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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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87화
87화
* * *
삼대는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저 아래쪽에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기이하게도 다른 새들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삭풍이 마른 나뭇가지를 쓸고 지나가는 소리와 까마귀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한두 마리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수십 마리가 합창하듯이 울어댔다.
싸움이 끝난 전쟁터에서나 들릴 법한 소리. 불길함을 동반한 소리였다.
마치 어둡고 불길한 기운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듯했다.
독고무령은 산을 둘러싸고 있는 불길함의 정체를 알고 속도를 늦추었다.
급하게 서두르던 독고무령이 속도를 늦추자 전유곤이 물었다.
“무슨 일이오?”
“소리를 죽이고, 주위를 살피면서 천천히 내려가시오.”
“왜……?”
독고무령은 까마귀들이 울어대는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대답했다.
“싸움이 끝난 것 같소.”
계곡 아래에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린다.
삼대의 대원들은 고개를 내밀어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할 말을 잊었다.
수백 구의 시신이 벌겋게 변한 계곡 안에 뒤엉켜 있다.
제왕성의 무사도 적지 않았지만, 무천련 무사들이 훨씬 더 많았다.
비릿한 혈향이 바람을 타고 흐른다. 계곡 위에서 맡아질 정도로 진한 혈향이다.
너나할 것 없었다. 삼대의 대원들은 아래로 내려가 까마귀들을 쫓아냈다.
“워워! 저리 가라, 까마귀새끼들아!”
“저리 안 가!”
시신 중에는 자파의 사람들도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도 있고, 떠날 때 수고하라며 어깨를 두드려주던 사문의 어른도 있었다.
전유곤은 전궁기의 무사들과 함께 전궁산장 무사들의 시신을 모으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제길, 제기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때 철검보 무사들의 시신을 찾아다니던 석도명이 한 사람을 안아들고 독고무령을 불렀다.
“대주! 여기 살아있는 사람이 있소!”
석도명이 안고 있는 자는 철정검대의 오조장인 목풍산이라는 자였다.
그는 한 팔이 잘리고, 다리도 뼈가 부러져 덜렁거렸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겨우 가느다란 숨만 이어져 있었다.
살아있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은 제왕성 무사들이 이차적으로 손을 썼다는 말. 그런데 목풍산은 금방 죽을 것 같아서 그대로 놔둔 듯했다.
그나마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그가 자신의 잘린 팔 부위를 세게 눌러서 최대한 피가 쏟아지는 것을 막은 덕분이었다.
독고무령은 목풍산의 잘린 팔 근처의 혈도를 짚어 지혈을 했다. 그리고 부러진 다리뼈를 맞추고, 근처에 있는 부러진 검을 주워서 부목 대신 다리에 대고 묶었다.
목풍산의 몸을 대충 손본 독고무령은 가느다란 숨만 이어진 목풍산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웨엑!”
정신을 잃다시피 한 목풍산이 한 덩이 핏물을 게워냈다.
독고무령은 재빨리 목풍산의 가슴 부위를 두어 번 두들겼다.
목풍산의 목구멍에서 시커멓게 덩어리진 핏물이 밀려 나오는가 싶더니, 숨소리가 전보다 더 안정되게 흘러 나왔다.
그제야 독고무령은 품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내 침을 하나 꺼냈다.
그걸 보더니 구양소현이 다급히 말했다.
“대주, 설마 저번처럼…….”
백마방의 무사에게 손쓴 걸 떠올린 듯했다.
진사혁이 재빨리 구양소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누님, 저 사람은 본보의 사람이오. 비교할 걸 비교해야죠.”
“누가 그걸 몰라? 하지만 대주가 저번에도 저 침을 썼잖아!”
독고무령은 그녀의 말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목풍산의 가슴에 침을 꽂았다. 백마방의 무사에게 꽂았던 부위와 같은 곳이었다.
순간 목풍산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곧 힘겹게 눈꺼풀이 열렸다.
“나는 철풍검대의 독고무령이오. 정신이 드시오?”
“저…… 저는…….”
“시간이 없으니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시오.”
목풍산은 입을 달싹거리며 들릴 듯 말듯 말했다.
“놈들…… 지원군…… 갑자기 뒤에서…… 단주와 대주…… 이곳을 빠져 나가…….”
