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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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4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48화
48화
* * *
다음 날 아침, 서연으로 갔던 전령이 돌아왔다.
전령이 도착하자 구양손은 급히 조장들을 소집했다.
굳어 있는 표정. 전령이 뭔가 중요한 소식을 가지고 온 듯했다.
“일원궁에서 대대적으로 사람들을 파견했네. 아마도 이번 일을 단순하게 넘기지 않을 생각인 것 같네.”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백 명이면 일원궁의 무사 중 이 할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말과도 같았다.
물론 단순 숫자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었다. 아마 실질적인 세력을 따진다면 일 할 정도는 소멸되었다고 봐야 했다.
사실 그 정도도 일원궁에는 엄청난 손실이었다.
“일원궁의 삼태상 중 한 사람인 조천자(早天子) 두이정이 삼백의 정예를 이끌고 직접 나섰네. 일행 중에 이공자 관조운까지 있다고 하는군.”
순간 독고무령의 눈이 반짝였다. 관조운이라면 그가 우현에서 만났던 자가 아닌가.
‘그가 일원궁의 이공자였군.’
그가 관조운을 떠올린 사이, 구양손이 느릿하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무천련 대회합이 서연에서 벌어질 것 같네.”
그 말에 조장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적수등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회합을 서연에서요?”
“피로 뒤덮인 그곳에서 제왕성에 대한 복수를 다짐할 생각인 것 같아.”
무천련 대회합.
오 년에 한 번, 제왕성에 대항하는 각파의 수장들이 모여서 사흘에 걸친 대회의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왕성으로 인해서 사 년 만에 열리는 셈이었다.
괜찮은 생각이었다. 아마 격문만 제대로 작성한다면, 다른 어떤 곳보다도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적시에 적소를 골랐어.’
독고무령은 그 누군가의 빠른 판단에 감탄하며 구양손에게 물었다.
“그 외에 다른 소식은 없습니까?”
“아직은 없네. 철양검대가 도착하면 보다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있겠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밖에 있던 구양손의 호위무사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대주께 아룁니다! 철양검대가 곧 표국에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
구양손은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험, 밖으로 나가보세.”
철양검대의 대주 은창산은 덩치가 구양손의 두 배쯤 되어 보이는 자였다. 진사혁과 세워놓으면 키는 진사혁이 조금 크고 덩치는 은창산이 더 클 듯했다.
그러다 보니 얼굴도 구양손의 두 배는 될 듯했는데, 그나마 우락부락한 인상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꺼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웃으며 인사를 나누기에는 혈향도 아직 지워지지 않은 상태.
구양손은 은창산과 대충 인사를 나누고 임시회의장인 조양전으로 안내했다.
은창산도 별 불만 없이 철양대의 조장들과 함께 조양전으로 들어갔다.
은창산은 자리에 앉자마자 구양손을 향해 정말 놀랐다는 투로 말했다.
“보주는 물론이고, 보의 모든 사람들이 조양표국의 일을 보고 받고 놀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형님.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공격을 받았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도혼단을 물리쳤다는 것에 놀랐다는 말.
구양손은 쓴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나만큼 놀랐겠나?”
은창산은 구양손을 의형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구양손의 성격을 잘 알았다. 하기에 구양손이 장난처럼 받아넘긴 이유를 익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비록 피해가 많이 나긴 했지만 도혼단을 물리쳤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일입니까, 형님?”
호들갑스런 은창산의 말에 구양손이 눈을 흘겼다.
“적아를 합쳐서 삼백이 죽었어. 아직 근처에 영혼들이 떠돌고 있네. 쓸데없는 말 말고, 전할 말이나 있으면 어서 말해보게.”
“어이구, 이제 점쟁이까지 되셨구려.”
“이 사람이 정말!”
“아, 아, 알겠습니다. 말씀드리죠.”
은창산은 자신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입 안에 톡 털어 넣고는, 목을 두어 번 움직인 후 입을 열었다.
