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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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54화
54화
물론 그러기 위해선 죽음이 필연이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망설이지 않았다.
설령 살아난다 해도 입을 열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를 일.
일단 입을 여는 것이 먼저다. 왜 백마방의 무사가 이곳에서 죽어가는 지, 그걸 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품에 손을 넣은 독고무령은 작은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은 은통을 꺼내고는, 은통 안에 든 서른여섯 개의 금침 중 다섯 치 길이의 침을 하나 집어 들었다.
사람들은 뒤에 선 채 독고무령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살 수 있을까?”
구양소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독고무령의 손에 들린 침이 부상자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순간 심장에서 실처럼 가느다란 핏줄기가 솟구쳤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헛!”
“저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독고무령은 손바닥으로 부상자의 가슴을 세게 내려쳤다.
곧 부상자가 한 움큼의 피를 토해냈다.
“커억!”
동시에 몸을 가늘게 떨며 눈을 떴다.
독고무령은 파르르 떨리는 부상자의 눈을 보며 강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는 무천련의 순찰무사들이오.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부상자는 피로 범벅된 입을 열어 몇 마디를 쥐어짰다.
“나는…… 백마방의…… 전초대…… 제왕성…… 습격…….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알려…….”
입을 통해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바람에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퍽!
독고무령은 부상자의 가슴을 다시 한번 후려쳤다.
금방 죽을 것 같던 부상자의 눈이 다시 커졌다.
“어디에서 당한 것이오? 여기서 얼마나 되오?”
“이, 이, 이삼십…… 리 정도…… 커억…….”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부상자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머리를 떨어뜨렸다.
방향은 굳이 물을 것도 없었다. 백마방은 북쪽에 있으니까.
“상황을 적어서 전서구를 띄워!”
독고무령이 소리치며 부상자를 가만히 내려놓고 눈을 감겨 주었다.
그 사이 전서구를 가지고 있던 구양소현은 정신없이 품에서 종이와 붓을 꺼내 먹물통에 담갔다.
곧 전서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갑시다.”
독고무령은 전서구가 동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말에 올라탔다.
사람들은 입을 꾹 닫은 채 말에 올랐다.
그때 구양소현이 악을 쓰듯이 외쳤다.
“저 사람, 묻어줘야 할 것 아니에요!”
“그 시간에 몇 사람이 죽을지 모른다. 정 묻어주고 싶으면 그대가 남아서 묻어줘라.”
구양소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독고무령의 말이 옳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같은 편을 그대로 방치한 채 떠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독고무령을 노려보며 툭 던지듯 물었다.
“혹시 살릴 수 있는데도 죽게 만든 것 아니에요, 조장?”
독고무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제야 사람들은 구양소현의 말이 사실임을 직감하고는, 독고무령의 냉정한 판단에 몸을 떨었다.
살리느라 시간을 보내느냐, 아니면 죽음 대신 바로 정보를 얻느냐.
과연 자신들이라면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 * *
이십여 리를 달리자 처참한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분지에 오십여 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독고무령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움직이거나 신음을 흘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반 시진 정도 된 것 같군.”
독고무령은 몇몇 시신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백마방 전초대원들의 죽은 시간을 추측해냈다.
석도명이 그 말을 듣더니 잔뜩 굳은 표정으로 북쪽을 바라보았다.
“전초대를 쳤다면 다음에는 주력을 노릴지도 모르겠군.”
“늦지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아마 본대를 치려한다면 완벽한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네. 바로 칠 거라면 굳이 전초대를 칠 것도 없이 곧바로 주력을 쳤을 테니까.”
석도명은 몇 년 간 철마방의 생존자를 이끌고 팔기보에 대항하며 나름대로 세력 간의 싸움에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독고무령도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제왕성이 무천련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다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 생각을 하자 문득 또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어쩌면 다른 곳도 습격을 받았을지 모르겠군요.”
모두가 해연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곳도……?”
석도명이 바라보자 독고무령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처음부터 계획된 일일 겁니다. 서연을 쳤을 때부터……. 일단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 보지요.”
이번에는 누구도 시신을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무려 오십에 이르는 시신의 숫자도 숫자이지만, 만일 백마방이 습격을 받고 있다면 한시가 급했다.
다시 오십 리를 달리자 갈림길이 나왔다.
동쪽으로는 정양으로 가는 길이고 서쪽으로는 흔주로 가는 길이었다.
백마방의 무사들이 보인 것은 그로부터 오 리를 더 간 후 작은 강을 하나 건넜을 때였다.
모두 백여 명, 다행히 그들은 공격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독고무령 일행이 말을 타고 다가가자 백마방의 무사들 중 십여 명이 앞으로 나왔다.
그들 중 하나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대들은 누군데 우리의 앞을 막는 건가?”
석도명이 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우리는 철검보의 무사들로 일원궁 서연 분타에서 순찰을 나왔소. 어느 분이 그대들을 이끌고 있소?”
일원궁 서연 분타에서 나온 순찰이라는 말에 백마방 무사들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곧 말을 타고 있던 두 사람이 호위를 받으며 앞으로 나왔다.
한 사람은 오만해 보이는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두 사람 중 청년이 먼저 오만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서문도라 한다. 그리고 이분은 전마당주이신 요 당주시다. 무슨 일인가?”
석도명은 두 사람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서문도는 서문태강의 둘째아들로 산서십영(山西十英) 중 하나로 불리는 청년고수였다. 그리고 요극한은 백마방의 주 세력인 팔당의 주인 중 전마당주로, 철검보로 따지면 철검오대의 주인과 같은 위치였다.
