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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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50화
50화
청년은 독고무령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현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다시 만날 거라 어찌 알았을까. 저자는 자신이 경고를 보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독고무령은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담담히 물었다.
“소양이라는 사람은 구했소?”
청년이 입술을 악다물고 눈을 파르르 떤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나 보다.
독고무령은 더 이상 그 일을 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
“우리는 이곳에서 잠시 쉬어갈 생각으로 왔소. 괜찮다면 함께 좀 쉬었으면 좋겠소만.”
피해도 없는데다 독고무령과 아는 사이인 것 같다.
구양손을 비롯한 일행들은 독고무령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잠시 상황을 지켜보았다.
청년은 독고무령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철검…… 보군.”
“그렇소. 우리는 철검보의 사람들이오.”
입술을 잘근 깨문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오.”
어쩔 수 없었다, 이들이 강제로 밀고 들어온다 해도 막을 길이 없는 이상은.
그는 짧게 대답하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검을 막은 물체가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토막 난 작은 가죽 끈 하나. 그것은 말의 고삐 조각이었다.
그걸 보니 절로 어깨의 힘이 빠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저자가 누구기에…….’
예상대로 산신당 안에는 두 사람이 더 있었다.
한 사람은 서서 잔뜩 긴장한 채, 한 사람은 누워서 눈만 뜨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서 있는 자는 우현에서 봤던, 어깨에 부상을 입은 자였다.
그의 옆을 지나간 철검보 무사들은 한쪽에 자리를 마련했다. 다행히 산신당이 제법 넓어서 그들이 모두 들어갔는데도 비좁지 않았다.
낡은 사당이어서 그런지 불을 피운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아마도 여행자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불을 피운 듯했다.
몇 사람이 나서서 산신당 안에 흩어져 있는 나뭇조각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몇 사람은 땔감으로 쓸 나무를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추울 때 눈이 왔으니 눈이 쌓인 곳 아래쪽에는 땔감으로 쓸 만한 나무들이 제법 있을 것이었다.
석도명이 일단 모아진 산신당의 나뭇조각으로 불을 피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길이 커지더니 산신당 안에 온화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때 독고무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누워있는 자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가자 ‘설’이라 불렸던 청년이 재빨리 일어섰다.
“무슨 일이오?”
또 다른 청년도 그의 옆에 서서 독고무령이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게 막았다.
독고무령은 눈짓으로 누워있는 청년을 가리켰다.
“저 사람의 상처를 내가 좀 봤으면 싶은데.”
청년, 설의 눈이 머리카락 사이에서 반짝였다. 냉기가 많이 사라진 눈빛이었다.
‘그러고 보니 눈이 참 멋지군.’
독고무령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설이 물었다.
“의술을 아시오?”
“조금. 의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상처를 손볼 줄은 아오.”
그때 뒤쪽에서 진사혁이 소리쳤다.
“이봐, 한번 맡겨보게. 우리 상처도 그 친구가 손봐서 배는 빨리 나았다네.”
동의한다는 듯 구조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사람들의 반응에 독고무령을 믿기로 했다.
“좋소. 그럼 부탁하겠소.”
그가 허락하자 독고무령이 누워있는 자의 바로 앞에 앉았다.
잠시 후.
독고무령은 누워있는 청년의 상처를 손질하고 옷을 찢어 상처를 싸맸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어쩌자고 이대로 놔둔 것이오? 상처가 곪았으면 손댈 수도 없이 죽을 뻔하지 않았소?”
독고무령의 말에 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어쩔 수 없었소. 쫓아오는 놈들 때문에…….”
독고무령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 불쑥 물었다.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말해줄 수 있소?”
갑자기 설의 얼굴이 굳어졌다.
상대가 사정을 묻는다.
‘말해도 될까?’
하지만 망설임도 잠시였다. 어차피 저들을 안으로 들이면서 생각한 것이 있는 마당.
“가문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뛰어다니다가, 오히려 원수에게 당했소. 더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으니 이해하시오.”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 가슴에 서린 한을 잘게 부수어내며 뱉어내는 말처럼 들린다.
독고무령도 그러한 마음을 알기에 더 깊은 것까지 묻지는 않았다.
“하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오?”
설은 독고무령을 직시하고는, 미리 생각해 놓았던 말을 넌지시 꺼냈다.
“괜찮다면…… 우리를 당신 일행에 합류시켜줄 수 있소?”
단순히 하는 말이 아닌 듯하다.
독고무령이 ‘설’에게 물었다.
“위험에서 벗어날 때까지만 함께 가겠다는 거요, 아니면 우리의 일행이 되겠다는 거요?”
설이 숨을 한번 몰아쉬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분간이라도 일행으로서 함께했으면 하오.”
그것은 자신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독고무령은 구양손을 돌아다보았다.
구양손도 두 사람의 말을 다 듣고 있었기에 이마를 좁힌 채 생각에 잠겼다.
청년의 무공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만일 독고무령이 손을 쓰지 않았다면, 자신의 호위무사 둘이 순식간에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것이 비록 기습에 의한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호위무사들도 그만큼 조심한 상태에서 접근했으니까.
지금은 강자가 필요한 때. 잠깐이든 오래든 나쁠 것은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승낙할 수도 없는 일.
그가 설에게 물었다.
“최소한 자네들이 누군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설은 숨을 한 번 쉬고 입을 열었다.
“저는 용설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제 친구들입니다.”
“사문이 어떻게 되나?”
“그건 말 못할 상황이 있어서 당장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남에게 해를 끼치며 살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구양손은 눈을 반짝이며 용설을 바라보았다.
