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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53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1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53화

 

53화

 

 

 

 

 

 

제1장 나는 군자(君子)가 되느니 사신(死神)이 될 것이다

 

 

 

 

 

장이생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제산요? 무슨 말씀이신지?”

 

소엽의 뱀눈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속일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는 듯.

 

“기억을 더듬어보시지요. 칠 년 전, 관제산 인근에서 사람을 구한 적이 없었습니까? 열대여섯 살 정도의 소년이었는데 말입니다.”

 

장이생은 소엽의 말이 누구를 뜻하는지 그제야 눈치 챘다. 

 

그의 머릿속에서 독고무령이 남긴 말이 울렸다.

 

 

 

-혹시라도 나중에 누가 묻거든, 말없이 몰래 떠났다고 하십시오.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맙소사! 그럼, 무령이의 그 말이 오늘을 생각해서 한 말……?’

 

경악한 그는 안간힘을 다해 표정을 수습하고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년이라…….”

 

“마차에 싣고 고교의 객잔에 들르셨지요? 그 후 태원에서 하루를 더 묵었고 말입니다.”

 

자신의 행로를 꿰고 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왔다는 말.

 

장이생은 모르쇠로 일관하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그 일 말씀이오? 이제 생각났소이다.”

 

갈의장한, 소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왜 제왕성에서 그 일을 묻는 것이오?”

 

“그에 대해선 알 필요 없습니다. 장주께선 그저 제 질문에 대답만 해주시면 됩니다.”

 

장이생이 눈살을 찌푸리며 장황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너무 불공평한 것이 아니오? 이유를 알아야 자세히 대답해 드릴 것이 아니겠소?”

 

“알면 위험할지 모르는데, 그래도 듣겠습니까?”

 

장이생은 짐짓 움찔한 표정을 지으며 과장되게 머뭇거리는 태도를 취했다.

 

“험, 뭐 그렇다면야…… 그래, 뭘 또 물어보려는 거요?”

 

“그 아이, 평소 알던 아이였습니까?”

 

“아니오. 그냥 지나가다가 불쌍해 보여서 구해준 것뿐이오.”

 

“이름은 아십니까?”

 

“이름? 가만…… 그때 뭐라 했더라? 워낙 오래되어서…… 성이 무씨라고 했던 것 같은데…….”

 

소악귀의 성은 ‘독고’다. 성을 ‘무’로 말했다면 가명을 말했다는 말. 그렇다면 더 들을 것도 없다.

 

소엽은 장이생이 끙끙거리며 시간을 끌자 질문을 돌렸다.

 

“그 아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장이생이 화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오.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렸으니까.”

 

그러고는 당장 눈앞에 있으면 때려죽일 것처럼 말했다.

 

“그놈 아주 배은망덕한 놈이오. 어떻게 일꾼으로라도 써보려고 했더니 그냥 떠나버렸지 뭐요? 에잉! 재우고 먹인 게 얼만데…….”

 

장이생은 뒤에 서 있던 초비경이 얼굴을 씰룩일 정도로 실감나게 연기했다.

 

소엽은 장이생의 표정에서 별다른 것을 찾지 못하자 다시 물었다.

 

“혹시 그 아이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말? 그놈은 아파서 그런지 말을 거의 하지 않았소. 오죽했으면 내 딸애가 벙어리라고 놀렸겠소?”

 

초비경이 한마디 거들었다.

 

“저도 그놈에게 호신술이라도 가르쳐볼까 했는데, 벙어리 같은데다 몸이 워낙 약해서 아예 포기했지요.”

 

소엽은 독사 같은 눈으로 장이생을 응시했다.

 

이미 장가장의 사람 중 하나를 통해서 마차에 타고 있던 소년이 소악귀라는 것에 반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때 자신에게 말해준 자는, 자신이 장가장의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묻지도 않은 말까지 해주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가 장이생을 찾아온 것은 그걸 직접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 바보 같은 놈이 제대로 알고 있기만 했어도 번거롭게 장이생을 만날 이유가 없거늘…….’