“철풍검대 팔조장 석도명이라 합니다.”
석도명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오면서 목격한 상황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서문도와 요극한이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야! 전초대가 전멸했다고?”
“그게 사실인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해서 놈들이 주력을 공격했을까봐 급히 달려온 것입니다.”
백마방의 무사들이 술렁거렸다. 사실이라면 언제 제왕성의 공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 아닌가.
서문도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습격당한 곳이 어딘가?”
“그리 멀지 않소.”
“안내하게.”
석도명은 잠시 말을 멈추고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독고무령이 서문도와 요극한을 향해 물었다.
“나머지 주력은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요극한이 대답했다.
“백 리 정도 될 거네.”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
‘이들이 온 길을 돌아가려할지 모르겠군.’
독고무령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 요극한이 그의 생각을 눈치 채고 조소를 머금었다.
“그곳은 걱정할 것 없네. 방주님과 본방의 고수들이 모두 모여 있으니까. 제왕성 놈들이 아무리 간덩이가 부었어도 그곳을 칠 수는 없을 게야.”
‘과연 그럴까?’
그럴지도 모른다. 백마방의 주력을 치려면 제왕성도 상당한 전력을 동원해야만 할 테니까.
더구나 이곳에서 북쪽으로 백 리를 더 올라가 백마방을 치는 것은 제왕성에게도 모험이었다. 자칫 백마방과 일원궁의 합공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그때 서문도가 석도명을 재촉했다.
“뭐하느냐! 빨리 앞장서라!”
당장 가서 도움이 될지 어떨지도 알 수가 없는 상황. 더구나 이들은 습격당한 곳으로 가기를 더 원하고 있는 판이다.
독고무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석도명이 그 모습을 보고 말머리를 돌렸다.
“따라오시지요.”
* * *
습격 현장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저 수십 마리의 까마귀들과 독수리들이 시신 위에 내려앉아 있다는 것. 조금은 열기가 남아 있던 시신도 싸늘하게 변했다는 것. 흐르던 피가 멈추고 엉겨 붙어 있다는 것 정도가 변화의 전부였다.
“저리가라! 훠이!”
“이놈의 까마귀 새끼들이!”
백마방의 무사들은 손을 저어 새들을 쫓았다.
새들은 몇 번 자리를 옮겨 다니며 먹이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 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두 도착하자 먹이를 포기하고 멀찌감치 날아갔다.
하지만 완전히 떠나지는 않고 나무와 바위 위에 앉아 인간들을 구경했다.
반 시진, 시신 정리가 대충 끝났는지 서문도가 독고무령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번들거리는 눈에서 독기를 품어내며 석도명을 바라보았다. 석도명을 순찰조의 수장이라 생각한 듯했다.
“일단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군.”
감정이 격해졌는지 한마디 한마디가 이에 갈려 나온다.
그러나 그다지 고마움이 느껴지지 않는 형식적인 인사다.
석도명은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순찰조의 당연한 임무일 뿐이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네.”
“말씀해 보시오.”
“어떻게 이들을 발견했나?”
“이곳에서 이십 리쯤 떨어진 곳을 지나던 중 부상자를 발견했소. 그에게서 이곳의 일을 듣고 달려온 것이오.”
“이십 리라면 금방 달려왔겠군. 한데… 자네들은 싸우지 않았는가?”
싸우는데 너희들은 구경만 한 것 아니냐? 그런 말투다.
석도명은 은근히 짜증이 났지만 표를 내지 않고 대답했다.
“말했다시피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싸움이 끝난 후였소.”
서문도는 석도명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말, 사실이겠지?”
계속되는 서문도의 추궁에 석도명의 목소리가 조금 차갑게 흘러나왔다.
“귀하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소.”
“그래? 좋아, 일단 그대 말을 믿지. 그런데 말이야, 몇 사람은 아직 피가 굳지 않았더군. 다시 말해서 조금 전까지 살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지. 혹시 그대들이 왔을 때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나?”
석도명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움직이는 자가 보이지 않았소. 게다가 숫자가 오십 명에 이르다 보니 그들의 상태를 일일이 살필 시간도 없었고…….”
서문도가 말꼬리를 잡고 석도명을 더욱 강하게 추궁했다.
“시간이 없었다? 그럼 살아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지도 않았단 말인가? 대체 왜 그리 서둘러 이곳을 떠난 건가?”
석도명의 이마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뭐, 이런 빌어먹을 놈이 있지? 지금 그걸 따져서 뭘 하자는 것이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감정이 격해진 서문도를 자극해봐야 좋을 게 뭐 있을까 싶었다.
그는 숨을 한번 몰아쉬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목소리가 차가와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제왕성이 주력을 칠지 모른다 생각했소. 해서 지체하지 않고 달려간 것이오.”
“흥! 우리가 습격을 받을까봐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놔두었단 말이지? 무리가 막을 수 없는 적을 자네들이 합류하면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어느 정도 도움은 되었을 것이오.”
“훗, 자네들이? 글쎄, 내가 봐서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웠을 것 같은데?”
서문도의 입가에 비웃임이 진하게 떠올랐다.
“싸움에 끼어들어서 죽는 것보다는 이곳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더 나았을 걸? 안 그런가? 그랬으면 몇 사람은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오십여 명에 달하는 수하들의 죽음을 봤으니 감정이 격해진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엉뚱하게 자신들을 추궁하는 것은 참기 힘들었다.
석도명은 입을 닫았다. 입을 열면 욕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때마침 독고무령이 나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