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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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4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28화
28화
운양의 숨이 목구멍에서 턱 막혔다.
제왕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핏대가 서는데, 산서 무림 전체를 이야기해 달라고?
“대략적인 것만 알면 되오.”
말이 대략적인 것이지, 이야기가 조금만 옆으로 흘러도 날 새는 것은 일도 아니다.
“잘 모르시오? 하긴, 고서점의 주인에게 무림의 동향을 물은 내가 좀 그렇군.”
‘이 인간이 정말!’
쇠스랑으로 속을 박박 긁는 듯한 말투.
삼지창으로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 같은 눈빛.
모른다고 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이야기를 해주자니 여차하면 날을 새야 할 판이다.
빌어먹을!
운양이 독고무령을 노려보며 빽 소리쳤다.
“좋소! 하지만, 일단 배부터 채우고 합시다!”
* * *
동틀 무렵 이야기가 끝났다.
운양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어깨가 축 늘어진 자신과 달리 상대는 조금도 다름없는 표정, 눈빛이었다.
물론 말투도 똑같았다.
“태원에 들어오자마자 대단한 분을 만난 것 같소.”
내가 원래 좀 대단하긴 하지.
운양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 창문이 밝아지고 있었다.
‘제길, 날 샐 줄 알았다니까.’
운양도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독고무령이 가끔씩 죄수들에게, 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 단편적인 것을 말해주었으니까. 운양의 머릿속에 든 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운양이 말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한두 시진이면 끝날 이야기에 살을 덧붙인 것은, 바로 독고무령이 가끔씩 던져주는 정보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떡밥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한 채.
‘뜻밖이군. 고서점 주인이 이토록 무림 동향에 밝다니.’
독고무령은 운양이라는 사람이 새롭게 보였다.
단순히 무림 동향에 밝은 것만이 아니었다. 말하는 중간 중간 자신의 의견을 넌지시 피력하는데, 예리하기가 잘 갈린 칼날 같았다.
일개 소매치기집단과 연관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아는 것도 많고, 판단력도 뛰어난 자다.
독고무령은 한쪽에서 쪼그린 채 졸고 있는 초운을 일견하고 운양에게 물었다.
“내가 알기로, 저 아이는 배수(扒手 소매치기)요. 물론 운 형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오만?”
그러고는 ‘내 말이 맞지?’ 하는 눈으로 운양을 바라보았다.
운양은 부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알고 있소. 나는 아우들이 무얼 하는지 알아야 하는 형이니까 말이오.”
“아무래도 운 형이 작서파의 왕초가 아닌가 하는데, 맞소?”
“그것은 반만 맞은 이야기요.”
“반만?”
“작서파는 흑도의 무리들이 붙여준 이름일 뿐, 우리 형제들은 결코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소.”
운양은 독고무령을 쏘아보았다.
상대는 자신이 어린 배수들의 왕초인 것까지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이 될 수 있는 자다.
거기다 자신의 진정한 정체까지 알려준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친구가 되든지, 아니면 죽이든지.
그는 일단 상대의 의중부터 떠보았다.
“그런데 무형은 왜 그걸 궁금해 하는 것이오?”
독고무령은 담담한 표정으로 운양의 눈을 마주보며 대답했다.
“나는 어떤 일을 하려고 세상에 나왔소. 한데 모르는 게 너무 많소. 그래서 많이 아는 사람이 필요하오.”
운양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너, 나 좀 도와다오’, 그 말이나 마찬가지처럼 들렸다.
웃기지도 않는 얘기다.
자신이 왜 생판 알지도 못하는 자를 도와줘야 한단 말인가?
대충 살펴보니 어디 깊은 산속에 처박혔다가 오륙 년 만에 나온 외톨이 같다.
자신은 그런 외톨이하고 소꿉장난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몸이 열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사람이 바로 자신인 것이다.
‘미친 놈!’ 그렇게 쏘아주어야 옳았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충분히 그런 말을 하고도 남았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하다. 왜 가슴이 뛰는 것이지?
내가 지금 제정신인가? 뜬금없이 날을 새서 그런가?
운양은 혼란스런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양유대력(陽柔大力)을 끌어올렸다.
양유대력은 선조께서 젊을 적 당신의 친구에게 배웠다는 불가의 심법인데,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에 탁월한 효능이 있었다.
