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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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84화
84화
퍽!
뒤늦게 정신을 차린 구양소현이 남은 손을 휘둘러 진사혁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래도 진사혁은 히죽 웃으며 구양소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누님, 때려도 좋은데, 입은 좀 다물고 계쇼.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말입니다. 알았죠?”
구양소현이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진사혁은 구양소현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었다.
순간 구양소현이 다시 손을 휘둘러 진사혁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퍽!
“무거워 죽겠어. 빨리 안 비켜? 안 비키면 소리 지른다?”
진사혁은 몇 대 더 맞는 한이 있더라도 비키고 싶지 않았다.
푹신하고 따듯한 감촉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흐뭇한 웃음이 절로 나오는데 몇 대 맞는 게 대순가?
하지만 구양소현은 진짜로 소리를 지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아쉬워도 비켜주는 수밖에.
‘쩝, 좋았는데…….’
‘역시 떼어놓고 오는 것인데…….’
십여 장을 전진하던 독고무령은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송림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저들은 구양소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하긴 불길이 타오르면 자잘한 소리가 나는 법이다. 더구나 저들 중에는 부상자도 있을 터, 신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섞이다 보면 구양소현의 목소리 정도는 들리지도 않을 것이었다.
더구나 자신들이 뒤쫓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있는지 경비마저 허술해 보였다.
독고무령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송림을 향해 접근했다.
삼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접근하자 적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제왕성의 무사들이었다.
잡담을 나누는 소리, 나직한 웃음소리.
긴장이 풀린 듯 보였다.
독고무령은 좀 더 확실한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최대한 가까이 접근했다.
그러고는 적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자 근처의 나무 위로 신형을 날렸다.
모닥불 주위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닥불의 숫자는 열둘. 모닥불 하나에 열댓 명 정도가 앉아 있다. 대충 계산해 봐도 이백 명 가까운 인원.
‘생각보다 많군.’
검혼단과 도혼단의 무사들이 반 정도, 나머지 반은 다른 조직의 무사들인 듯했다.
개중에는 절정고수로 보이는 자도 십여 명이나 섞여 있었다. 특히 모닥불 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은 그들 중에서도 유난히 강하게 느껴졌다.
‘누구지?’
독고무령이 그들을 주시할 때였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더니, 그가 궁금해 하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독고무령은 청력을 집중하고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실처럼 가느다란 눈으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던 자가 팔목 두께의 나무를 모닥불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싹 쓸어버렸으면 간단한데 말이야. 왜 적의 세력이 반 정도 꺾이면 후퇴하라고 했는지 모르겠군.”
손에 들린 칡을 질겅거리며 씹던 자가 입 안에 든 것을 뱉어냈다. 그러고는 다시 칡을 뜯어 질겅거리며 대꾸했다.
“퉤, 군사께서 따로 생각이 있겠지. 솔직히 그보다는 놈들이 예상외로 강하다는 것이 더 마음에 걸리네. 특히 남쪽에서 우리 아이들을 막은 그놈들……. 끄응, 내가 직접 갔어야 하는데…….”
“흥, 그래봤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끝장낼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그럴 수야 있겠지. 하지만 단번에 끝내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거네.”
“어차피 전쟁이야. 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란 게 어디 있나?”
“나는 군사께서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승리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네.”
“제길,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지. 그런데 군사의 작전에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게. 내일이면 다른 명령이 떨어질 테니 그거나 신경 쓰세.”
“끄응, 성질대로 할 수도 없고……. 뭐가 무서워서 승부를 자꾸 미루는지…….”
눈이 가느다란 자가 앓는 소리를 하자, 칡을 씹던 자가 불길에 눈을 둔 채 입을 열었다.
“글쎄……. 정확히는 몰라도, 군사께서 뭔가를 기다리시는 것 같더군.”
“기다린다고? 뭘? 누구를?”
“그건 정확히 모르겠네. 그게 사람인지, 아니면 시간인지조차 말이야.”
“사람이라면…… 누굴 기다리는 거지? 누군데 본성의 숙원을 이루는 일에 영향을 미치는 거지?”
“짐작이 가는 곳이 있긴 한데…… 확실치 않으니 말하기가 그렇군. 다만 군사가 신경 쓰는 걸로 봐서 성주님의 명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네.”
“제길! 답답하군. 짐작 가는 거라도 말해보게.”
칡을 씹던 자가 입 안에 든 칡을 뱉어내고 눈이 실처럼 가느다란 자에게 바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그 후로는 청력을 돋우어도 두 사람의 이야기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두 사람의 말을 음미해 보았다.
막연한 예측이 사실로 드러났다. 저들은 한 번에 승부를 내려하지 않고 있다.
단순히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만은 아닌 듯했다.
저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코 개인은 아닐 것이다. 개인이라면 결정 낼 수 있는 싸움을 늦추면서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다.
그럼 단체라는 말.
거기까지 생각하던 독고무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배후……?’
그게 사실이라면 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냥 끝낼 수 있는데도 물러서면서까지 그들을 기다릴 이유가 뭘까?
‘만일 배후와 알력이 생겼다면……?’
