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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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59화
59화
비밀통로는 제법 길었다. 불도 없어 오직 어둠만이 존재했다.
독고무령은 어둠뿐인 통로를 걸어 깊숙이 들어갔다. 어둠은 완벽했지만, 결코 그의 눈을 가리지는 못했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침묵을 흔들며 비밀통로를 울렸다.
“유유, 안에 있으면 대답해라!”
목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비밀통로는 사오 장마다 방향을 꺾게끔 되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자신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목소리가 통로 벽에 부딪치며 울리는 바람에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독고무령은 통로를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
그동안 두어 번 더 불러보았다. 대답은 여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십 장의 거리를 걸어서 여섯 번째 꺾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땅에 떨어진 횃대가 보였다. 불은 꺼져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다시 십여 걸음, 언뜻 독고무령의 두 눈에서 이채가 반짝였다.
그때였다. 움푹 들어간 벽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바로 그 시각.
드르르륵.
비밀통로의 끝에 있는 출구가 조심스럽게 열렸다.
느닷없이 출구가 열리자 소설향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출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횃불에 비친 낯익은 얼굴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쉿, 조용히 하십시오. 놈들이 올지 모르니까.”
소설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통로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밖에서 다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나오십시오. 제가 유유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소설향은 잠깐 망설였지만, 자신보다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남편과 의형제처럼 지내는데다, 항상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소설향은 몸을 숙이고 문밖으로 나갔다.
순간, 퍽, 소리와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왜……?’
벽에서 튀어나온 자는 검을 휘둘러서 어둠을 갈랐다.
“죽어! 죽어!”
휙휙휙휙!
거의 무차별적인 휘두름이었다. 어둠속에 서 있는 독고무령을 볼 수 없으니 직감만으로 휘두르는 듯했다.
비록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것이지만, 전력을 다한 검세는 제법 날카로웠다. 어지간한 고수들조차 그녀가 있음을 몰랐다면 당했을지 모를 정도였다.
독고무령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쉭! 쉭! 쉭!
미친 듯이 휘둘러지던 검이 코앞에 다가온 순간, 독고무령은 손을 뻗어서 검을 잡고 당겼다.
“나다, 유유.”
순간적으로 여인, 장유유의 몸이 중심을 잃었다. 그 바람에 장유유의 몸이 독고무령의 품안으로 넘어졌다.
독고무령은 다른 팔로 장유유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벙어리오빠다, 유유.”
가슴을 치고 빠져나가려던 장유유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버, 벙어리…… 오빠?”
“소천이와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장유유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목이 턱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흑!”
그녀는 외마디 울음소리를 터트리며 독고무령을 끌어안았다.
완연한 여인의 동체가 품안에 안기자 독고무령도 잠시 말을 못했다.
갑자기 장유유가 울음을 터트렸다.
“엉, 엉, 엉! 오빠!”
참을 수 없는 공포에 이은 독고무령의 등장에 장유유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떨며 조금 전까지 느꼈던 공포심을 울음과 함께 털어냈다.
“비명이 들리고는 벽이 무너졌어. 엉, 엉, 엉, 놈들이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웠어, 오빠. 엄마하고 무조건 안으로 도망치는데, 아버지가 걱정되어서 미칠 것 같았어. 흑흑흑…….”
독고무령은 덜덜 떨리는 그녀의 몸을 깊숙이 안아주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 옛날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이제 다 괜찮다. 이제…….”
장유유의 떨림이 조금씩 약해졌다.
독고무령이 다시 물었다.
“소천이와 어머니는 더 안쪽에 계셔?”
그제야 장유유가 살짝 몸을 빼내며 대답했다.
“소천 오빠는 사문에 가서 오지 않은 지 오래되었어. 그리고 엄마는 먼저 가시라고 했어. 아마 출구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야.”
장소천은 장가장을 떠나 다른 곳에서 무공을 배우는 듯했다.
하긴 강해지고자 하는 그로선 당연한 선택일지도 몰랐다.
“잠깐만 기다려라. 저 뒤에 횃대가 하나 있던데, 불을 붙여주마.”
독고무령은 뒤쪽에 떨어져 있는 횃대를 주워왔다. 그리고 삼매진화로 불을 피웠다.
장유유의 얼굴이 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났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구양소현에 못지않았다. 오히려 구양소현에게 없는 부드러움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했다.
‘그 말괄량이가 이렇게 변하다니…….’
하지만 장유유의 마음은 더했다.
그녀는 독고무령의 모습이 불빛 아래 드러나자, 조금 전 자신이 독고무령의 품에서 울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얼굴이 모란꽃처럼 붉어졌다.
“가, 가자, 유유야.”
“어? 응…….”
비밀통로는 다섯 번을 더 꺾어진 후에야 끝이 났다.
그런데 이상했다.
소설향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이곳에 계시라고 했는데?”
장유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독고무령은 횃불을 들고 출구의 문을 살펴보았다. 수북이 쌓인 먼지가 밀린 자국이 보였다.
“이곳을 사용한 적이 자주 있었어?”
“아니, 아마 마지막으로 들어온 게 오 년도 넘었을 걸? 어릴 때 오빠와 놀 때 말고는 들어온 적이 없어.”
독고무령은 침중한 표정으로 출구의 문을 밀었다. 한 뼘 두께의 석문이 열리며 바람이 밀려들었다.