“혹시 저들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소?”
“그렇…… 지원군도…… 이대가 쫓던 자들…….”
“놈들은 어디로 갔소?”
“남쪽…….”
그 말을 끝으로 목풍산의 눈이 감겼다.
독고무령은 더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양소현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설마 저 사람, 죽인 건 아니지?”
진사혁이 재빨리 목풍산을 살펴보더니 구양소현에게 핀잔을 주었다.
“누님, 죽은 사람이 숨 쉬는 것 봤수?”
구양소현이 멋쩍은 표정으로 목풍산을 바라보았다.
“뭐, 그렇다면 미안하고…….”
독고무령은 그녀를 상대로 상황을 설명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일단 목 조장을 승화촌에 맡기고 단주와 일대주를 찾아봅시다.”
삼대가 승화촌으로 가기 위해 계곡을 나왔을 때였다. 한 사람이 삼대를 향해 뛰어왔다.
그를 본 독고무령의 눈이 번뜩였다. 달려오는 자는 밀호방의 십걸 중 셋째인 능인풍이란 자였다.
두어 사람이 나서서 능인풍을 막으려 하자 독고무령이 앞으로 나서며 제지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오.”
능인풍은 십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독고무령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독고무령은 능인풍의 뜻을 눈치 채고 빠르게 다가갔다.
코앞에 다가가자 능인풍이 나직이 인사했다.
“공자를 뵈오.”
“어쩐 일이오?”
“급전을 전하라 해서 공자를 찾아가던 중이었는데, 격전이 벌어진 바람에 이곳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내가 이곳에 올 줄 어떻게 알았소?”
“본방에는 긴급연락방법이 있습니다. 본래는 공자께서 평두 쪽에 계시다는 연락을 받고 방향을 틀려고 했는데, 공자께서 이곳으로 향했다 해서…….”
평두 쪽으로 내려간 것은 아침나절이다. 그 사이에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다니.
산서 전체에 정보원이 있다던 운양의 말이 헛말은 아닌 듯했다.
더구나 자신들의 움직임보다 더 빠른 연락망은 대단하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서신을 주시오.”
능인풍이 대나무통을 조심스럽게 열고는 서신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서신을 읽는 독고무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신에 자신의 예상을 더욱 확고하게 하는 정보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제왕성의 철혈전 고수들과 장로 셋이 남쪽으로 내려갔음. 무천련을 공격한 자들이 남쪽으로 이동했을 경우, 태행 남쪽의 문파가 공격당할지 모름. 즉시 조치 바람.]
독고무령은 서신을 비벼서 가루로 만들고는, 능인풍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했다.
“생존자를 한 사람 구했소. 최대한 빨리 이동해야 하니 그를 데려갈 수 없소. 사람을 보낼 때까지 그대가 저 사람을 승화촌에 데려다주고 보살펴 달라 해주시오.”
“알겠습니다, 공자.”
독고무령이 진사혁을 불렀다.
“사혁, 목 조장을 데려오게.”
* * *
독고무령은 목풍산을 능인풍에게 맡긴 후 곧장 동쪽으로 내달렸다.
사람들은 능인풍에 대해 궁금해 했다. 특히 구양소현이 눈을 빛내며 대답해주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운양의 조직에 대해 말해줄 수는 없는 일. 독고무령은 간단하게 ‘내가 아는 사람이오.’라고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워낙 굳어져 있다 보니, 누구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독고무령이 관초악과 관조운을 만난 것은 능정에 도착해서였다.
감시 임무를 띤 무천련의 무사가 먼저 독고무령 일행을 발견하고 숨어 있던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달려왔다.
일원궁의 무사였다. 여기저기 찢어진 옷이 붉게 물들어 있어서 얼마나 치열한 격전을 치렀는지 옷만 봐도 알 정도였다.
“독고무령 대주십니까?”
“그렇소. 단주는 어디 계시오?”
“따라오십시오.”
일원궁의 무사는 능정의 임시 분타로 사용하고 있는 작은 장원으로 삼대를 안내했다.
장원 안 분위기는 참상을 당한 집안마냥 깊게 가라앉아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몸을 돌보는 무사들의 얼굴은 어둡고 무거웠다.
