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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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52화
52화
“귀하가 우현에 갔다면 아마 맞을 거요.”
“철검보에 몸을 담았던가?”
“오래 전부터 대주님과 안면이 있었지요.”
“그런가? 아쉽군.”
관조운의 얼굴에 진정으로 아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구양손은 독고무령에게 들은 말이 있기에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두이정은 관조운의 반응이 뜻밖인 듯했다.
그는 독고무령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관조운에게 물었다.
“아는 청년인가?”
관조운이 쓴물을 삼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에 본궁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보기 좋게 거절당했지요.”
그때 묵묵히 서 있던 중년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만한 실력이 있다는 말이겠지?”
느릿하니 흘러나오는 나직한 목소리.
독고무령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깊게 들어간 눈, 얇아 보이면서도 일자로 달라붙은 입술. 적당한 키에 약간 말라 보이는 그는 바닥에 뿌리가 박힌 듯 고요히 서서 뒷짐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서 일렁이는 기운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짜릿한 느낌!
구양손이나 관조운은 물론이고, 심지어 두이정에게도 뒤지지 않는 기운이다. 게다가 흔들리지 않는 눈빛은 그가 심계마저도 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일원궁, 생각보다 숨겨진 것이 많은 곳이군. 나야 강한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제왕성에 그만큼 위협이 될 테니까.’
대충 그에 대한 판단을 마친 독고무령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공자가 제 가치를 너무 높이 쳐준 것뿐입니다.”
“조운은 사람을 함부로 평하지 않네. 자네를 끌어들이려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런가요?”
독고무령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고, 시선을 돌렸다.
말이 길어지는 것은 좋을 게 없다. 실수하면 상대가 자신을 파악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다.
아직은 자신을 다 알려줄 때가 아니거늘.
‘이자가 누군지, 그것부터 정확히 알아야겠군.’
그는 구양손도 모르는 자였다. 일원궁의 어지간한 고수들을 모두 알고 있는 구양손으로선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누구신가?”
구양손이 묻자 관조운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제 숙부님이십니다.”
“숙부?”
구양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알기로 관천악에게는 형제가 없었다. 심지어 의형제들조차 없었다.
그런데 숙부라니?
그때 문득, 오래 전에 들었던 어떤 이야기가 떠올랐다.
“혹시…… 이십팔 년 전에 일원궁을 떠났다는 그 숙부 말인가?”
“그렇습니다, 구양 대협. 얼마 전에 돌아오셨지요.”
“관초악이라 하오.”
중년인, 관초악이 먼저 포권을 취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구양손도 엉겁결에 마주 인사했다.
“구양손이오.”
관초악은 구양손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독고무령을 응시했다.
독고무령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의 눈빛을 받아넘겼다.
일시지간, 관초악의 눈 속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그러나 곧 미간을 좁히며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묘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그러한 침묵은 두이정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별원에 쉴 곳을 마련하라 했네. 일단 좀 쉬고 자세한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지.”
구양손과 독고무령, 석도명이 대전을 나가자 관초악이 물었다.
“그의 사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느냐?”
관조운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왜 그러십니까,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습니까?”
관초악은 이마를 찡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싸늘하게 침전된 눈으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그의 눈 아득한 곳에서 불씨 하나가 튀었다.
“위험한 자다. 아주……. 어쩌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끌어들이든지 아니면…… 제거하든지.”
* * *
철검보의 일행이 머물기로 한 별원은 상당히 컸다. 오늘 도착한 사람만이 아니라 나중에 도착할 철검보의 사람들까지 생각해서 마련한 거처인 듯했다.
일행은 그중 아담한 정원 주위에 있는 방 다섯 개를 거처로 정했다.
구양손은 일단 일행들을 방으로 몰아넣고,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 독고무령과 석도명만 방으로 불렀다.
구양소현과 진사혁이 우물거리며 따라왔지만, 구양손은 눈을 부라려 두 사람을 쫓아냈다. 두 사람이 있으면, 보나마나 이야기는 제대로 나눠보지도 못하고 머리만 아플 게 뻔했으니까.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마주 앉자마자 독고무령이 먼저 물었다.
“관초악이라는 자에 대해서 아는 게 있습니까?”
멈칫한 구양손이 눈을 좁히고 입을 열었다.
