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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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9화
29화
발이 접질렸는지, 계단을 내려가던 애화가 비틀거리며 옆으로 넘어졌다.
독고무령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소?”
“예, 공자님.”
애화는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반쯤 일으키며 독고무령의 가슴으로 안겨들었다.
분 냄새가 확 밀려들며 부드러운 살결이 가슴으로 안긴다. 독고무령은 당황한 표정으로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애화가 그러도록 놔두지 않았다.
“아…… 발을 삐었나 봐요. 좀 잡아주시겠어요?”
그녀는 이마를 찡그리며 독고무령의 허리를 손으로 감았다. 그녀의 풍성한 가슴이 독고무령의 허벅지에 눌려 이지러졌다.
독고무령은 차마 손을 떨치지도 못한 채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일어나 보시오.”
‘아, 정말 멋진 몸이야. 이런 몸에 안기면…….’
애화는 독고무령의 몸에 찰싹 달라붙은 채 몸을 일으켰다.
“발은…… 괜찮소?”
“예, 공자님. 참을 만해요. 흐응, 그냥 이대로 내려가요.”
독고무령은 손을 놓지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내려가면 내려가는 것이지, 왜 가슴을 쓰다듬는단 말인가. 왜 몸을 바짝 붙이고 비벼댄단 말인가.
그때 문득 운가고서점의 구석진 곳에서 본 책자의 내용이 떠올랐다.
얽혀든 남녀의 묘한 자세. 금방이라도 신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표정…….
심장박동이 서서히 빨라지고, 몸에서 열기가 나는 듯했다.
가슴에서 청량한 기운이 흘러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헛, 이게 무슨…….’
황급히 정신을 차린 그는 애화의 허리를 잡고 자신의 몸에서 떼어냈다. 뭉클한 살결이 손 안 가득 느껴졌지만, 이미 안정된 그의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다.
“좀 떨어져야 걸을 수 있을 것 아니오?”
“그냥 안고 가도 되는데…….”
“사람들이 보고 있소. 그러니…….”
“상관없어요. 저 안의 사람들은 더한 짓도 하는데요, 뭐.”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요. 일단 떨어져서 내려갑시다.”
애화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아쉬웠지만, 손님에게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공자님 말씀대로 할게요.”
겨우 지하 이 층의 내실로 들어가는 석문 앞에 도착한 독고무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무사가 부럽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속으로야 난감했지만, 독고무령은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 이 층의 도박장은 일 층의 반 정도 크기였다.
그러나 일 층보다 몇 배는 더 화려했다.
거기다 온갖 장식이 사면을 치장하고 있어서 조금도 석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박이 벌어지고 있는 탁자는 모두 네 개.
손님은 십여 명뿐이었고, 역시 비슷한 숫자의 여인들이 그들의 시중을 들며 오갔다.
독고무령이 애화와 함께 들어가자 그중 몇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호오, 젊은 손님이 오셨군.”
“처음 보는 분 같은데, 뉘신가?”
독고무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도박장 안을 둘러보았다.
각 탁자마다 수백 개의 동전이 쌓여 있었다.
탁자를 둘러싼 채 앉아 있는 사람들의 나이는 삼십 대에서 육십 대까지 다양했는데, 무인으로 보이는 자도 있었고, 돈 많은 부호로 보이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오직 탁자 위에서 돌아가는 상황만 주시했다.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모를 것 같았다.
그리고 손님과 여인 외에도 네 개의 기둥 아래에 무기를 지닌 자들이 한 사람씩 서 있었다. 아마도 만약의 경우 질서유지를 위한 무사들인 듯했다.
독고무령은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다 한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일 년 열두 달 햇빛을 못 본 것처럼 하얀 얼굴, 떴는지 감았는지 모를 가느다란 눈, 네모난 턱, 탐스런 흑염이 백색 비단장삼 위로 가슴까지 늘어져 있다.
운양이 말한 마인걸과 같은 모습.
그는 천장에서 바닥까지 흘러내린 붉은 휘장 앞의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와의 거리는 십여 걸음 정도.
독고무령은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마인걸과의 거리를 삼 장까지 좁혔을 때였다. 애화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그곳은 손님이 다 찼으니 다른 곳으로 가요.”