비밀통로의 밖은 허름한 창고였는데, 밀려드는 바람에 쇠 냄새가 났다.
‘철방 근처군.’
주위에서 사람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독고무령은 창고의 바닥을 살펴보았다. 발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었는데, 여인의 발자국이라 하기에는 너무 컸다.
‘남자의 발자국?’
그때 언뜻 이질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먼지가 가득한 한곳이 뭔가에 쓸린 것처럼 보인 것이다.
먼지가 쓸린 방향은 창고의 문 쪽.
독고무령은 창고의 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저만치 철방의 모습이 보였다. 생각대로였다.
창고 밖으로 나간 그는 흔적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알아보았다. 창고 안에서 묻은 것으로 보이는 먼지가 북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저쪽에 뭐가 있지?”
장유유가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포목창고가 있어. 근데 어떻게 된 거지, 오빠? 왜 엄마가 혼자 나간 거지?”
“내가 어머니를 찾아올 테니까, 유유는 돌아가 있어. 장주님이 걱정하고 계실 거다.”
“오빠…….”
“장주님이 많이 다치셨다. 가서 돌봐드려야지.”
장유유의 그렇잖아도 큰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지가?”
“그래, 그러니 빨리 가봐. 어머니 걱정은 말고.”
장유유는 망설였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오빠, 정말 엄마는 괜찮겠지?”
“그럴 거야. 갔다 오마.”
독고무령은 장원 안쪽을 슬쩍 돌아다보았다.
안에선 더 이상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침입자는 더 이상 없는 듯했다.
그는 묵직한 마음을 억누르고 흔적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쓰러진 사람을 끌고 간 흔적이었어. 자의로 걸어 나가지 않았다는 말.’
그는 더 이상 흔적을 찾지 않았다. 창고에서 멀어지면 흔적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게다가 장원 안에서 혈겁이 일어난 마당이다. 소설향을 데리고 간 자가 있다면, 일부러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가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마음이 급했을 테니까.
일단 소설향이 죽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죽일 것이라면 끌고 나갈 이유가 없었다.
장유유에게 걱정 말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 * *
“오오오오, 설향…….”
중년인은 떨리는 손으로 여인의 몸을 쓰다듬었다.
정신을 잃었는지 소설향은 그의 손이 온몸을 누비는데도 꿈쩍 하지 않았다.
“내가 왜 이 빌어먹을 곳에 붙어 있었는지 알아? 바로 당신 때문이지.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니까. 흐흐흐흐…….”
그저 그럴 생각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가까이서 보며 남은 생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 거라 여겼다. 끓어오르는 욕망의 찌꺼기야 기루의 여인에게 배설하면 될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게 십오 년을 살아왔다. 그동안 누구도 자신이 무슨 목적으로 장가장에 빌붙어 사는지 알지 못했다.
가끔 소설향이 직접 차를 내주면 남들보다 배는 더 마셨다. 소설향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보고 차를 무척 좋아하는가 보다 했다.
그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도록 어디를 가도 차를 많이 마셨다.
그러면서 소설향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덕분에 그는 장가장의 포목점 책임자가 되고, 장이생이 가장 믿는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설향은 여전히 남의 여인일 뿐이었다.
그녀가 장이생의 몸에 깔린 것을 상상할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든 날은 단골기루를 찾아가 미친 듯이 여인을 탐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장이생에 대한 미움이 커져만 갔다. 장이생이 어서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며칠 전 한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손님은 칠 년 전쯤의 일을 물어보며 죽음과 삶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대신 제대로 답해주면 뭐든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다고도 했다.
그는 즉시 기회가 왔음을 알았다. 장이생을 파멸로 빠뜨릴 기회가. 소설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기회가.
그는 그날의 일을 모두 말해주었다. 마차에 한 소년이 실려 온 것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그리고 일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오늘이 오기만을.
그는 고대하던 일이 벌어지자, 오래 전에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고 우연히 알게 된 비밀통로의 출구로 갔다.
처음에는 그곳에서 그녀들이 나오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안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출구를 열고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그녀가 있었다. 소설향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그리고 반각.
그토록 고대하던 여인이 자신의 손아래에 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설향의 웃옷을 벗겼다.
“여전히 아름다워. 당신이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상상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알아?”
소설향의 웃옷이 벗겨지며 어깨의 맨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벌게진 눈으로 소설향의 몸을 바라보며 치마마저 끌어내렸다.
“우흐흐흐흐…….”
소설향의 뽀얀 속살이 그의 눈에 가득 찼다.
마흔 중반의 나이답지 않게 탄력 있는 피부가 우윳빛으로 반짝인다.
그는 더 참지 못하고 훌훌 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다급히 그녀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얹었다.
그때 방 안으로 바람이 밀려들었다.
섬뜩한 기분이 든 그는 홱 고개를 돌렸다.
순간 발바닥 하나가 그의 얼굴을 덮었다.
퍽!
“끄억!”
독고무령은 중년인의 얼굴을 후려차고는, 다시 한번 발을 휘둘러 복부를 강하게 찼다.
퍼억!
“쿠엑!”
중년인은 일 장을 날아가서 벽에 부딪친 후 바닥에 떨어졌다.
독고무령은 그 어느 때보다 살기어린 표정으로 중년인을 향해 다가갔다.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온몸의 뼈를 마디마디 부러뜨려 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