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86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86화
86화
아니라면 갑자기 남쪽을 향해서 빠르게 달려갈 이유가 없다.
왜? 왜 저들은 남쪽으로 향하는 것인가?
자신들이 추적하는 걸 알고 떨치기 위해서? 아니면 누군가를 지원하기 위해서?
아니다. 그게 아니다.
달려가는 자들의 기세가 변했다. 강한 살기마저 느껴질 정도.
‘어딘가를 공격하기 위해서 가는 건가?’
그럼 목표는?
순간, 한줄기 번개가 뇌리를 후려쳤다.
독고무령은 이를 지그시 악물고 전면을 노려보았다.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전유곤이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어떻게 할 거요, 대주?”
“놈들을 끝까지 쫓아가야겠소. 아무래도 움직임이 수상하오.”
여차하면 무리해서라도 공격할 작정이었다.
독고무령은 무심한 표정으로 답하고는 손짓으로 사람들을 불렀다.
그동안 조용하던 사공화정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단주의 지시를 기다려서 움직이는 게 낫지 않겠소, 대주?”
독고무령은 자세한 이야기를 피하고 단호하게 명을 내렸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소. 일단 전서구로 상황을 전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움직입시다.”
명이 떨어진 이상 불만이 있어도 따라야 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전유곤이 간단한 내용을 적어 마지막 남은 전서구를 날렸다.
독고무령은 전서구가 제 방향을 찾는 걸 보고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뒤쪽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멈추시오!”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날듯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일원궁의 복장을 한 무사였다.
독고무령은 출발을 늦추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단숨에 독고무령 앞까지 달려온 그는 헐떡이던 숨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후우……. 전서구를 보지 못했으면 찾지 못할 뻔했습니다. 저는 능정 임시 분타의 공청입니다. 서연에서 급보가 왔는데, 즉시 일대를 지원하라는 명입니다.”
“일대를?”
반문하는 독고무령의 눈빛이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남쪽으로 내려간 자들을 쫓으려 했다. 그런데 간발의 차이로 명령이 떨어졌다.
마음은 남쪽으로 향하지만, 자신의 짐작만 믿고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기에 일대를 지원하라는 명이 떨어졌는지 아시오?”
“일대가 승화촌에 머물고 있는 적을 발견해서 감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연에서도 삼백 무사가 출발했다고 했으니, 곧 적을 공격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독고무령의 눈빛이 깊이 침잠되었다.
적의 전력이 자신들이 쫓던 자들과 비슷하다면 삼백 무사와 일대로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대로 놔두고, 자신은 그냥 남쪽으로 간 자들을 쫓을까?
그런 생각이 들며 갈등이 일었다.
명을 따르기로 했으니 고민할 것도 없어야 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떨쳐지지 않았다.
그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저들이 아직까지도 승화촌에 머물고 있을까? 남쪽으로 내려간 자들에게만 따로 명령이 떨어진 걸까? 이대가 쫓는 자들은?
자신에게 판단하라면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절대 그럴 리 없다. 명령은 모두에게 내려졌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쯤 명령이 떨어져서 움직였을지도…….’
만약 이대가 쫓던 자들까지 움직였다면, 이대 역시 위험해질 것이 분명하다.
독고무령이 공청을 향해 빠르게 물었다.
“여기서 승화촌까지 얼마나 되오?”
공청이 허리를 숙이고 땅에 줄을 죽죽 그었다.
“지금 위치가 여기라면, 승화촌은 바로 여깁니다. 돌아간다면 칠십 리 정도 됩니다만, 산을 넘어간다면 사십 리 정도에 불과합니다.”
독고무령의 눈이 한무종을 향했다.
“한 형, 승화촌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소?”
“한번 넘어가 본 적이 있소.”
결정한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앞장서시오.”
제4장 핏빛 바람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고
휘이이잉!
삭풍이 먼지를 일으키며 휘몰아치는 아침 무렵.