“관초악은 궁주인 관천악과 배다른 형제네. 나이 열다섯 살인 이십팔 년 전, 어느 기인의 제자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그 후 산서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네.”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떠했습니까?”
“대단한 기재로 알려졌었지. 자질도 아주 뛰어났고 말이야. 나이가 워낙 많이 차이나서 그렇지, 비슷했으면 관천악이 궁주자리에 쉽게 오르지 못했을 거야. 왜,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
독고무령은 잠시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어쩌면…… 현재 이곳의 실질적인 수장은 두이정이 아니라 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구양손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 정도인가?”
석도명도 놀랐는지 그 이상 떠지지 않을 것 같던 눈을 치켜떴다.
“설마 두이정에 대해서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철검보에 있으며 무공만 수련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무천련에 대한 것도 알아보고, 산서 강호에 대한 것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들었다.
게다가 운양에게 들었던 것도 있지 않던가.
당연히 독고무령도 일원궁의 삼태상에 대해선 남들이 아는 만큼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관초악을 두이정 앞에 두려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 * *
무천련에 속한 문파들은 대회합이 열린다는 서신을 받고 문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서연으로 파견했다.
가장 남쪽 장치(長治)에 있는 화천문은 문주인 진천신권 벽도정이 직접 삼백의 정예 무사를 이끌고 문을 나섰다.
화순(和順)의 전궁산장도 정문이 활짝 열리며 이백오십의 무사가 산을 내려왔다.
무천련 오대세력 중 가장 북쪽인 대현(代縣)의 백마방 역시 삼백의 무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방주인 백마도신 서문태강이 직접 나섰다.
그들 외에도 무천련에 속한 곳곳의 중소문파들이 자파의 대표들을 서연으로 파견했다.
산서의 동무림이 출렁이며 말발굽소리가 지축을 흔든다.
격변하는 강호!
긴장에 짓눌린 산서무인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느 쪽으로 서야 할 것인가.
한 번의 판단에 몰락이냐, 번영이냐가 결정될 터였다.
그렇게 모래바람이 삭풍을 타고 산서를 뒤덮을 무렵.
제왕성 깊은 곳에선 열두 사람이 커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군사 공노명을 비롯해 제왕성을 움직이는 수뇌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그들은 상석에 앉은 위지천백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놈들이 모두 움직였다고?”
위지천백의 입이 열린 것은 사람들이 모인 지 일 각이 지나서였다.
위지천백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육순가량의 노인이 조용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성주.”
영락없이 서원의 노학사처럼 보이는 노인.
그가 바로 피도 눈물도 없다는 제왕성의 총군사 제유(帝儒) 공노명이었다.
“우리 쪽도 움직였겠지?”
“지금쯤 두 번째 작전이 시작되었을 겁니다.”
위지천백은 팔걸이 끝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나직이 물었다.
“수양의 일이 조금 어긋났다 들었네만. 조사는 마쳤는가?”
“의외의 일이긴 했습니다만, 크게 염려할 정도는 아닙니다. 놈들 속에 절정고수가 둘이나 숨어 있는 것을 미처 몰라 벌어진 일일 뿐입니다, 궁주.”
“때로는 작은 실수가 전체를 위태롭게 하기도 하는 법이지. 만전을 기해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계획이 모두 완성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겨울이 다시 오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낼 생각입니다.”
“흠, 그럼 내년 이맘때쯤이면 산서 무림이 하나로 되는 건가?”
“그리 될 것입니다.”
이번 일은 무천련이 아니라 제왕성의 의지에 의해 벌어졌다. 앞으로도 모든 일은 제왕성이 주도할 것이고, 결과 역시 제왕성이 뜻한 대로 나올 것이었다.
하긴 무천련이 어찌 자신의 원대한 꿈을 알 수 있으랴. 그저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는 것만도 급급한 자들이.
위지천백은 앉아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 년 후, 이 땅에 우리만의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다! 가라, 가서 제왕성의 위대함을 보여주어라!”
듣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목소리다.
넓은 대전이 울리며 사람들의 심장마저 벌떡거리게 만든다.
열두 명의 각 단체 수장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 영광을 위하여!”
“충! 대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리다!”
“충!”
* * *
철풍검대가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오후.
일원궁에서 백 명의 정예무사가 더 도착했다. 인원이 보강되자 두이정은 즉시 순찰조를 강화하고 제왕성의 움직임에 대한 감시를 한시도 늦추지 않았다.