독고무령이 삼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는데도 누구 하나 말을 걸지 않았다.
독고무령도 입을 열지 않고 곧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전각 앞에 서 있던 일원궁 무사가 독고무령을 제지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대주.”
하지만 독고무령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비켜! 시간 없으니까.”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일원궁의 무사들은 꼬리를 만 개처럼 뒤로 물러섰다.
그때 안에서 관조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여보내게.”
독고무령은 싸늘한 눈길로 무사들을 바라보고 걸음을 옮겼다.
전각 안에는 일곱 사람이 앉아 있었다.
관초악과 관조운, 그리고 무천련의 장로급 고수 다섯.
모두가 그늘진 표정이었다. 서너 명은 내상을 입은 듯 얼굴이 창백했다.
그런데 이대주 나호민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직 상황을 모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제왕성의 무사들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더 컸다. 이대가 쫓던 자들이 승화촌 계곡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말이다.
독고무령은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왜 이리 늦었나?”
정일청이 추궁하듯이 물었다. 마치 삼대가 늦어서 상황이 이렇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독고무령은 담담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연락을 받고 전력을 다해 산을 넘었지요. 그나마 샛길을 아는 사람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아직 도착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상황이 끝난 줄 알았다면 계속 적의 뒤를 쫓는 게 나았을 텐데…….”
정일청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독고무령을 쏘아보기만 했다.
그때 관초악이 물었다.
“적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들었네. 그런데 그들의 행동에서 뭐 걸리는 것이 있던가?”
적들을 쫓는 게 나았을 거라는 말에서 뭔가를 짐작한 듯했다.
“계곡에서 생존자를 만나 상황을 들었습니다. 놈들이 남쪽으로 내려갔다더군요.”
관초악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적들은 계곡을 통과해서 산을 넘으려 했었으니까.
“그런 것 같더군.”
“평두까지 쫓았던 자들도 남쪽으로 갔지요.”
“그들도?”
관조운이 눈을 크게 떴다. 얼굴이 창백한 걸 보니 제법 심한 내상을 입은 듯했다.
독고무령이 무심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한마디로, 우리가 쫓던 자들이 모두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말이지요. 왜 그들이 남쪽으로 갔을 거라고 보십니까?”
제일 먼저 관초악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곧 관조운이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남쪽에서 제왕성이 노릴만한 곳은 두 곳뿐이었다.
“설마 그들이……?”
“시간이 없습니다. 즉시 전궁산장과 화천문에 상황을 알려야만 합니다. 미리 대비한다면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정일청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들이 그곳을 칠 거라 보는 건가? 저들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네. 한 곳도 치기 힘들걸?”
“그들이 전부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백마방이 어떻게 당했는지 잊었습니까?”
운양이 보낸 서신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꼬치꼬치 캐물을지 모르니까.
다행히 관초악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급박한 상황을 깨달은 그는 관조운을 향해 명을 내렸다.
“조운, 즉시 서연으로 사람을 보내서 상황을 알려라.”
“예, 숙부.”
“그리고 움직일만한 자들을 모아라.”
관조운이 놀란 표정으로 관초악을 바라보았다.
“쫓을 생각이십니까?”
관초악의 눈이 독고무령을 향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독고무령은 바로 말하지 않았다.
그들을 쫓아가는 게 최선일까? 만일 놈들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그들의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서연을 지키는 게 나을지도…….’
하지만 누구도 자신의 말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본거지가 공격당할지 모르는데 누가 구경만 하려고 하겠는가.
당장 전궁산장과 화천문의 무사들이 펄쩍 뛸 게 분명하다. 자신 역시 철검보가 공격당한다면 당장 철검보로 달려갈 것이거늘, 어찌 다른 사람의 마음인들 그러지 않을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해야 될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소수 정예를 뽑은 후 수양에서 말을 구해 달리면 아주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라던 대답인 듯 관초악이 고개를 끄덕이며 둘러앉은 사람들을 재촉했다.
“들었소? 최대한 빨리 사람을 모으도록 하시오. 삼대주는 발 빠른 사람을 뽑아서 수양으로 보내게. 아무래도 우리가 직접 가는 것보다는 수양에서 말을 끌고 나오는 것이 빠를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