원한 관계가 있는 무리에게 쫓긴다고 했다. 자칫 쓸데없는 일에 휘말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 철검보가 일일이 사연을 따지고 무사를 받아들였던가? 당장 석도명과 그의 형제들만 해도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게다가 알진 못해도, 독고무령 역시 뭔가 사연이 있는 듯했다. 그것도 평범하지 않은 사연이.
하물며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우리는 무천련 대회합 때문에 서연으로 가는 길이네. 해서 우리의 일행이 되려면 일단 철검보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네. 그렇지 않고서는 서연에서 헤어져야 하지. 어떤가? 당분간 아예 철검보의 사람이 되어서 생활하는 것이. 보아하니 당장 갈 곳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용설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곧 안정을 찾고 구양손에게 물었다.
“할 일이 있어서 오래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영원히 철검보 사람이 되라고는 않겠네. 그렇게 할 사람들도 아닌 것 같으니 말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일 년 정도면 어떻겠나?”
일 년, 지금까지의 삶을 생각하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이런저런 준비도 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다 보면 금방이다.
그리고 일 년 정도 숨어 있다 보면 저들도 자신을 잊을지 모르는 일.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
용설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구양손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그럼 일 년 동안 철검보의 사람으로 일하겠습니다.”
구양손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우리 철풍검대의 조원으로 받아들이겠네. 며칠 전의 싸움으로 자리가 많이 비었거든.”
최소한의 비용으로 고수를 얻었다.
비록 일 년이지만, 구양손은 그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혹시 알아? 더 있을지…….’
해가 질 때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진 정도. 바로 출발한다면 어두워 지기 전에 산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산을 벗어난다 해도 마땅히 쉴 곳이 없다. 한겨울에 삭풍이 부는 밤길을 걸어야 한다는 뜻.
“일단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 출발하자.”
결국 구양손은 산신당에서 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땔감도 충분하고, 육포를 넉넉히 사와서 먹을거리도 걱정이 없었다.
뭐 하러 밤에 가서 일원궁의 눈치를 본단 말인가.
그런데 구양소현이 속도 모르고 말했다.
“숙부님, 밤이 되기 전에 충분히 산을 넘을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럼, 너 혼자 가든가.”
구양소현은 힐끔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독고무령은 못 본 척 불길만 응시했다.
“쳇.”
구양소현은 입을 삐죽거리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구양손은 기가 죽은 구양소현을 바라보며 속으로 끌끌 혀를 찼다.
‘녀석, 그래도 많이 나아졌군.’
철풍검대의 구조에 들어온 이후, 한 달에 서너 번씩 구양소현으로 인해 벌어지던 난리가 종식(?)되었다.
물론 위험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돌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말릴 수 없는 이상은 독고무령과 잘 되기라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정 안 되면, 저 곰 같은 친구하고라도…….’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이 시간이 흐르고, 서쪽에 난 창살 사이로 붉은 하늘이 보였다.
구양손은 호위무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가서 육포를 가져와라.”
호위무사가 나가더니 말안장에 실린 육포를 가져왔다.
구양손은 육포를 나누어 주려다가 진사혁을 힐끔 쳐다보았다. 진사혁이 침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육포다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양손은 제일 먼저, 진사혁을 향해 육포 한 장을 내밀었다.
“한 장에 은자 반 냥이네. 그래도 싸게 주는 거야. 먹기 싫으면 말고.”
* * *
소엽이 돌아온 것은 석양이 마지막 불꽃을 남기고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남조경은 그가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알아냈느냐?”
소엽은 자신이 조사한 결과를 간단하게 보고했다.
“환자가 탄 마차의 주인을 찾아냈습니다, 당주.”
그 말을 듣는 순간, 남조경의 두 눈에서 싸늘한 광채가 일렁였다.
마침내 자신을 심마로 몰아넣은 일의 마지막 종착지가 밝혀진 건가.
그는 다급히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지로 목구멍에 밀어 넣고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게 누구냐?”
“장가장주 장이생이라는 자의 마차였다 합니다.”
“장가장? 진중의 장가장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당주.”
남조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장가장은 그도 아는 곳이다. 제왕성 내에 철방이 있긴 하지만, 자급자족을 하기에는 모자라기에 외부에서 무기를 들여오곤 했다. 그중 가장 큰 거래를 하는 곳이 바로 장가철방이었던 것이다.
진가철방이 강호문파에 무기를 공급하지 않는 만큼 장가철방은 제왕성에 꼭 필요한 곳이다. 더구나 전쟁이 시작될 판. 무기가 더욱 많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곳의 주인이 마차의 주인이라면, 당장 모든 것을 지우는데 숙고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남조경은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무기를 공급하는 곳을 바꾸지 못할 것도 없다. 정 안 되면 그곳의 장인들만이라도 살려서 무기를 만들게 하면 될 것이 아닌가?’
일단은 더 정확한 사실을 알아봐야 한다. 그 어린 환자가 정말 소악귀인지 아닌지.
조사해보면 결과가 나올 터. 결국 지워야 한다면…… 확실히 지우는 수밖에!
“소엽, 즉시 장이생의 마차에 실렸던 놈의 정체를 자세히 알아봐라. 어디서 구한 놈인지, 어떻게 생긴 놈인지. 어떤 방법을 쓰든…… 그것은 네가 알아서 해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소엽이 아니었다.
오싹한 한기와 함께 짜릿한 기분이 오랜만에 몸을 달궜다.
“예, 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