언덕 위에 몸을 숨긴 관조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백오륙십 장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로 햇빛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잠에서 깨어난 마을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게 보인다.
언뜻 보면 일반적인 마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어제 낮까지만 해도 분명 그러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서부터 그곳은 일반 마을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제왕성의 무사들이 그곳에 둥지를 튼 것이다.
숫자는 삼백 정도.
조금 이상한 것은, 자신들의 추적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너무나 고요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수상해.’
그때 멀리서 다섯 필의 말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제왕성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말을 몰고 곧장 마을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고요함이 깨지고 마을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관조운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놈들이 움직이려고 하는군.’
관조운은 이를 지그시 악물고 승화촌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때, 배위당 대신 칠원기를 이끌고 있는 일원궁의 장로 정일청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공자, 본련의 무사들이 오고 있소이다.”
관조운도 거의 동시에 뒤에서 밀려오는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굴곡진 언덕을 올라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무천련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관조운의 눈이 커졌다. 뜻밖에도 관초악이 보인 것이다.
‘됐어!’
관조운의 표정이 밝아졌다. 관초악까지 왔다면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었다.
“현재 상황은?”
빠르게 다가온 관초악이 물었다.
관조운은 승화촌을 바라보며 나직이 대답했다.
“놈들이 움직이기 직전입니다.”
승화촌을 바라본 관초악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사들이 개미떼처럼 기어 나와 촌락의 남쪽에 모이고 있었다. 곧 이동할 것처럼.
‘남쪽으로 가려는 건가?’
아니라면 굳이 좁고 바위가 쌓인 남쪽의 황무지에 모일 이유가 없다.
“남쪽의 지형 중 놈들을 공격할 만한 곳이 있느냐?”
“오 리쯤 떨어진 곳에 작은 계곡이 있습니다. 만일 저들이 남쪽으로 간다면 필히 통과해야 할 곳입니다.”
“그래?”
설령 적들이 남쪽으로 가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자신들 역시 이동해야 할 상황이었다. 아직 이대와 삼대가 오지 않았지만, 그들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관초악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
“계곡 쪽으로 가자.”
“예, 단주.”
무천단과 무천련 무사들은 적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며 계곡 쪽으로 이동했다.
일각의 시간차를 두고 제왕성의 무사들도 촌락을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계곡은 관조운의 말대로 그리 길지도 깊지도 않았다.
길이는 이백여 장, 높이는 십오륙 장 정도였다.
하지만 양쪽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어서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은 지형이었다.
무천련의 무사들은 계곡 양쪽에 매복했다.
반각이 지나자 제왕성의 무사들이 계곡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관초악은 그들이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곧 제왕성 무사들의 꼬리가 입구를 통과했다.
“쳐라!”
관초악의 명령이 떨어지자, 삼백오십여 명의 무천련 무사들이 쏟아져 나오며 계곡의 입구와 출구를 막았다.
“적이다!”
“무천련 놈들이다! 그대로 뚫고 나가라!”
제왕성의 무사들 중 앞선 자들은 출구를 향해 달리고, 뒤처진 자들은 돌아서서 입구로 진입하는 자들을 막았다.
날벼락 같은 공격인데도 예상보다 침착한 대응이었다.
“별거 아닌 놈들이다! 놈들에게 제왕성의 위엄을 알려줘라!”
“철저히 방어하며 시간을 끌어라!”
“흥! 시간을 끈다고 별수 있을 줄 아느냐! 무천련의 형제들이여! 놈들의 피로 죽어간 동료들의 한을 갚자!”
순식간에 양쪽의 무사들이 얽혀들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리며 계곡 전체를 흔들었다.
무사들의 숫자는 비슷했다. 관건은 개개인의 전력 차였다.
관초악이 이끌고 온 무사들은 무천련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 큰 차이는 아니지만, 무천련의 전력이 앞선 상황이었다.