“보주께선 형님이 먼저 저희 철검보를 대표해서 서연에 가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보의 대표?”
은창산이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흐, 그래도 도혼단을 뭉개버린 분 아닙니까.”
“끄응, 그게 아닌데……. 좌우간 말해봐. 설마 그게 다는 아니겠지?”
“인원은 이십 명 정도. 형님이 먼저 가서 분위기 잡고 계시면, 무천련 대회합이 벌어지는 이월 초하루 바로 전날쯤 보주님께서 가실 겁니다.”
“이곳은 어떻게 하고? 제왕성 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은창산이 씨익 웃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이미 본보는 물론, 무천련의 모든 세력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며칠 전처럼 무작정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준비를 철저히 했다는 말. 그렇다면 제왕성이 전격적인 공격을 하지 않는 한 은창산의 말대로 쉽게 당하지는 않을 듯했다.
“언제 가라는 건가? 설마 바로 가라는 건 아니겠지?”
“내일 아침쯤 출발하시면 될 겁니다.”
“제길, 가서 닷새나 뭉그적거려야 한단 말이지? 이놈 저놈 눈치 보면서?”
“그 정도야 뭐. 형님은 한 달 보름도 남의 집에 가서 뭉그적거렸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구양손이 은창산을 째려보았다.
은창산의 말대로 남의 집에 가서 그런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서였다. 비록 실패했지만.
‘젠장!’
은창산을 째려보던 구양손의 눈이 독고무령을 향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가야 할까?”
“나쁘지 않은 생각 같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을 테니까요.”
“흠, 그도 그렇군.”
은창산의 눈이 빠르게 좌우로 오갔다.
왜 저놈에게 그걸 묻지? 그런 표정으로.
그럴 만도 했다. 독고무령은 철풍검대에서 거의 나가지 않고 조원들을 강하게 단련하는 일에만 주력했다.
철풍검대의 대원들조차 사흘 전의 일이 아니었다면 독고무령이 그렇게 강하다는 것을 몰랐을 터. 겨우 얼굴만 두어 번 스쳐봤을 뿐인 은창산이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은창산이야 눈알을 굴리든 말든, 구양손은 조금 펴진 표정으로 명을 내렸다.
“구조와 팔조가 나와 함께 가세. 그리고 적 조장, 자네가 잠시 나머지 조원들을 통솔하게.”
가라면 못 갈 것도 없었다. 구조와 팔조만 옆에 있으면 어떤 놈이 시비를 걸어도 두려울 게 없었다.
* * *
구조 여덟 명, 팔조에서 다섯 명, 구양손과 그의 호위무사 여섯 명. 도합 스무 명이 서연에 가기로 했다.
구조원 중 종리청과 소강은 부상이 아직 완전치 않아서 표국에 남겨두었다.
독고무령은 조원들에게 서연으로 가는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전 조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분노한 일원궁 무사들 사이에서 며칠을 지내야 하오. 다른 말은 하지 않겠소. 그대들은 도혼단과도 싸워서 이긴 사람들이오. 그 점을 잊지 마시오.”
분노한 일원궁도들의 기세에 눌리지 말라는 뜻.
조원들은 상기된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예, 조장!”
“알겠소이다.”
독고무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무천련 대회합.
무천련의 오대세력과 지지 세력들이 모두 모일 것이다. 잘만 이용하면 제왕성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을지도…….
독고무령과 구조가 나옴과 동시에 팔조도 방에서 나왔다.
석도명과 그의 일행 셋 그리고 도철이라는 조원 하나. 모두 다섯이었다.
석도명이 독고무령에게 다가오더니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무천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제왕성에 대항하기 위해서 오대세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연합체로 알고 있습니다만.”
석도명은 잠시 침묵하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좀 뜬금없는 말일지 모르겠네만, 너무 무천련을 믿지는 말게. 혹시라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야.”
자신이 철검보의 일개 조장으로 있는 것에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한 듯했다. 사실이 그러니 그에 대한 것은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믿지 말라는 말은 뭘까? 무천련에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라도 있다는 걸까?