눈보라를 뚫고 양동공격을 한 제왕성이 아닌가.
언제 어느 때 그들이 또 공격할지 모르는 것이다.
구양손은 순찰조를 강화한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두이정을 만났다.
일원궁의 무사들은 알게 모르게 철검보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 안에서는 마땅히 할 일도 없는 상황, 차라리 대원들로 하여금 순찰이라도 돌게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구양손이 돌아온 것은 두이정을 만나러 간 지 반 시진 만이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철검보의 무사들을 소집했다.
“내일부터 순찰 임무를 맡기로 했네.”
철풍검대원들의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뭘 하려 해도 일원궁 무사들의 눈길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서 신경이 쓰이던 터였다.
주눅들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밖으로 순찰 임무라도 나가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았다.
“사로(四路) 중 능정(凌井) 쪽을 우리가 맡기로 했지. 순찰조에게는 서연 분타에서 기른 전서구가 두 마리씩 지급되네.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전서구를 띄우도록 하게. 그리고 혹시 모르니 개인별로 지급된 평복을 가지고 가게.”
싸움이 일어나 일행과 흩어질 경우, 철검보의 복장을 하고 있으면 적에게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 평복은 그럴 경우도 대비할 겸, 날씨가 추워지면 껴입으라고 지급된 것이다.
구양손이 걱정하는 것은 당연히 첫 번째 이유 때문이었다.
“순찰조의 활동 지역은 어디까지로 정해져 있습니까?”
석도명이 질문을 던졌다.
구양손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사람들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현재 남서, 서, 북서, 북쪽으로 백 리 정도까지 부챗살 형태를 취한 채 순찰을 도는 모양이네.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아니면 태원 오십 리 안으로는 들어가지 말게나.”
조용히 서 있던 독고무령의 눈이 구양손을 향했다.
“태원 오십 리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권고사항입니까, 아니면 절대금지사항입니까?”
구양손이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혹시라도 제왕성 무사들과 맞부딪칠까봐 그러는 거 같네. 왜? 태원에 갈 이유라도 있나?”
“만나볼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저희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 허락해주셨으면 합니다.”
독고무령은 함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중요한 시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태원에 가려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더구나 도움이 된다지 않는가.
구양손은 쾌히 승낙했다.
“자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최대한 조심해서 다녀오게.”
* * *
그날 신시 무렵, 진중의 장가장에 한 사람이 찾아왔다.
장이생이 그에 대한 말을 들은 것은, 대충 일을 마친 후 차 한 잔을 마시며 쉬고 있을 때였다.
“장주님, 제왕성에서 왔다는 분이 장주님을 뵙고자 합니다.”
“제왕성에서 왔다고? 목적이 뭐라더냐?”
“그건 장주님을 뵙고 말씀 드리겠다 합니다.”
“그래?”
장이생은 제왕성의 사람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무기나 다른 물품 때문에 왔다면 굳이 목적을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평상시 제왕성의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일 년에 한두 번? 그나마도 목적을 말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 먼저 찾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제왕성에서 왔다는 사람을 박대할 수는 없는 일.
“그분을 만상전으로 모셔라. 그리고 초비경을 찾아서 즉시 오라고 해라.”
초비경은 눈치가 빠르고 상황판단에 능했다.
만일 자신의 불안감이 어떤 식으로든 현실로 드러난다면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반각 후, 장이생은 초비경과 함께 만상전으로 갔다.
갈의를 입은 자가 만상전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는 삼십 중후반 정도. 고요한 기도를 지닌 자였다.
장이생은 그를 보고 가슴이 무거워졌다.
결코 평범한 자가 아니다. 자신으로서는 상대가 지닌 무위를 알아볼 수가 없다. 고수라는 말.
불안감이 사그라지기는커녕 더욱 커진다. 커다란 돌이 심장을 짓누르는 기분.
하지만 장이생은 별 다른 표를 내지 않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장이생이라 하오.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거요?”
갈의장한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물어볼 것?”
장이생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갈의장한을 직시했다.
끝이 살짝 올라간 눈은 미동조차 없는데, 마치 뱀눈을 보는 듯 차갑게 느껴졌다.
“어디 말해 보시구려. 뭘 알고 싶으신 것인지.”
갈의장한, 소엽이 독사 같은 눈을 번들거리며 물었다.
“칠 년 전, 관제산 근처를 지나신 적이 있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