게다가 무천련의 무사들은 악에 받쳐 공격하고, 제왕성의 무사들은 양쪽이 막힌 채 방어하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은 무천련이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입구 쪽을 막고 있던 관조운은 세 명의 적을 쓰러뜨리고 형세를 살펴보았다.
분명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지나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불안했다.
‘너무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어.’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다. 고수가 제법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인 무위를 지닌 자도 없다. 제아무리 간덩이가 큰 자들이라 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그런데도 너무 침착하게 대항한다. 방어만 하고 있으면 된다는 듯.
관조운은 이를 악물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깊게 생각할 것 없어! 일단 놈들을 먼저 전멸시키고 보자!’
순간 강력하게 저항하던 자들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조소가 어린 눈빛.
분노가 솟구친 관조운은 차갑게 코웃음 쳤다.
“흥! 어디 죽고 나서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보자!”
“흐흐흐, 누가 죽는지는 두고 봐야겠지.”
관조운은 검과 하나가 되어 신형을 날렸다.
쾅!
검과 검이 부딪치며 굉음이 메아리쳤다.
관조운은 뒤로 훌쩍 물러나서 검을 고쳐 쥐었다. 자신과 일 검을 나눈 자가 주르륵 물러나서 몸을 세우는 게 보였다.
“네놈의 목숨은 반드시 내가 취해주마!”
관조운이 소리치며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상대의 입가에 어린 비릿한 조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글쎄. 가능할까?”
바로 그때, 뒤쪽에서 비명과 같은 외침이 들렸다.
“적이다! 적이 몰려온다!”
대경한 관조운은 뒤로 일 장을 물러서서, 홱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계곡 입구를 향해 밀려오는 무사들이 보였다. 제왕성 무사들이었다.
거꾸로 자신들이 협공을 당하는 상황.
관초악이 이끄는 전면은 몰라도 후면은 고립되기 직전이다.
‘빌어먹을! 이거였어!’
관조운은 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짜릿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천단 일대와 후면에 있는 자들은 뒤쪽의 적을 막아라!”
무천단 일대와 오십여 명의 무천련 무사들이 뒤쪽에서 밀려드는 자들을 막기 위해 돌아섰다.
밀려드는 자들의 숫자는 그들의 두 배에 이르렀다. 게다가 개개인의 무위 역시 그들에 비해 처지지 않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후면을 막고 무천련 무사들을 공격했다.
그 순간, 계곡 안에 있던 제왕성 무사들도 방어에서 공격으로 돌아섰다.
상황이 뒤바뀌어 이제는 자신들이 포위되었다.
“으아악!”
“개자식들! 함께 죽자!”
“놈들을 막아! 뚫리면 다 죽는다! 물러서지 마라!”
“크억!”
심신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비명이 쉴 새 없이 절벽을 타고 메아리 쳤다. 대부분이 무천련의 무사들 입에서 나오는 비명이었다.
관조운이 아무리 침착대범하다 해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공자! 아무래도 후퇴해야 할 것 같네!”
창백하게 질린 정일청이 소리쳤다.
벽계진도 안색이 흙빛으로 변한 채 악을 쓰듯 외쳤다.
“이대로 가면 모두 죽을 거요! 물러납시다!”
관조운은 밀려드는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입술을 다시 한번 깨물었다.
정녕 도망치듯 물러서야 한단 말인가!
참담했다. 분노에 피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그러나 상황은 그에게 머뭇거릴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무사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해선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관조운은 참담한 마음을 억누르고 명을 내렸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간다! 흩어지지 말고 뭉쳐서 포위망을 뚫어라!”
무천단 일대를 선두로 무천련의 무사들이 일제히 동쪽으로 달렸다.
멈칫거리면 여지없이 제왕성의 무사들이 달려들었다. 동료들의 몸에서 뿌려진 피가 몸을 적시고, 비명이 울리는데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제왕성의 무사들은 멧돼지를 몰듯 단 하나의 구멍만 남긴 채 그들을 몰아붙였다.
“놈들이 도망친다! 밀어붙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