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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49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8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49화

 

49화

 

 

 

 

 

 

* * *

 

 

 

눈이 녹았다지만 날씨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냉기를 막기 위해서 가죽옷을 걸쳤지만, 가랑이로 스며드는 찬바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얼어서 얼음구슬 두 쪽이 툭 떨어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유원위가 너스레를 떨며 어깨를 후드득 흔들었다.

 

그러자 조원화가 피식 웃었다.

 

“아마 네 것이 제일 먼저 떨어질 거다.”

 

“흥! 내 구슬이 떨어질 때쯤이면, 네 것은 막대기도 얼어붙어 있을 걸?”

 

뒤쪽에서 따라가던 구양소현이 쌍심지를 켰다.

 

“조용히 안 하면, 둘 다 얼기 전에 잘라줄 테니 알아서 해!”

 

진사혁이 재빨리 나섰다.

 

“음하하, 누님, 그 일은 내게 맡기쇼. 아예 내 몽둥이로 터트려 줄 테니까.”

 

“조용해, 멍청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일행 중 그녀의 성격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번 한다면 하는 그녀다. 철풍검대에 들어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입을 열었다가 그녀에게 찍히면 앞날이 막막할 터였다.

 

심지어 독고무령도 입을 다물고 말을 모는 데만 열중했다. 그녀의 잔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았다.

 

‘흠, 말을 타는 것도 그럭저럭 재미가 괜찮군.’

 

 

 

* * *

 

 

 

서연으로 가기 위해선 제법 큰 산을 넘어가야 했는데, 산의 허리까지 아직도 눈이 쌓여 있었다.

 

밤을 산속에서 보내야 할지 모르는 일. 먹을거리도 좀 준비할 겸, 일행은 산을 넘기 전 종애(宗艾)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구양손은 몇 번 종애를 오간 적이 있었기에 머뭇거리지 않고 일행을 객잔으로 인도했다.

 

그가 인도한 객잔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도 아주 작지는 않아서 스무 명이 잠시 쉬어가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듯 보였다.

 

말을 객잔 앞에 매고 안으로 들어가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객잔 가운데에 있는 작은 화로에서 퍼지는 열기였다.

 

탁자는 모두 열 개 정도. 세 탁자만 손님이 있는 상태였다.

 

일행이 다섯 개의 탁자를 차지하자 안이 거의 다 찼다.

 

독고무령은 점소이가 엽차 잔을 놓고 간 다음에야 구양손에게 물었다.

 

“무천련 대회합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십시오.”

 

“무천련 대회합?”

 

“어차피 무천련 대회합 때문에 가는 길이니 회합의 성격 정도는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구양손은 독고무령의 질문에 엽차 잔을 만지작거리며 흔들리는 찻물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사실 사람들이 무천련에 대해 착각하는 게 있다네. 그게 뭔지 아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구양손이 말을 이었다.

 

“무천련은 완벽한 횡(橫)의 조직이 아니라네. 물론 종(縱)의 조직도 아니지만.”

 

연합체라도 어차피 하나의 단체인 이상 완벽한 횡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 정도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구양손은 왜 그 말을 하는 걸까?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독고무령은 묵묵히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무천련에 속한 세력들은 각자의 세력에 대한 자유가 있지만, 대회합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면 무조건 그에 따라야만 하네. 한마디로 련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지.”

 

무조건 복종.

 

그 말을 하는 구양손의 말투가 무겁게 들린다.

 

독고무령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구양손을 바라보았다.

 

“복종하지 않는 세력들도 있었을 텐데요?”

 

“그럼 도태되는 거지. 심하면…… 적으로 변할 수도 있고.”

 

그 말을 하는 구양손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미세하지만 눈빛도 흔들린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는 듯.

 

독고무령은 석도명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오면서 말했다. 무천련에 속했던 세력 중 몇이 사라졌는데, 그 일에 무천련이 관여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적으로 변하기 전에 제거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때 눈빛을 가라앉힌 구양손이 마저 말했다. 어쩌면 그 말을 강조하고 싶어 여태 무천련의 성격에 대한 것을 말한 것일지도 몰랐다.

 

“좌우간 그 때문에 무천련 대회합은 무천련에 속한 세력들에게 매우 중요한 행사라네. 각자의 세력에 불리한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불리한 결정이라도, 일단 련의 결정이 내려지면 따라야 한다.

