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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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30화
30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인걸은 나락에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온갖 사람들을 상대해본 그다. 그중에는 강호의 유력인사도 있었고, 사기꾼도 있었고, 자객도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을 상대하는 법을 나름대로 알고 있다 자신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자신할 수 없었다.
마인걸은 악착같이 머리를 굴린 끝에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그중 첫 번째는, 당연히 도주였다.
삼 장 뒤에 비밀 출입구가 있다. 그곳까지만 가면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 해도 삼 장 정도는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자신도 약하지 않다.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좋아, 해보자.’
그러나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나직한 목소리가 귀청을 파고들었다.
“안타깝군. 하긴 사람들은 지옥을 보기 전에는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지.”
동시에 독고무령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흠칫한 마인걸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순간, 독고무령은 취접라로 마인걸의 목을 움켜잡고는 벽에 사정없이 밀어붙였다.
퍽!
“컥!”
억눌린 신음을 비명처럼 토해낸 마인걸의 얼굴이 회칠을 한 것처럼 창백해졌다.
“마인걸, 아니 마호용, 나는 당신의 과거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어.”
고저가 없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그것이 마인걸을 더 질리게 했다.
“나, 나는…….”
“적우에 대한 것 중 몇 가지만 알려주면 돼. 그러면 당신의 옛 이름은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질 거야.”
마인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마호용이라는 이름. 그것은 그가 가진 가장 큰 비밀이었다. 그의 이름이 밝혀지면, 그는 하루하루를 불안감 속에 살아가야 한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일군 모든 것을 팽개치고 도망쳐야 할지 몰랐다. 강호에서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의 주인이 그를 죽이려 할 테니까.
딸의 복수를 위해서.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주면 저자의 머릿속에서 그 이름이 완전히 지워질까?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 또한 아무 것도 없었다.
“뭐, 뭘…… 알고 싶어서…….”
“적우, 그에게 지저분한 취미가 있다고 들었지. 그걸 말해주면 돼.”
제3장 제왕성(帝王城),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침에 태원을 출발한 독고무령은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가 서산마루에 걸쳐질 즈음에야 관제산에 도착했다.
관제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세 부류에 속했다.
산서의 패자, 제왕성의 사람들. 제왕성에 볼일이 있어 가는 사람들. 그리고 제왕성을 살피고자 하는 상대세력의 첩자.
독고무령은 그들 속에 섞여 관제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왕성에는 떠돌이 무사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찾아든다. 행여나 눈에 들어 제왕성의 정규무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봇짐을 메고 옆구리에 철검을 걸친 그는 누가 봐도 그런 떠돌이무사 중 하나일 뿐이었다.
석양이 질 무렵.
제왕성의 거대한 정문 앞에 도착하자, 정문위사 중 하나가 독고무령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자였다. 독고무령의 나이가 어려 보여서인지, 아니면 떠돌이처럼 보여서인지 그는 대뜸 반말로 소리치고 다가왔다.
독고무령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우뚝 서서 정문위사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어디서 온 누군가?”
코앞까지 다가온 정문위사가 턱을 치켜들며 질문을 던졌다. 독고무령은 담담히 대답했다.
“오대산에서 수련한 고령이라 하오.”
“사문은?”
“없소. 그냥 아버님과 조부님께 검을 몇 수 배웠을 뿐이오.”
정문위사는 독고무령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조소를 흘리며 되물었다.
“훗, 그러니까 가전의 검을 배웠다?”
“그렇소.”
“익힌 검법의 이름은 뭔가?”
독고무령은 잠시 생각하더니, 목에 힘을 주고 나직이 대답했다.
“천뢰무적파천검이오.”
“천뢰무적파천검?”
정문위사는 눈을 크게 뜨고 독고무령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한…… 검법 이름이군.”
기도 안 찬다는 눈빛. 대소를 터트리고 싶은데, 보는 사람이 많아서 참는다는 표정이다.
“크, 크, 하긴 원래 삼류검법이 이름은 항상 거창하지. 용케 없는 이름을 골라서 지었군. 정말 멋져!”
