잖아?”
“그래서 온 거요. 제대로 좀 만들어볼까 해서.”
“쇠는 괜찮은데……. 아니군.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좋군.”
진사혁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쇠를 오래 다루어본 사람답게 검을 이룬 쇠의 상태를 눈치 챈 것이다.
“불순물이 하나도 없어. 이 정도면 일반 불꽃으로는 불가능한데…….”
“운 좋게 청화를 피워냈소. 덕분에 괜찮은 쇠를 얻었는데, 재주가 없어 아직 다듬지를 못했소.”
“청화를? 설마 독고 형이?”
진사혁의 눈이 커졌다. 독고무령이 청화를 피워냈다는 게 뜻밖인 듯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오. 어떻소, 다듬을 수 있겠소?”
진사혁의 눈이 다시 독고무령의 검을 향했다. 그는 한참 동안 검신을 바라보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작은 조부님께 한번 보여드리겠소. 그분은 우리 철방에서 제일 쇠를 잘 다루시는 분이오. 아마 이걸 보면 좋아하실 거요.”
“그분께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군요.”
“폐는 무슨? 쇠를 다루는 사람에게 좋은 쇠는 최고의 선물인데. 자, 함께 가봅시다.”
진사혁은 그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고무령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사혁은 낙천적이고, 단순한데다, 머뭇거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독고무령은 그런 진사혁이 마음에 들었다.
* * *
독고무령은 진사혁을 따라서 독립된 작은 철방으로 들어갔다. 진가철방의 모든 쇳소리를 아우르던 바로 그곳으로.
철방 안에는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낫을 갈고 있었는데, 독고무령의 눈에는 노인이 마치 바위처럼 느껴졌다.
노인은 낫을 다 갈고 난 다음에야 고개를 돌렸다.
“뭣 하러 왔느냐?”
진사혁은 대답보다 먼저 검을 불쑥 내밀었다.
“이것 좀 봐주십시오.”
노인은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을 뻗으며 말했다.
“장가철방의 철가가 만든 것이군.”
독고무령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검에는 어떤 표식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을까?
그때 노인이 독고무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님에게 들었다. 네가 조금 전에 밖에 있었다던 그 아이더냐?”
노인이 아이라 부르는데도 독고무령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렇습니다.”
“쇠를 다루어본 적이 있느냐?”
“아주 조금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쇠를 다룬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조금 해본 정돈데, 내 망치질 소리의 흐름을 느끼고 공명했다고?”
“운이 좋았습니다.”
노인은 독고무령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 정말 세상은 알 수가 없구나.”
노인은 착잡한 표정을 곧 지우고 손에 들린 검을 뽑아보았다.
검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서 싸늘한 묵광이 반짝였다.
“좋군. 쓸 만해.”
“정말 그렇죠, 조부님? 그런데 말이죠, 이 친구가 청화를 피워서 그걸 만들었다고 합니다.”
노인의 눈이 커졌다.
“정말이냐?”
“그 일 역시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 후로는 두 번 다시 청화를 피우지 못했습니다.”
“흐음…….”
노인은 검신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치 사랑스런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는 듯했다.
그러길 얼마, 노인은 검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사흘만 시간을 주겠느냐?”
이번에는 진사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노인이 순순히 응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사흘이라는 시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단지 날을 세우는 것이라면 아무리 길어도 한나절이면 된다. 그런데 사흘이나 필요하다니.
그에 대한 답은 노인이 했다.
“마침 나에게 괜찮은 현철 한 덩이가 있다. 이 정도 재질이라면 그것과 섞어볼 수 있을 것 같구나.”
두 가지 쇠를 합쳐서 새로운 검을 만들겠다는 말.
독고무령은 미안한 와중에도 어떤 기대감에 선뜻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대신 풀무는 네가 잡아라.”
뜻밖의 제안이다. 독고무령은 난색을 지으며 대답했다.
“청화를 원하신다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운이 좋아서 딱 한 번 피워봤을 뿐이라…….”
“한 번 피워보았다면 두 번도 가능해. 너의 의지가 문제일 뿐이지.”
독고무령은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때 듣고만 있던 진사혁이 나섰다.
“조부님, 저도 함께하면 안 되겠습니까?”
“당연히 네놈도 도와야지. 그럼 네놈이 가져와 놓고 빠져나가려 했단 말이냐? 사흘 동안 계속 단련할 것이니, 도망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
‘헉! 사흘 동안 계속한다고?’
진사혁의 얼굴이 땡감을 씹은 듯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