 

“신경이 곤두서 있겠군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지. 그러니 모두가 유의해서 움직여야 할 것이네. 공연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야.”

 

바로 그때였다.

 

“큭.”

 

한쪽에서 들릴 듯 말듯 작은 소리가 들렸다. 비웃음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독고무령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객잔 구석진 곳의 탁자. 홀로 앉아 있는 남루한 옷차림의 장한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은 헝클어진 머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 봐선 서른 중반 정도로 보였다.

 

탁자 위에 놓인 것은 술이 가득 따라진 술잔 하나, 술병, 칼 한 자루가 전부였다. 안주 그릇은 보이지 않았다.

 

석 자 길이의 칼은 일반 칼보다 폭이 좁아서, 도신의 폭도 세 치가 안 될 것 같았다. 

 

도집은 그의 옷차림만큼이나 낡았고, 천으로 대충 두른 손잡이는 때를 타서 시커멓게 반질거렸다.

 

독고무령이 바라봤을 때, 그는 탁자에 놓인 술잔을 왼손으로 잡고, 술잔 속에 코를 박다시피한 채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웃는 중이었다.

 

구양손의 말 때문에 터져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냥 혼자서 낸 소린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비웃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비웃는 거지?’

 

독고무령이 담담히 바라보는 사이 그가 웃음을 멈추고 술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머리가 젖혀지자 오른쪽 뺨을 길게 가르고 지나간 상처가 보였다. 눈 옆에서 턱까지 그어져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무채색의 눈빛이 음울하게 느껴졌다.

 

나이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젊은 듯했다.

 

“아는 잔가?”

 

석도명이 슬쩍 물었다.

 

독고무령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고 시선을 거두었다.

 

‘뭔가 몰라도 사연이 있는 자 같군.’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자신만큼 기구한 사연을 지닌 자가 또 있을까?

 

 

 

떠나려 할 즈음, 객잔주인이 미리 주문해 놓은 육포를 가져왔다.

 

진사혁이 힐끔 그걸 보고 물었다.

 

“얼마에 샀습니까?”

 

구양손은 ‘알아서 뭐하게?’ 그런 눈으로 진사혁을 흘겨보고 대답해주지 않았다.

 

“설마 하나에 한 냥 주고 산 것은 아니겠죠?”

 

사람들은 그런 미친놈이 어딨냐는 눈빛으로 진사혁을 바라보았다.

 

진사혁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전에 그렇게 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구양소현이 속도 모르고 말했다.

 

“전에 나하고 숙부님이…….”

 

구양손이 다급히 구양소현의 입을 막았다.

 

“소현아!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가자!”

 

 

 

* * *

 

 

 

종애를 떠나 한 시진을 가자 눈 모자를 쓴 하얀 산이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구양손은 일행을 계곡 사이에 난 길로 이끌었다. 

 

서연으로 가는 길은 그 길이 유일했다. 돌아가지 않을 거라면 그 길을 따라 산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늘 때문인지 계곡의 길은 눈이 다 녹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도 길이 드러나 있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길옆의 계곡으로 빠질지도 모르는 일. 계곡이 깊진 않지만 위험한 것은 매한가지다.

 

일행은 조심스럽게 말을 몰며 구불구불한 계곡 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휘이이잉.

 

바람이 계곡을 관통하며 강하게 불어댈 때마다 바위와 나무에 쌓였던 눈이 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그렇게 한 시진.

 

계곡길을 통과하고 고개를 하나 넘자 제법 넓은 분지가 나타났다. 그나마 그곳은 눈이 모두 녹아서 갈색 땅이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건너편에는 또다시 야트막한 산이 길게 늘어져 있어서 아직 산을 다 빠져나가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다행이라면 그 너머로 큰 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힘내라. 조금만 가면 산신당이 하나 있다! 그곳까지만 가면 몸을 녹일 수 있을 것이다!”

 

구양손이 소리치고는 먼저 말을 몰고 분지를 가로질렀다.

 

사람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두두두두두…….

 

“하아, 가자!”

 

오랜만에 말들이 갈기를 휘날리며 마음껏 달렸다.

 

거리는 비록 얼마 안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살얼음판을 걷듯이 걸은 게 답답했는지 말들도 힘껏 땅을 박찼다.

