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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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34화
34화
“공자님, 무슨 일입니까?”
“적이 침입했습니까?”
“별일 아냐! 자신들의 위치로 돌아가!”
청년, 위지성은 짜증내듯 소리치고 담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깨문 그가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나는 위지성이다! 나중에 꼭 다시 만나서 승부를 가르자!”
독고무령은 위지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담장을 따라 움직였다. 뒤끝이 남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위지성이라는 자, 자신의 존재를 호천위에게 알리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이든 무엇이든. 의외라면 의외였다.
‘위지천백의 아들인가? 좋아. 나중에 다시 만나서 정식으로 이겨주지.’
그는 그렇게 자신만의 약속을 하고, 오래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더듬어 비옥을 찾아갔다.
* * *
염상소는 잠을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웬 놈이냐?”
방문을 등지고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둠 속에 녹아 있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비옥에 속한 자는 아닌 것 같았다.
비옥을 관리하는 자는 자신까지 모두 열두 명.
나머지 열한 명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자신이 아닌가.
“누군데 이곳에 들어온 것이냐?”
그가 다시 묻자 어둠 속에 서 있던 자가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어, 염마귀.”
염마귀?
염상소는 오한이 들었다.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대놓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있다면, 아니 있었다면 오직 두 사람만이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독고헌 그리고 소악귀 독고무령.
죽은 독고헌이 살아서 돌아왔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염상소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너, 너……냐?”
“오랜만이야.”
염상소의 표정이 몇 번이나 변했다. 그러더니 숨을 죽이고 크큭거리며 웃어댔다.
“네, 네가……. 크크크, 역시 살아 있었구나.”
“가죽포대, 찢어서 흘려보낸 거 염마귀지?”
“어떻게 알았느냐?”
“남조경이라면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으니까.”
“빌어먹을 놈. 그럼, 나는 어수룩하단 말이냐?”
“왜 그랬지?”
계속된 독고무령의 질문에 염상소가 씁쓸한 표정으로 한마디 툭 던졌다.
“그냥.”
“말해봐. 왜 나를 생각해준 것이지?”
독고무령이 재촉하자, 염상소는 한숨을 푹 쉬며 몇 마디 더 했다.
“후우, 너는 내가 얻어다 먹인 젖으로 큰 놈이다. 일 푼의 가능성이라도 높여주고 싶었지. 진짜로 살아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독고무령은 그것만으로도 대충 염상소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랬나? 하긴, 젖을 아버지가 얻어올 수는 없었겠지.’
찢어질 것 같았던 가슴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덜어진 기분이다.
염상소를 바라보는 독고무령의 눈빛에 약간이나마 온기가 돌았다.
“혹시 내 어머니가 누군지 알아?”
그 질문에 염마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건…….”
“죄수였다고 알고 있어. 염마귀는 알지? 두 여인 중 누가 내 어머니인지.”
염상소는 독고무령이 자신의 생각보다 많은 걸 알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말해주었냐?”
“아니, 내가 알아냈어.”
염상소는 한참 동안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독고무령의 모습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키도 훌쩍 컸고, 얼굴은 거리에 나가면 시선을 끌 만큼 잘생겼다. 거기다 어둠을 뚫고 빛나는 눈은 거암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잘 자랐군. 정말 멋지게 컸어.’
그는 처음으로 독고헌이 부럽게 느껴졌다. 자신은 자식도 없고, 아무런 가족도 없는데, 죽은 독고헌은 저렇게 멋진 자식을 남겨 놓았지 않은가.
‘지미, 그 꼽추 놈이 나보다 낫군.’
염상소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독고무령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알아라. 너는 네 아버지를 절대 원망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가슴에서 주먹만 한 뭔가가 울컥 치민다.
독고무령은 이를 악물고 잇새로 대답했다.
“나도…… 알아.”
“네 어머니는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다. 절대 네 아버지가 죽인 것이 아니다.”
“그랬겠지…….”
“네 아버지는 네 어머니를 고통스럽지 않게 해드렸다. 그것만이 진실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아…… 안다고…….”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서 수정구슬이 흘러내린다.
슬픔과 아픔이 범벅되어 만들어진 구슬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독고무령은 떨리려는 입술을 억지로 열어 다시 물었다.
“그러니…… 이제…… 말해줘.”
염상소는 희미한 달빛이 스며드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느 날 밤, 두 여인이 비밀리에 끌려왔다. 한 여인은 전대성주 고명원의 큰아들인 고원학의 부인 백설향 두진진이었고, 다른 한 여인은 고명원의 딸인 고은선이었다. 끌려온 이유는, 위지 성주가 두 여인에게서 얻어야 할 물건이 있었기 때문이지.”
위지천백이 제왕성을 차지했다지만, 그가 알고 있는 제왕삼비는 반쪽에 불과했다.
그는 나중에야 자신이 얻은 게 반쪽이라는 걸 알고는, 나머지 반쪽을 가지고 있는 두 여인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그녀들은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악착같이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말해줘도 죽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위지천백은 그녀들이 입을 열지 않자 고문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틀간의 고문으로도 그녀들의 입을 열지 못하자, 결국 그녀들을 비옥으로 보냈다. 철저히 함구령을 내린 채.
만삭이 된 두 여인을 고문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면, 만인으로부터 지탄을 받을 게 분명했으니까.
“네 아버지는 새로운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녀들로 하여금 죽기 전에 비밀을 불게 만들었지. 한데 이상한 점은, 죽은 그녀들의 표정이 별로 고통을 겪은 것 같지 않다는 거야. 물론 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비밀에 대해서만 관심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녀들이 죽기 전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하나는 딸이었는데 낳자마자 죽고 말았지.”
독고무령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입술을 씹으며 물었다.