 

그렇게 생각한 그는 장이생에게 다시 물었다.

 

“그 아이는 몸이 완전히 나았습니까?”

 

“외상이야 대충 나았는데, 워낙 속이 다 상해서……. 의원 말로는 폐에 물이 차서 오래 살기는 틀렸다고 했는데. 쯔쯔쯔, 길가다 죽지나 않았는지…….”

 

한 번 거짓말을 하니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꾸며낸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장이생은 진실보다 더 진실답게 거짓말을 하고 혀까지 찼다.

 

‘훗, 그런 놈이 철방에서 쇠를 다루었단 말이지?’

 

소엽은 속으로 코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고 머리를 굴렸다.

 

‘음, 그놈이 소악귀인 것은 분명한데, 이자와 어느 정도의 관계인지 알 수가 없군.’

 

자신이 먼저 만나본 자는 장이생의 자식들과 소악귀가 제법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장이생도 잘 대해주었고.

 

그런데 장이생은 그게 아닌 듯이 말한다.

 

그는 제왕성의 이름을 내세워 장이생을 다시 한번 압박했다.

 

“이 일은 본성의 중요한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절대 속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묻지요. 그 아이가 정말 장주께 어떤 물건이나 책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습니까?”

 

장이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모로 꼬았다.

 

“물건? 책?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려.”

 

소엽은 장이생의 눈빛, 입술의 떨림, 낯빛, 몸동작까지 유심히 관찰했다.

 

최소한 그에 대해선 조금도 거짓이 보이지 않았다.

 

천자무서나 비옥에 대한 것만큼은 입을 다문 게 분명한 듯했다.

 

하긴 그 소악귀가 어떤 놈인데 그걸 아무에게나 떠벌리고 다닐까.

 

소엽은 담담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눈에 선했다.

 

자신이 확인한 것만으로도 남조경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십 년을 옆에서 지켜본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당주께선 흔적이 완벽히 지워지길 원하시지.’

 

흔적을 지운 후 암암리에 놈의 뒤를 쫓게 할 것이다. 세상 끝까지. 그게 그가 아는 남조경이었다.

 

소엽은 비릿한 조소를 베어 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성심껏 대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 몰라서 말씀드립니다만, 오늘 저와 나눈 이야기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십시오. 장가장의 평화를 위해서 말입니다.”

 

협박이었다. 말이 새어나가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

 

장이생은 화도 나지 않았다. 아니, 화가 나기는커녕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걱정 마시오. 장모의 입이 무거운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말이오.”

 

“그럼 믿고 가겠습니다.”

 

“잘 가시오. 멀리 나가지 않겠소.”

 

그 말과 동시에 소엽은 몸을 돌리고 만상전을 나갔다.

 

장이생은 소엽이 나간 후로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뒤늦게 가슴이 쿵쾅거려서 이를 악물고 진정시켜야만 했다.

 

한참 만에 그의 입이 열렸다.

 

“비경.”

 

“예, 장주.”

 

“저자가 내 말을 다 믿었을까?”

 

“저마저 믿고 싶을 만큼 장주님의 말씀은 완벽했습니다.”

 

“그런가? 훗, 이거 내가 거짓말에 재주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

 

장이생은 헛웃음을 흘리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작게 새어나왔다.

 

“보고 싶군, 참 멋진 놈이었는데.”

 

 

 

* * *

 

 

 

팔조장인 석도명과 구조장인 독고무령이 순찰조를 이끌기로 했다.

 

순찰 나갈 사람은 모두 열여섯 명.

 

일반적인 순찰조의 인원으로는 많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제왕성 무사들과 부딪칠지 모르는 상황. 일원궁 역시 스무 명씩 순찰을 나가는 마당이니, 그리 생각하면 많은 인원도 아니었다.

 

붉은 태양이 동쪽 산 위로 치솟을 무렵.

 

일원궁의 서연 분타인 대풍장 정문이 활짝 열리고 열여섯 필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두두두두두…….