정문위사가 감탄할 만했다. 수십 개의 검법 명을 떠올리고, 그중 패기가 넘치는 이름 넷을 고른 후, 부르기 좋게 합친 것이 바로 그 무식한 검법 명이니까.
정문위사는 한참 동안 큭큭거리다 겨우 웃음을 억눌러 참고 다시 물었다.
“이곳에 온 이유는 물론 본성의 무사가 되고 싶어서겠지?”
“그건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소.”
제왕성을 적으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인연을 끊을 것인지.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제왕성을 친구로 삼지는 않을 거라는 것.
정문위사는 그 말을 자신이 없다는 투로 알아듣고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거 잘 생각했군. 떨어져도 실망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하루에도 자네 같은 사람들 백 명은 오는데, 본성은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거든.”
“설마 들어가지도 못하는 거요?”
“물론 그것은 아니지. 자네 같은 떠돌이들을 위해서 따로 거처까지 만들어놨으니 말이야.”
“그럼 들어가도 되겠소?”
정문위사는 눈을 치켜뜨고 독고무령을 꼬나보았다.
“그런데…… 말버릇이 좀 그렇군. 원래 그렇게 배웠나?”
“혼자 오래 수련을 하다 보니 그럴 뿐이오. 혹시라도 제왕성의 무사가 되면 고쳐보도록 하겠소.”
정문위사는 머리를 바짝 들이밀고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안 그러면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죽을 테니까.”
“알겠소. 한데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오?”
정문위사가 정문 안쪽의 좌측을 가리켰다.
“저 안으로 가봐. 그러면 기다란 건물이 보일 거다. 그곳이 자네처럼 본성의 위용을 구경하러 온 떠돌이들 지내는 곳이니까, 함부로 다른 데 가지 말고 그곳에 있어. 가면 명부가 있으니 빠짐없이 기록하고.”
“고맙소.”
독고무령은 고개를 까닥 숙이고 정문을 넘어 좌측으로 꺾어졌다.
그때 뒤에서 정문위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독고무령의 신상명세를 한쪽에 앉아 있는 서기에게 알려주는 듯했다.
“오대산의 낭인 고령. 사문 없음. 가문의 검초 습득. 분류, 삼급!”
* * *
제왕성은 일반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얼마나 넓은지 거대한 성을 관제산 자락에 털썩 옮겨 놓은 것 같았다.
하기야 상시 거주하는 인원만도 삼천 명이 넘고, 그중 무사가 이천에 달한다. 이런저런 시설을 갖추려면 어지간히 넓어서는 안 될 터였다.
그러한 시설 중 일반 낭인무사들이 머무는 무객당(武客堂)은 정문에서 이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독고무령이 그곳에 도착하자 맨 앞쪽 방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고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어이, 이리 와서 이거 적게.”
정문위사가 명부에 기재해야 한다더니 그걸 말하는 듯했다.
독고무령은 안으로 들어가서 서기가 내준 명부에 자신의 신상명세를 적었다. 정문위사에게 말해준 것과 똑같이.
서기는 코를 후비며 힐끔 그 내용을 보더니, 조소가 담긴 표정으로 은전을 베풀듯이 말했다. 코를 판 손을 휘휘 저으며.
“구호실로 가서 쉬게. 객당을 둘러싼 담 밖으로는 함부로 나가지 말고.”
“알겠소.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소만.”
서기는 다시 코를 파려다 인상을 찌푸리며 독고무령을 째려보았다.
“뭔데?”
“집법전의 노태릉 전주를 뵈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서기는 콧속에 손가락을 꽂은 채 멍하니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제왕성의 서열 십 위인 집법전의 전주와 무객당의 서기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신분 차이가 난다. 노태릉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콩닥거릴 정도다.
서기 오정은 후다닥 콧속에 찔러 넣은 손가락을 빼고 더듬으며 물었다.
“그, 그분은 왜……?”
“가까운 친척뻘 되는데, 만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러는 거요.”