하지만 한번 그의 마음을 흔든 격동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본능.
그랬다. 그의 본능이 뭔가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운양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내내 움켜쥔 손 안쪽에 땀이 고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그는 혹시나 목소리가 떨릴까 걱정하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돈만 준다면야……. 정보상인이 돈 받고 정보를 알려주는 거야 당연한 일이잖아?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밀호방(密狐幇)이라 하오. 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어제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공짜로 입을 연 적이 없소.”
“공짜로 도움 받는 것은 나도 싫소.”
“흠, 대가만 확실하다면 뭐……. 그런데, 하려는 일이 뭐요? 그걸 알아야 거래를 하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니겠소?”
제2장 하나만 말해주면 돼
마인걸은 마운방의 총수이며 태원 흑도의 세 거두 중 하나였다.
그는 태원의 명물주루인 선화루의 주인임과 동시에 태원 최대의 암국(暗局 비밀도박장)이 있는 만금도국(萬金賭局)의 실질적인 주인이기도 했다.
독고무령이 그의 이름을 아는 것은, 비옥십팔호실의 죄수 중 하나가 조금 더 살기 위해서 그의 이름과 그에 대한 비밀을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독고무령은 그를 만나 비밀을 담보로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생각이었다. 또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
밤이 되자 독고무령은 운양이 알려준 만금도국으로 향했다.
“마인걸은 밤에 항상 만금도국에 있소. 그를 만나려면 만금도국의 지하 이 층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그곳에서 도박을 하려면 적어도 은자 오백 냥 이상은 있어야 하오.”
물론 그를 만나는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그를 만나려면 오백 냥을 들고 지하 이 층의 도박장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독고무령의 품에는 오백 냥이 넘는 전표가 들어 있었다.
* * *
북문대로의 중간쯤에 난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저만치에서 어슬렁거리는 두 명의 무사가 보였다.
그들은 독고무령을 슬쩍 훑어보고 조소를 지었다.
젊은 놈이 안 되었다는 뜻이 역력한 눈빛.
독고무령은 그들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박장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도 가로세로 육십 자는 되어 보였는데, 운양의 말대로라면 지상에만 이러한 곳이 다섯 개 정도 된다고 했다.
구름처럼 허공을 흐르는 연초연기. 그 아래에서 탁자를 노려보는 수많은 사람들.
방 안 전체가 진득한 긴장과 초조로 물들어 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한탄과 탄성.
“이, 이런 젠장 할!”
“허억! 마, 망했다!”
“오오! 내 이럴 줄 알았지! 으하하하!”
도박장이라는 곳에 처음 들어와 본 독고무령은 생경한 광경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운양에게 대충 말을 듣긴 했지만, 이런 광경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본 그였다.
“도박하러 오셨소?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건넸다. 거친 수염이 입주위에 빼곡한 삼십 대 장한이었다.
“일단 구경 좀 하겠소.”
간단히 대답한 독고무령은 발길을 안쪽으로 옮겼다.
마인걸을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운양이 물었다.
“도박을 할 줄 아시오?”
“해보지 않았소.”
운양은 그 말을 듣고 한숨을 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노름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주사위판에 끼어드시오. 그나마 주사위노름의 규칙이 제일 간단하니까.”
그러고는 몇 가지 주사위노름의 규칙을 알려주었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오. 조금만 머리가 돌아간다면 이 정도 규칙은 금방 외울 수 있을 것이오.”
독고무령은 그에게 두어 가지 노름의 규칙을 외웠다. 그리고 만금도국에서 취할 행동에 대한 것도 배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박을 할 생각은 없었다.
뚜벅, 뚜벅…….
그가 걸어가자 양편에 있던 사람들 중 몇 사람이 흘끔거렸다. 그러나 그뿐. 그를 오래 쳐다보는 자는 없었다.
넓은 도박장의 끝에는 건물 안쪽으로 통하는 회랑이 있었다. 운양의 말로는 그곳을 통해야만 지하 암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독고무령이 그곳으로 다가가자, 회랑을 막고 서 있던 두 장한이 앞을 막았다.
“더는 들어갈 수 없네. 안에서 놀게.”
독고무령은 고개를 모로 꼬고 이상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지하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두 장한 중 뺨에 칼자국이 열십자로 난 자가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누가 출입금지라 했나? 돈 없는 놈은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지.”
