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65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65화
65화
독고무령은 손양의 뜬금없는 말에 대답 없이 그만 노려보았다.
손양이 말했다.
“네가 나를 이긴다면, 너를 못 본 것으로 해주마.”
그러한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좋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시작하지요.”
후웅!
단순히 상단에 들린 검을 쭉 뻗었을 뿐인데, 대기가 갈라지며 울음을 토해냈다.
“그놈, 성질 한번 급하군.”
손양은 풀썩 웃음을 지으며 두 손에 공력을 쏟아 넣었다.
순간 그의 두 손이 맑은 홍옥으로 만든 것처럼 붉게 변하며, 바람도 없는데 옷자락이 펄럭였다.
독고무령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손양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검에서 변형된 뇌정십팔검이 줄줄이 쏟아졌다.
손양도 자신의 장기인 단홍수를 휘두르며 독고무령의 검에 맞섰다.
검강이 허공을 난자하고, 웅혼한 장세가 검강의 기운을 정면으로 두들겼다.
쾅! 콰광! 쿠구궁! 우르르릉!
벽력음에 막 밝아오던 대기가 진저리치며 뒤흔들렸다.
땅이 파이고, 바위가 부서지고, 나무들이 맥없이 부러져 가루가 되었다.
순식간에 오 초의 격돌이 이뤄지고 두 사람이 튕기듯이 뒤로 물러났다.
뒤로 일 장가량 물러선 독고무령은 검을 중단으로 뻗었다.
비틀거리며 이 장이나 물러선 손양이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젊은 놈이 강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신이 밀리다니.
미세하긴 하지만 밀린 것은 밀린 거다. 그것도 새파란 놈에게.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평소의 인자함이 그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투기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 때문인지 그러잖아도 붉은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손양은 오래 전에 잠들어버린, 미친 황소라 불렸던 그의 성격을 일깨웠다.
“오냐, 이놈! 어디 한번 해보자!”
손양은 비장의 무공인 혈홍수(血紅手)를 펼칠 작정을 했다.
평생 단홍수만으로도 적수를 찾기 힘들었다. 그가 단홍수라는 별호로 불린 것은 강적을 상대할 때 오직 단홍수만 펼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무공은 단홍수가 아닌 혈홍수였다.
“각오해라, 이놈!”
손양은 보다 더 시뻘게진 손을 앞세우고 독고무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순간, 눈앞이 온통 붉은 장영으로 가득 찼다.
이를 악문 독고무령은 검신에 태천일심법의 기운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만든 일곱 초식의 검 중 하나, 철혼무벽(鐵魂武壁)을 펼쳐서 혈홍수를 막고 뇌정일섬으로 반격을 가했다.
고오오오!
손양의 눈이 한껏 커졌다.
쩌저저적!
핏빛 장영은 벽에 막혀 부서지고, 한 줄기 은밀한 기운이 심장을 후빌 듯이 밀려든다.
손양은 다시 한번 전력을 다해 쌍장을 쳐내고는, 결과를 보지도 않고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크으으…….”
물러서는 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붉던 안색은 하얗게 탈색되고 부릅뜬 눈은 잘게 떨렸다.
독고무령은 그런 손양을 보며 다시 검을 떨쳤다.
그때였다.
“멈춰라, 이놈!”
노성이 고막을 터트릴 듯이 울리고, 두 줄기 기운이 독고무령을 향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손양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자들이다. 개중 한 사람은 오히려 손양보다 강하게 느껴진다.
독고무령은 빙글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뇌정진천세(雷霆振天勢)가 태천일심법의 기운을 싣고 펼쳐졌다.
세 사람의 공세가 부딪치자 천둥벼락이 치는 듯했다.
콰르르릉! 콰과광!
숨이 턱 막힌 독고무령은 몸을 세 바퀴 휘돌리며 삼 장 밖으로 벗어났다.
그때 도를 든 검은 옷의 노인이 훌쩍 몸을 날리며 독고무령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손양보다 강하게 느껴졌던 자. 그가 바로 제왕오로 중 한 사람인 묵혼신도(墨魂神刀) 막위지였다.
독고무령은 침착하게 철혼무벽을 펼쳐 그의 도를 막아냈다.
콰릉!
강맹한 도세와 검세가 부딪치자 또 한 번 벽력음이 일었다.
순간이었다.
독고무령은 그 충격을 이용해 뒤쪽으로 멀찌감치 물러섰다. 그러더니 촌각의 망설임도 없이 반대편으로 신형을 날렸다.
“이놈! 거기 서 봐라! 물어볼 게 있느니라!”
중심을 잡은 막위지가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은 무엇 때문인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결코 독고무령의 무위에 놀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맙소사! 저 얼굴…… 호, 혹시……?’
하지만 독고무령은 막위지가 경악한 원인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일 장 높이의 담장을 그대로 날아 넘었다.
내상 때문인지 위장에서 치밀어 올라온 뭔가가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제왕오로 중 셋을 상대한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그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자신의 위치가 알려졌을 게 분명했다.
담장을 넘은 독고무령은 전력을 다해 신형을 날리며 금원에서 멀어졌다.
제왕성의 영역이 제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끝이 없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계산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이삼백 장, 아무리 멀어도 오백 장 이내에 외성 담장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미처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제왕성의 동북쪽에는 담장이 없다는 것을.
그가 그 사실을 안 것은 금원에서 삼백여 장을 벗어났을 때였다.
전력을 다해 숲을 막 벗어난 순간, 갑자기 앞이 탁 트인 것이다.
‘헛!’
황급히 걸음을 멈춘 독고무령은 눈을 부릅떴다.