친척뻘이란다. 그것도 가까운.
진짜일까?
눈빛 하나 안 흔들리는 것으로 봐서 거짓말 같지는 않다.
집법전주의 친척이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조금 전의 어벙해 보이던 태도마저 무게감 있는 행동처럼 느껴지고, 멀뚱하게 보였던 것도 고요한 기도처럼 보였다.
‘최소한 사돈에 팔촌 정도는 될 것 같군.’
잽싸게 판단을 내린 오정은 조금 전까지의 시건방진 태도를 털어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걸 왜 이제 말씀하시는 겁니까, 공자?”
“처음으로 강호에 나오다 보니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랬소. 미안하오.”
“별 말씀을……. 아,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시겠소?”
“하, 하. 걱정 마십시오. 제가 비록 이곳에서 일은 하고 있지만, 발은 누구 못지않게 제법 넓습니다.”
“고맙소. 아, 그리고 혹시라도 연락을 할 수 있게 되거든, 전옥이라는 아이의 일 때문에 만나러 왔다고 전해주시오.”
“알겠습니다, 공자. 일단 제가 연락을 취할 때까지 쉬고 계시지요.”
독고무령은 구호실로 갔다. 그곳에는 침상이 열 개 있었는데 사람은 네 명밖에 되지 않았다.
한 사람은 누워있고, 두 사람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방문 반대쪽에 서서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독고무령이 방으로 들어가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독고무령은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구석진 곳의 빈 침상으로 다가갔다.
“어디서 왔소?”
바로 옆 침상에 누워서 주사위를 굴리고 있던 자가 고개만 돌리고 물었다.
독고무령은 봇짐을 내려놓으며 짧게 대답했다.
“오대산이오.”
“나는 대동에서 온 유원위라 하오. 한 방에 묵게 된 것도 인연인데 이름이나 압시다.”
유원위라는 자는 이제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는데, 둥글둥글한 얼굴에 붙임성이 좋았다.
독고무령은 들어올 때 밝혔던 가명을 말해주었다.
“고령.”
두 사람이 서로 이름을 나누자, 나머지 세 사람도 슬쩍 끼어들었다.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 사람 중 입술 위에 길게 상처가 있는 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는 조원화라 하지.”
그러자 그의 말상대였던 매부리코의 청년도 입을 열었다.
“연사성이네.”
둘 다 이십 대 중후반의 나이로, 강호에서 제법 굴러먹은 듯 눈빛이 날카로웠다.
“내 이름은 석도경이네.”
마지막으로 창문 쪽에 서 있던 자가 이름을 밝혔다. 그는 네 사람 중 나이가 제일 많아 보였는데, 그래봐야 삼십 초반 정도인 듯했다.
거친 수염이 수북한 각진 턱, 떡 벌어진 어깨, 묵묵한 표정. 강인한 인상을 가진 그는 뭔가 사연이 있는 듯 눈빛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서로가 이름을 밝히자 어정쩡하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주사위를 손가락 사이로 돌리며 묘기를 부리던 유원위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사문이 어디요, 고 형?”
“그냥 아버님과 조부님께 검을 조금 배웠을 뿐이오.”
유원위는 피식 웃으며 못 믿겠다는 투로 말했다.
“에이, 몸을 보니까 제법 오랫동안 수련을 한 것 같은데?”
그때 석도경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섰다.
“자네는 정말 궁금한 것도 많군.”
“형님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궁금한 걸 알기 위해서 상대를 곤란하게 하지는 않지.”
“쩝, 천성이 그런 걸 어떡합니까?”
유원위가 머리를 긁적이자 조원화가 한마디 했다.
“그렇게 혼나면서도 매번 그러니 천성은 천성이지.”
“크크, 누가 말려? 저놈의 천성을. 유가야, 그놈의 주사위는 질리지도 않냐?”
연사성도 웃으며 유원위를 몰아붙였다.
독고무령은 그들의 관계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건네기 힘든 말투다.
마치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듯 유원위가 떠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