“괜찮소. 저 사람은 나를 받아줄 테니까.”
“예?”
“내 걱정 말고 당신은 잠시 쉬도록 하시오.”
독고무령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애화를 놔둔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둥 아래 서 있던 장한 하나가 그의 앞을 막았다.
“다른 곳에서 노시오.”
“나는 마 방주와 함께했으면 하오.”
“방주께서 계신 곳은 사람이 다 찼소.”
“그럼 일단 그에게 물어봅시다.”
독고무령의 눈이 마인걸을 향했다.
그의 입이 보일 듯 말듯 달싹였다.
순간 마인걸의 표정이 굳어지고, 눈빛이 잘게 떨렸다.
곧 몸을 일으킨 마인걸이 입을 열었다.
“물러서라.”
독고무령의 앞을 막아섰던 무사가 옆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두 눈만큼은 독고무령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마인걸은 수하를 물러서게 하고는, 마주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허허허,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손님이 와서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 * *
마인걸이 지하 이 층을 만든 것은 도박을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항상 목숨의 위협을 받는 그로선 안전지대가 필요했다.
물론 지하 이 층이 그의 목숨을 완전히 지켜주지 못할 거라는 것쯤은 그도 알았다.
그러나 살아날 확률을 높여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하기에 그는 지하 이 층에다 도박장만큼이나 넓은 그의 비밀거처를 따로 만들었다.
그는 독고무령을 그곳으로 데려갔다.
“앉으시게.”
독고무령은 태연히 마인걸의 반대편에 앉았다.
곧 시비가 나와 차를 따르고 물러났다. 마인걸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그 후였다.
“허허허, 내 살아생전에 그날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마인걸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 감추는 재주는 치선만 못했다. 그러니 독고무령이 그의 마음을 눈치 챈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놀라셨다면 미안하오.”
“놀라기는? 그저 조금 의외였을 뿐이지.”
“그렇다면 다행이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가?”
묻는 마인걸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자네 말고 또 있나?”
독고무령은 솔직하게 말했다.
“없소. 세상에서 그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오.”
“호오, 그래?”
마인걸의 두 눈에서 새파란 빛이 번뜩였다.
그럼 너만 죽으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겠군. 멍청한 놈. 그런 뜻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러나 독고무령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나를 죽이고 싶소?”
“허허허. 나는 살인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네.”
죽이고 싶었다. 앞에 있는 놈을 죽이면 자신의 비밀이 영원히 사라질 테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왜 이놈은 이곳까지 들어와서 그런 사실을 밝힌 걸까?
정말 멍청해서 그런 것일까?
혹시 말과 달리 그 일을 아는 놈이 또 있는 것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리 멍청해도 죽을 지 모를 곳에 들어가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독고무령에게 물었다.
“그래, 그 말을 했을 때는 뭔가 원하는 게 있어 날 찾아온 것 같은데.”
“물어볼 것이 하나 있소만.”
“물어볼 거라……. 어디 말해보게. 내가 알고 있는 거라면 말해주지.”
“적우의 비밀에 대해 아는 게 많다고 들었소.”
“적우?”
마인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적우’라는 단어가 뭘 가리키는지 깨닫고 안색이 하얗게 굳었다.
“서, 설마…… 제왕성의 적우를 말함인가?”
“맞소. 바로 그요.”
적우(赤雨) 노태릉.
그는 제왕성의 집법전주다.
독고무령이 그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가 바로 비옥을 관장하는 총책임자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알고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지?”
“사지 근맥이 잘린 어떤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자신이 아는 사실을 다 털어놓았소. 그런데 그중에 당신과 적우의 관계에 대한 것이 들어 있더군.”
“그게 누군데……?”
독고무령은 마인걸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소화삼.”
순간 마인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소화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천하를 통틀어도 다섯을 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소화삼’은 절대 입 밖으로 내뱉어서는 안 되는 이름이다.
이제 영원히 잊혀야 되는 이름. 그게 소화삼인 것이다.
하거늘 그의 이름이 나왔다.
마인걸은 찻잔을 잡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불안감이 아직 사라진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소화삼이라는 이름이 나온 이상 후환에 대한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될 터.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직시했다.