“그럼…… 염마귀는 알겠군. 내 어머니가 누군지…….”
염상소가 고개를 돌려 독고무령을 직시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모른다. 오직 네 아버지만이 알 뿐.”
“아버지만…… 안다고?”
“그 인간이 입을 다물어버렸거든. 누구 아들이든 무슨 상관이냐면서.”
-너는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귀에서 왱왱 울렸다.
그때 염상소가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네 아버지가 왜 비옥십팔호실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된 줄 아느냐?”
독고무령은 부서질 듯이 이를 악물고 염상소를 쳐다보았다.
이런저런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런데 왜 염상소는 그걸 묻는 걸까?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몸이 덜덜 떨렸다.
“서, 설마……?”
“바로 너 때문이다. 네가 그 여인들의 자식이기 때문에, 너를 살리고 싶어서, 네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그곳을 나가지 않겠다고 성과 약속한 것이다.”
“그, 그런…….”
“그러니 너는 절대 네 아버지를 원망해선 안 된다는 거다. 너를 위해, 잠깐씩이나마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포기한 네 아버지다. 그런 네 아버지를 원망한다면, 너는 정말 나쁜 놈이다.”
“끄으…….”
끝내 독고무령의 목에서 억눌린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목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심장이 쪼개지고, 가슴이 터지는 소리였다.
* * *
“아버지이이이!!!!!”
관제산 남쪽 깊은 곳의 계곡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계곡을 따라 흐르던 거친 물살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바위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가던 계곡물이 폭포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달조차 서쪽으로 기울어진 밤, 독고무령은 폭포 아래에 서서 아버지를 불렀다.
제왕성에서는 아버지를 화장했다고 했다. 염상소는 제왕성에서 삼십 리나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화장한 아버지의 유골을 가루 내어 계곡물에 흘려보냈다고 했다. 더 넓은 세상으로 흘러가길 바라며.
이제는 뼈조차 남지 않은 아버지다.
하지만 독고무령의 가슴에는 더욱 깊고 단단하게 새겨졌다.
‘그래요, 아버지 말대로 제가 누구 아들이면 뭐하겠습니까? 그저 아버지의 아들이면 되는 것인데요.’
서쪽 봉우리 너머로 넘어가려던 반달이 그를 내려다본다. 아버지의 등처럼 구부러진 환한 달빛이 아버지의 웃음 같기만 하다.
독고무령은 고개를 쳐들고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아랑곳하지 않고 환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약속했잖아요! 세상에 지지 않을 거라고! 누가 뭐래도 아버지의 아들이라고요!’
바라보는 동안 반쪽 달이 서산의 품속으로 사라졌다.
독고무령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는 고개를 내렸다.
어둠이 그의 몸을 덮고 계곡마저 검게 물들였다.
‘그래도…… 어머니의 존재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어요. 그건 아버지가 이해해주세요. 그러면 그분이 너무 불쌍하시잖아요.’
서서히 그의 몸에서 어둠보다 더 짙은 암울함이 피어올랐다.
몰랐던 것을 몇 가지 알았다.
심장이 터지고 머리가 하얗게 타버릴 충격적인 사실을.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일 뿐이다.
쓸쓸히 죽어간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위해서, 모든 것을 알아내고야 말 것이다.
제4장 진가철방(陳家鐵房)
“칠 년 전, 인근에서 눈에 띄는 행적을 보인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고교의 객잔에서 조금 수상쩍은 증언이 나왔습니다.”
남조경은 소엽의 보고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수상쩍은 증언?”
“그 당시 온몸에 타박상을 입은 환자 하나가 마차에 실려 들어왔다는데, 그 환자의 나이가 십오륙 세의 소년이었다 합니다.”
“소년이라고?”
“그 근처의 아이는 아니었는데, 몸이 하얘서 곧 죽을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남조경의 눈빛이 칼날처럼 번뜩였다.
설마 놈이, 죽은 줄 알았던 소악귀가 살아서 지하수로를 통과했단 말인가?
남조경은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빌어먹을! 젠장 할! 말도 안 돼!’
자신이 생각하는 한 놈이 살아서 지하수로를 통과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이십 리가 넘는 지하수로를 어린놈이 통과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가끔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던가.
온몸의 타박상만 해도 그렇다. 그 상처는 지하수로를 통과하며 난 상처일 가능성이 컸다. 더구나 시기마저 같다.
남조경은 거칠어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머리를 굴렸다.
만에 하나라도 소악귀가 살아 있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살아 있는 천자무서가 있다는 뜻이다. 성주조차 해석을 포기한 완벽한 천자무서가.
‘잘못되면 이 일로 인해 내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반면에 일이 잘만 되면 제왕성의 이인자가 될 수도 있다.
지옥과 천국이 소악귀의 향방에 달렸다는 말.
남조경은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죽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살아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야 한다. 최악의 경우 모든 것을 지우는 한이 있어도.
“분명히 몸이 하얀 소년이었단 말이지?”
“자신이 의원까지 불러다줘서 기억하고 있다 합니다.”
“의원은 만나봤느냐?”
“아쉽게도 의원은 이 년 전에 죽었다 합니다. 대신 그들이 태원 쪽으로 갔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태원이라고?”
“예, 당주. 지금 비화당의 비첩 다섯이 당시 마차의 행적을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그래?”
남조경의 눈 깊은 곳에서 새파란 살기가 번뜩이다 사라졌다.
“즉시 태원으로 가서 네가 모든 일을 직접 지휘해라.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점, 절대 명심해. 너와 나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소엽의 표정도 창백하게 굳어졌다. 뒤늦게 이 일의 심각성을 눈치 챈 것이다.
“각골명심하겠습니다, 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