 

철풍검대의 대원들은 햇살을 등에 지고 서쪽으로 달렸다.

 

오랜만에 추위가 물러나고 따뜻한 햇살이 쏟아진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걸친 가죽옷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말을 타고 달리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와하하! 대주도 제법이란 말이야. 순찰임무를 맡을 생각을 하다니! 안 그래, 무령?”

 

진사혁마저 석 냥을 빼앗긴 불만을 모두 털어내고 구양손을 추켜세웠다.

 

그러나 독고무령은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말을 모는 일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볍게 말과 하나가 되어서…….’

 

 

 

삼십여 리를 달리자 말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준다.

 

대지를 박차고 달리는 말의 근육 하나하나가 자신의 움직임처럼 느껴진다.

 

거칠어진 숨소리를 따라 울리는 박동소리가 자신의 심장에서 울리는 것만 같다.

 

마음이 편안하다.

 

가슴은 찢기고 터져 수많은 상처로 얼룩져 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러한 상처조차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이다.

 

독고무령은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는 매를 따라 끝없이 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았다.

 

십 리 정도를 더 달린 독고무령은 속도를 늦추고 말목을 쓰다듬었다.

 

그때 진사혁이 다가오며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여어! 이제 제법 익숙해졌는데?”

 

구양소현도 지지 않고 한마디 했다.

 

“내가 잘 가르친 덕분이지, 뭐.”

 

“하, 하. 누님 말씀이 맞습니다.”

 

독고무령은 피식 웃으며 완만한 언덕으로 말을 몰았다. 언덕 위에 오르자 시원한 바람이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말을 멈춰 세운 독고무령은 산과 산 사이로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았다.

 

땅이 젖은 때문인지 먼지가 일지 않아 수십 리 밖까지 보였다.

 

그때였다. 말 한 마리가 북쪽으로 길게 늘어진 산 아래 숲속에서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거리는 사오백 장 정도.

 

“응?”

 

독고무령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바라보다 표정이 굳어졌다. 자세히 보니 말 아래쪽에 사람이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자는 단순히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의 안장을 붙잡은 채 안간힘을 다해서 매달려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 광경을 보고 소리쳤다.

 

“어? 부상자 같은데?”

 

“가봅시다.”

 

독고무령은 말을 몰아 언덕을 내려갔다.

 

나머지 일행도 즉시 말을 몰아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랴!”

 

“하아!”

 

두두두두두…….

 

 

 

제일 먼저 말 가까이 다가간 유원위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소리쳤다.

 

“엇? 백마방 사람 같은데?”

 

백마방은 무천련의 오대세력 중 하나. 그곳의 무사가 이곳에서 왜 부상을 입은 채 발견된단 말인가.

 

석도명이 다급히 말에서 내려 부상자를 살펴보았다.

 

부상자는 정신을 잃은 듯 축 처져 있었는데, 그의 옷깃에 작은 말문양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백마방의 무사가 맞는 것 같네.”

 

“일단 상태를 보지요.”

 

독고무령의 말에 석도명이 일단 말에 매달린 그를 떼어냈다.

 

부상자가 말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은 등자에 발이 끼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 상태로 매달려 있다 보니 정강이 부위는 뼈가 보일 정도로 살이 깎여나간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고무령은 부상자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고 갑자기 옷을 쫙 찢었다.

 

숨이 붙어 있다는 것. 그렇다면 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또한 원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뜻과도 같았다.

 

옷을 찢어내자 가슴과 옆구리에 난 상처가 보였다.

 

가슴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그러나 옆구리 상처는 내장이 보일 만큼 깊었다.

 

독고무령은 부상자의 혈을 몇 군데 짚고, 찢어낸 옷자락으로 옆구리를 감쌌다.

 

석도명이 눈살을 찌푸린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상처가 너무 심하군.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독고무령은 아무런 말도 없이 손을 놀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게다가 탈진해서 기력마저 쇠한 상태다. 살아날 가능성은 이 할 정도.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자신이 손을 쓴다면 부상자에게 몇 마디 말을 들을 수는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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