“가면서 말씀 좀 해주시죠.”
“철마장에 있을 때 장주께 들은 이야기가 전부네. 확실하다고는 자신할 수는 없네만, 어느 정도는 사실일 거라 생각하고 있지. 좌우간 내가 알고 있는 걸 말해줄 테니, 판단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
제9장 서연(西煙)으로 가는 길
눈이 녹는 바람에 땅이 질척해진 상태.
일행은 말을 타고 가기로 했다.
다행히 표국에 삼십여 필의 말이 있었기에 스무 명이 모두 말을 타고 가는 것은 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독고무령이었다. 말을 타본 적이 없는 그는 자신으로 인해 걸음이 늦춰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는 걸어가겠소.”
그 말에 구양소현이 대뜸 나섰다.
“조장이 걸으면 우리도 모두 걸어야 하잖아. 그러지 말고 가면서 배워. 배워서 남 줘?”
그녀는 눈까지 치켜뜨고 열변을 토했다.
“산서에서 말을 못 탄다고 하면 바보취급 받는다고. 어려운 것도 아닌데 못 배울 게 뭐 있어? 더구나 급하게 달릴 것도 아니잖아?”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라는 표정으로. 그래야 자신들도 편하게 말을 타고 갈 수 있을 테니까.
아무리 독고무령의 얼굴에 만년한철이 씌워져 있다 해도 어색함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럼, 진 형이…….”
“하하하, 그럴…….”
웃으며 앞으로 나서던 진사혁이 흠칫하며 말을 끌었다. 구양소현의 도끼눈에 뒤통수가 쪼개지는 기분이 든 것이다.
“사실 걸어가야 할 사람은 동생이야. 안 그래? 말이 얼마나 고생하겠어? 그런데 남까지 가르치겠다고?”
진사혁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나보다는 누님이 낫지. 하, 하, 하.”
독고무령은 오 리도 가기 전에 후회했다.
‘남들이 뭐라 해도 그냥 걸어갈걸 그랬어.’
귀가 따가웠다. 그래도 말 타기를 배우는 입장이니 구양소현의 잔소리를 듣지 않을 수도 없었다.
“도대체 여태 말 타는 것도 못 배우고 뭐 했나 모르겠네.”
비옥에 말이 있나, 아니면 삼불곡에 말이 있나?
말이 없으니 당연히 배우지 못했을 뿐이다.
“고삐를 단단히 잡아. 아니, 단단히 잡으라고 했다고 그렇게 세게 움켜쥐면 어떡해? 고삐를 채찍으로 쓸 일 있어?”
‘별로 세게 쥐지도 않았는데…….’
“몸은 바로 세우고. 머리, 어깨, 허리, 뒤꿈치까지 일직선이 되게 해. 그렇지, 그렇게. 힘은 빼고!”
‘뺏다, 뺏어!’
“말과 하나가 된다는 마음을 가져야 돼. 허벅지를 착 붙이고, 종아리도 배에 살짝 붙여. 발로 차면 날뛸지 모르니까 함부로 차지 말고…….”
‘걱정마라, 안 찬다, 안 차. 너만 조용하면 돼.’
구양소현의 잔소리는 근 반 시진 동안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독고무령이 말 타기에 재능이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반 시진이 지나자 그럭저럭 다른 사람과 나란히 갈 정도는 되었다.
“조장, 제법이네? 멍청한 놈은 하루 종일 가르쳐도 못타는데.”
그게 지금 칭찬이라고 하는 소리야, 뭐야?
독고무령은 슬쩍 구양소현을 돌아다보았다.
찬바람 때문인가? 나란히 말을 모는 구양소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으로.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눈을 돌린다. 더욱 벌게진 얼굴로 눈까지 내리깔고.
‘그동안 당한 걸 복수해서 즐거운가 보군.’
그는 구양소현의 마음을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가슴도 발갛게 달아 있다는 걸.
‘이렇게 계속 같이 다녔으면…….’
그런 마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