산이 뚝 끊기고, 족히 백 장은 됨직한 낭떠러지가 발아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좌우를 둘러봐도 오 리 이상 펼쳐져 있는 거대한 암벽만이 보인다. 그 어느 곳으로도 마땅히 내려갈 만한 곳이 없다.
그가 고민하고 있는데 뒤에서 호각소리가 울렸다.
삑, 삐이이이익!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두세 번 울리는 사이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듯했다.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본 독고무령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 걸음을 막은 곳이 오히려 탈출구가 될지도 모르겠군.’
속이 울렁거렸다. 뭔가가 목구멍을 격렬하게 뚫고 올라왔다.
“우웩!”
독고무령은 바위의 갈라진 틈바구니에 한 움큼의 선혈을 토해냈다. 피를 토하자 목구멍과 뱃속이 시원해졌다.
당분간은 몸을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입가의 피를 쓰윽 소매로 닦은 독고무령은 낭떠러지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그때 막위지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메아리치며 들려왔다.
“잠깐만 멈춰라! 내 너에게 물어볼 게 있느니라!”
메아리치는 소리가 끝날 즈음에는 오십여 장의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독고무령은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날렸다.
‘제왕오로! 묻는 것은 나중에 내가 그대들에게 할 것이다! 반드시!’
* * *
위지천백의 묵직한 저음이 천검전을 뒤흔들었다.
“잡을 수 있겠느냐?”
서늘한 날씨인데도 공노명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수하들이 일대를 뒤지고 있습니다만, 아직 놈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듯합니다.”
“누군지 정체는 밝혀졌는가?”
“나이가 이십 대라는 것뿐, 아직 확실한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위지천백은 공노명을 직시한 채 계속 물었다.
“놈의 목적이 뭐라 보는가?”
“남 당주를 살해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게 다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공노명은 침착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놈은 경비가 허술한 이른 새벽을 틈타 침입했습니다. 그리고 남 당주의 방에 들어가 남 당주를 살해했습니다. 문제는 남 당주가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낸 시각과 놈이 나온 시각의 차이가 일각 정도 된다는 것입니다.”
공노명의 대답에 위지천백의 눈빛이 자홍색으로 회오리쳤다.
“일각이라…… 그들이 일각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고 보나?”
“일각은 아니어도 반각은 나누었을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다고 보나?”
“확실한 내용은 오직 놈과 남 당주만이 알 것입니다. 다만…… 속하의 생각으로는, 남 당주가 적어도 진정한 기밀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위지천백의 회오리치던 자홍색 눈빛이 빠르게 고요를 찾아갔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격노가 조금 가라앉은 듯하다.
공노명은 안도하면서 보다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 당주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기밀에 대해서 입을 열 사람이 아닙니다. 속하가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 당주의 심맥이 모두 끊겨 있었습니다. 그로 봐서, 남 당주는 평범한 것만 말해주던 중 놈이 기밀사항을 요구하자 스스로 심맥을 끊은 것으로 보입니다.”
“흠…….”
위지천백의 눈에서 자홍색 눈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놈이 금원에 뛰어들었다고 했지?”
“예, 성주. 그곳의 세 늙은이에게 당해서 상당한 부상을 입고 도망친 것 같습니다. 수하들이 병검애의 바위 사이에서 상당한 핏물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훗, 그들도 이제 늙긴 늙었군. 부상 입은 어린놈 하나 잡지 못해 놓치다니.”
공노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잠히 기다렸다.
곧 위지천백의 말이 이어졌다.
“놈이 비화당에 숨어들도록 방치한 책임자를 처벌하도록 하라.”
“예, 성주.”
“아무리 잠을 자다 기습당해 제압당했지만, 남조경의 죄 또한 작지 않다. 그러나 입을 열지 않고 죽음을 택한 충정은 높이 사줘야 할 것이다. 그의 가족에게 금 백 냥을 내리고 나의 이름으로 애도를 표하라.”
“감읍할 것이옵니다, 성주!”
공노명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위지천백은 의자 손잡이를 쓸어 만지며 공노명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내 생각을 알고 있을 거라 보느냐?”
공노명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그들’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는 곧 떨림을 가라앉히고 나직이 대답했다.
“성주님의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넷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의 입이 닫혔으니, 이제 셋만 남았지요. 만일 새어나갈 것 같으면…… 속하 역시 남 당주와 같은 길을 택할 것입니다.”
“잊지 마라. 한순간의 방심이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는 걸.”
“명심하고 있사옵니다.”
“가서 무천련의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해라.”
시뻘건 불길을 뿜어내며 떠오른 태양빛이 천검전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공노명이 나간 후로도 위지천백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공노명이 나간 지 반시진이 지나서였다.
‘나는 군림할 것이다. 누구도…… 그 누구도 나의 위에 놓지 않을 것이다!’
천검전으로 쏟아져 들어온 태양빛이 그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노태군, 그대도 나의 야망을 꺾을 순 없을 것이다!’
제5장 그렇게는 죽어도 못 합니다
황금빛 태양이 품안으로 파고든다.
텅 빈 그릇에 맑디맑은 빛이 고요히 고이는 것만 같다.
그 시간은 찰나처럼 짧운 것 같기도 했고, 억겁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느낌의 주인은 시간의 흐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찰나냐, 억겁이냐가 아니었다. 텅 빈 그릇에 빛이 얼마만큼이나 고일 것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도 잊고, 소소한 것도 잊고, 그저 묵묵히 관조할 뿐이었다.
어느 순간, 고요하던 빛이 텅 빈 그릇 안에서 천천히 휘돌았다.
고오오오오…….
그의 몸속에서, 머릿속에서 울림이 이는 듯했다.
빛의 공명.
그것은 참으로 신비하고도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빛이 하나의 영상을 투영해서 무저갱 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기억을 되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