“자네는 알아서는 안 되는 이름을 알았네.”
찰나, 독고무령의 머리 위 천장이 소리 없이 갈라지고, 시커먼 공간에서 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한 줄기 번개가 내리꽂혔다.
쉬이익!
독고무령은 위를 쳐다보지도 않고 탁자를 밀었다.
순간 의자에 앉은 그가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뒤로 밀려났다.
밀려난 거리는 다섯 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차이면 생사가 몇 번은 갈리고도 남을 거리다.
독고무령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쌍수를 휘둘렀다.
좌수로는 취접라를 펼쳐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검을 낚아채고, 우수로는 귀월인을 펼쳐 상대의 목을 쳤다.
서걱!
마치 칼날에 스친 듯한 소리가 나더니, 암습자의 목에서 피 화살이 솟구쳤다.
그와 동시, 좌우 양쪽의 휘장이 갈라지며 살기 가득한 공격이 이어졌다.
둘 다 일류에 달하는 실력을 지닌 자들.
그러나 독고무령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서 마인걸을 바라보며 양손을 휘둘렀다.
땅!
일수에 부러진 검날이 하늘로 튕겨진다.
독고무령은 한 발 옆으로 내딛으며 눈을 부릅뜬 암습자의 가슴에 일장을 내려쳤다.
쾅!
“커억!”
일장에 가슴이 움푹 함몰된 자는 입을 쩍 벌린 채 그 자리에 무너졌다.
그 사이 또 다른 자가 독고무령의 등을 덮쳤다.
순간이었다. 독고무령은 뒤쪽을 향해 몸을 튕기며 암습자의 도세 안으로 몸을 던졌다.
뜻밖의 행동에 당황한 암습자는 칼을 끌어당기며 내리쳤다.
덥석!
독고무령은 상대의 칼날을 맨손으로 움켜쥐고 내력을 쏟아냈다. 순간 칼날을 타고 밀려들어간 내력이 암습자의 손아귀를 터트렸다.
“큭!”
독고무령은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상대에게서 칼을 빼앗아 마인걸에게 던지고는, 손아귀가 터져나간 암습자의 목을 잡아 휘둘렀다.
콰앙!
암습자의 몸이 탁자 위에 떨어지며 한 뼘 두께의 탁자가 반쪽으로 쪼개졌다.
그리고 곧 방 안이 조용해졌다.
한편, 마인걸은 꼼짝도 못한 채 눈을 파르르 떨었다.
암습을 한 세 사람은 모두 일류고수다. 마인걸 자신이라 해도 짧은 시간 안에 이기기가 쉽지 않은 실력을 지닌 자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무려 백 냥의 황금을 쓰고 이들을 끌어들였다.
그 후 지하 이 층의 안전을 맡겼다. 셋이라면 절정고수라 해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실력을 지닌 자들이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만큼 어이없게. 자신이 힘을 보탤 시간도 없이.
문제는 상대가 세 사람을 모두 죽여 버렸다는 점이다.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난 실력에 냉혹한 심장마저 지녔다는 뜻.
-저자는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는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몸을 돌리려는 순간!
쾅!
칼 하나가 그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 석벽에 깊숙이 박혔다.
-움직이면 죽는다.
마인걸은 독고무령이 칼을 던진 걸 그렇게 받아들였다. 하기에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이만 악물었다.
동시에 마지막 세 번째 호위무사의 몸뚱이가 탁자를 부수었다.
그리고 독고무령의 목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시오.”
마인걸은 주먹을 움켜쥐고, 안간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왜 나를…….”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 텐데?”
“그, 그럼 뭐가 중요하단 말이냐?”
“당신의 목숨.”
마인걸이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흥! 나를 죽이면 너도 나가지 못할 거다!”
“이곳에는 비밀출입구가 있다고 하더군. 그곳만 알아낸다면 어려울 것도 없지.”
“내가 말해줄 것 같으냐? 웃기는 소리! 나는 네놈과 이곳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마인걸을 응시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사람을 죽여 봤소. 당신이 상상할 수도 없는 나이에. 그리고 사람이 죽어가는 옆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잤지. 당신은 말하게 될 거요. 아니면…… 소화삼처럼 살아서 지옥을 알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