“그럼 돈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군.”
“그거야 그렇지. 백 냥 이상만 있다면.”
독고무령은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백 냥짜리 전표를 보여 주었다.
“이 정도면 되나?”
돈바람에 두 장한의 허리가 절로 구부러졌다. 목소리와 말투도 달라졌고.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공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주머니 안에 든 전표는 한 장이 아니었다. 얼핏 본 것만으로도 서너 장은 더 되어 보였다.
수백 냥의 은자를 가진 잘생긴 청년.
장한들 눈에는 독고무령이 돈 날리고 싶어서 환장한 부잣집 도련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회랑 안으로 들어갔다.
마인걸이 정말 그의 비밀을 알고 있을까?
이제 한 걸음 다가갔다.
‘곧 알 수 있겠지.’
지하 일 층으로 향하는 중에 두 번의 검문을 더 거쳤다.
검문이라고 해봐야 별 것 아니었다. 돈만 보여주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독고무령의 표정은 좀 더 신중해졌다.
이중삼중으로 지키고 있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경우, 그만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렇게 검문을 거쳐 지하로 내려가자, 무사 하나가 철문을 열어주었다.
지하 일 층의 넓이도 지상만큼 넓었다.
그러나 그 넓은 곳에 탁자는 열 개밖에 되지 않았다. 대신 화려했다. 그리고 험악한 장한 대신 꽃다운 여인들이 오가며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독고무령이 들어서자, 그 여인들 중 하나가 엉덩이를 흔들며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어떤 놀이를 원하십니까?”
여인은 스물 전후의 나이였는데, 얇은 옷을 입고 있어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어렴풋이 속살이 보였다.
독고무령은 슬쩍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이 층으로 내려갔으면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오?”
여인의 눈이 반짝였다.
지하 이 층은 오백 냥의 은자가 있어야만 내려갈 수 있다. 그 정도의 돈이 있다는 말.
이곳의 누구보다 젊고, 잘생긴데다가, 돈까지!
여인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호호호호, 대단한 공자 분께서 오셨군요. 소녀가 안내해 드릴게요. 이리 따라오세요.”
그녀는 몸을 돌리고 구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엉덩이가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 묘한 색감이 느껴지는 율동이었다.
한쪽에서 노름을 하던 자들 중 하나가 그녀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꿀꺽.
“애화 년이 한껏 물이 올랐군. 흐흐흐흐, 이번 판에서 따기만 하면…….”
“피이, 미안하지만, 오늘은 안 되어요, 정 대인. 애화의 마음이 이미 주인을 정했거든요.”
“썩을 년. 어디 네가 돈 앞에서도 그 말을 하는지 보자. 뭐해? 판 돌려!”
지하 이 층으로 내려가는 조건은 간단했다.
오백 냥의 은자를 만금도국에서 만든 오십 개의 동전과 바꾸기만 하면 되었다.
둥근 동전은 두 치 정도의 크기였는데, 하나가 은자 열 냥과 똑같이 취급되었다. 다시 말해 지하 이 층에서는 노름에 걸 수 있는 최소 단위가 은자 열 냥이라는 말이었다.
독고무령은 오십 개의 동전을 받아서 하나를 애화에게 건네주었다.
운양이 말하길, 이 층으로 내려갈 때 안내하는 여인에게 은자를 주면 좀 더 편하게 내려갈 수 있다고 했다. 열 냥이나 줄 거라고는 운양도 미처 몰랐겠지만,
어쨌든 효과는 확실했다. 너무 확실해서 탈일 정도로.
“어마! 너무 과분하옵니다, 공자님!”
애화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빨리 동전을 낚아챘다.
한두 냥의 은자를 주는 손님은 가끔 있었다.
물론 그것도 공짜는 아니었다. 그들은 하다못해 엉덩이라도 만지고, 손장난이 심한 자는 가슴과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기도 했다.
그녀는 그들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돈을 많이 받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짓을 해도 상관없었다.
이 손님은 자신에게 어떤 것을 원할까?
애화는 온갖 상상을 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갈 때마다 온몸이 달아올랐다.
‘뭘 원해도…… 다 들어줄 거야.’
열 냥의 은자. 애화는 그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오늘의 손님은 지금까지의 누구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그때였다.
“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