 

독고무령은 맨 뒤로 처져서 속도를 조금 내보았다.

 

앞선 말들이 달리기 때문인지 독고무령의 말은 특별한 주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속도를 빨리했다.

 

기분 좋은 율동이 엉덩이를 통해 전해졌다.

 

독고무령은 몸을 가볍게 한 채 그 율동에 보조를 맞추었다.

 

그걸 보더니 구양소현이 눈을 크게 떴다.

 

“어? 제법이네요?”

 

‘이제 알았냐?’

 

“그렇다고 너무 좋아하지 말라구요, 조장. 산서에선 애들도 그 정도는 탈 줄 아니까.”

 

‘누가 뭐라 했나?’

 

독고무령은 대꾸하지 않고 말과 하나가 되어 달렸다.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분지의 넓이는 오십여 장에 불과했다. 그곳을 다 지나자 다시 숲이 시작되고, 숲 사이로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구양손이 말한 산신당은 숲 사이로 난 길을 백여 장 정도 올라갔을 때 보였다.

 

산신당으로 다가가던 구양손이 멈칫하더니 손을 들어 사람들을 세웠다.

 

곧 구양손의 호위무사들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구양손은 손짓과 전음으로 호위무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안에 누군가가 있다. 바닥의 핏자국으로 봐서 부상자가 있는 것 같다. 조사해봐라. 무리하게 자극하지는 말고.>

 

고개를 끄덕인 두 명의 호위무사는 말에서 내려 산신당으로 다가갔다.

 

산신당까지는 십오 장 정도의 거리.

 

호위무사들이 산신당 문 앞에 도착했을 즈음, 독고무령이 구양손의 옆에 도착했다.

 

독고무령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점점이 흩뿌려져 있는 붉은 핏방울이 보였다. 하얀 눈 위에 붉은 꽃이 핀 듯했다.

 

결코 작은 양이 아니다. 상당한 부상을 입었다는 말.

 

독고무령은 고개를 들고 산신당을 쳐다보았다.

 

안에서 셋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중 하나는 부상 때문인지 기운이 약한데다 불규칙하기까지 했다.

 

그때였다.

 

나머지 두 기운 중 하나가 갑자기 강해졌다. 두 호위무사가 산신당의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잡음과 동시였다.

 

독고무령은 다급히 호위무사들에게 소리쳤다.

 

“물러서!”

 

하지만 찰나간의 차이로 두 호위무사는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말았다.

 

순간.

 

쉬이익!

 

문 안쪽에서 시퍼런 검광이 번뜩였다.

 

“헉!”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안에서 뻗친 검세가 너무도 빨랐다. 두 호위무사는 대경하며 급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시퍼런 검광은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두 호위무사의 뒤를 쫓았다.

 

“멈춰라!”

 

구양손을 비롯한 일행들이 다급히 말에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십오 장의 거리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이 반도 가기 전, 시퍼런 검첨이 호위무사의 심장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찰나였다!

 

땅!

 

맑은 검명이 울리고, 독사의 혓바닥처럼 호위무사의 심장을 노리던 시퍼런 검광이 한쪽으로 튕겨졌다.

 

겨우 목숨을 건진 호위무사는 급급히 물러서며 검을 뽑았다. 부지불식간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 그의 얼굴은 바닥의 눈만큼이나 창백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이 빌어먹을 놈이!”

 

그는 무작정 자신을 죽이려 한 상대에게 분노했는지 욕을 하며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독고무령의 목소리가 산신당 앞에 울려 퍼졌다.

 

“잠깐!”

 

호위무사는 흠칫하면 옆을 바라보았다.

 

언제 왔는지 독고무령이 조용히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서야 그의 좌우와 뒤쪽에 내려섰다.

 

장내에 갑자기 침묵이 맴돌았다.

 

산신당에서 나온 자는 두꺼운 천으로 목을 두른 데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나이는 이십이 갓 넘은 것으로 보였는데, 표정이 계곡에서 봤던 얼음벽보다 더 싸늘했다.

 

독고무령이 먼저 침묵을 깼다.

 

“우리는 당신의 적이 아니오.”

 

안에서 나온 청년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당신도 우리의 적이 아니거든.”

 

독고무령의 말에 안에서 나온 청년의 싸늘한 얼굴에 금이 갔다. 그런데 독고무령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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