억측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제왕성은 커질 대로 커졌다. 천하 어디에 내놓아도 눌리지 않을 정도로.
오죽하면 강호인들이 천하팔패의 하나로 꼽겠는가!
만일 정말로 배후가 있다면, 그들의 마음에 제왕성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반대로 제왕성의 입장에서 보면, 피해가 클 경우 그들에게 다시 속박될지 모른다는 점이 우려될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그럭저럭 아귀가 맞아 들어간다.
‘배후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이 급선무일 것 같군.’
문제는, 배후에 대해 아는 사람이 극소수라는 것이었다.
‘훗, 내 예측이 사실이라면, 무천련으로선 정체도 알 수 없는 배후에게 고마워해야 할 판이군.’
어이없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만일 미지의 배후가 아니었다면 제왕성은 오늘 끝장을 봤을 게 분명했다.
물론 나중에 더 큰 시련이 닥칠지 모르지만, 당장은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독고무령은 몸을 날려서 그곳을 벗어났다.
어찌나 은밀하고 빠른지, 유령이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그때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꺅!”
비명의 주인은 구양소현이었다.
한쪽 구석에서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자세를 낮추고 있는데, 들쥐 한 마리가 풀숲에서 기어 나와 배 밑으로 들어온 것이다.
진사혁이 또다시 그녀를 덮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비명이 어둠 속에 울려 퍼진 후였다.
숲에서 십여 장을 벗어나던 독고무령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서 뒤돌아다보았다.
한가하게 오가던 경비무사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무슨 소리지?”
“비명 같은데?”
곧 숲 안에서 누군가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봐! 거기 두 사람, 가서 확인해봐!”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경비무사들 두 명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독고무령은 자세를 낮추고서 빠르게 나아갔다.
순식간에 이십여 장을 이동한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마른 갈대를 한 뼘 크기로 꺾었다.
경비무사들은 앞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소리가 나는 곳만 신경 쓰며 곧장 다가왔다.
그들이 이 장 앞을 지나간 순간, 독고무령의 손에 들린 갈대가 어둠을 갈랐다.
슈슉!
강한 공력이 실린 갈대는 화살보다 더 강력하고 빨랐다.
갈대 두 개가 정확히 경비무사의 얼굴 옆에 있는 이문혈(耳門穴)에 꽂혔다.
미처 자각할 새도 없이 꽂힌 것이어서 경비무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비틀거리다가 꼬꾸라졌다.
독고무령은 꼬꾸라지는 두 경비무사를 재빨리 붙잡아서 소리 나지 않게 눕혀 놓았다.
다행히 숲 쪽에서는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듯했다.
독고무령은 풀숲을 통과해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은 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무사히 돌아오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구양소현만은 머쓱한 표정으로 딴 곳에 시선을 두었다.
진사혁이 마치 자신의 일인 양 나섰다.
“어…… 누님이 꼭 잘못한 게 아니라 쥐새끼가 갑자기 가슴 속으로 들어가서…….”
뭘 잘한 게 있다고 구양소현이 슬쩍 끼어들었다.
“내가 언제 가슴 속에 들어갔다고 했…….”
그러다 독고무령이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자 자라처럼 머리를 쏙 집어넣었다.
그때 숲 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아직 확인하지 않았나? 이봐!”
사혈에 갈대가 꽂혀 죽은 자들이 대답할 리 없었다.
수상하다 생각했는지 급박한 목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아무래도 수상하다! 모두 날 따라와!”
“뒤져 봐라!”
멀리서 언뜻 봐도 사오십 명의 무사들이 숲 속에서 쏟아져 나온다.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나직이 명을 내렸다.
“즉시 수하들을 이끌고 이백 장 뒤로 물러나시오.”
철검기와 전궁기, 포원기의 일반무사들이 먼저 뒤로 빠졌다.
돌아서려던 진사혁은 독고무령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저들을 잠시 지체시킬 생각이네.”
“그럼 나도 남겠네.”
돌아섰던 전유곤과 사공화정과 한무종도 멈춰 섰다.
독고무령은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한 사람의 비명만 들었네. 사람이 많은 걸 알면 모두가 몰려나올 테니 지금은 사람이 많아서 좋을 게 없어.”
독고무령의 말이 일리 있다 생각했는지 진사혁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뭐 그렇다면…….”
독고무령은 곧바로 몸을 돌리고는, 다가오는 제왕성의 무사들을 향해 전진했다. 어느새 적들이 삼십여 장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조심하게.>
진사혁은 전음으로 짧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가 너무 쉽게 돌아서자 전유곤이 속삭이듯 물었다.
“괜찮겠소?”
진사혁은 별 걱정 다한다는 투로 나직이 대답했다.
“혼자 전부 죽이겠다고 하지만 않으면 뭐……. 갑시다.”
그러고는 몸을 잔뜩 숙인 채 풀숲을 헤치고 뒤로 후퇴했다.
독고무령은 작정하고 검을 뽑아들었다.
어둠과 풀숲을 이용해 은밀하게 다가간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적을 향해 손을 썼다.
“허억!”
“조심해라! 적이 숨어 있다!”
“끄윽!”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독고무령의 모습은 마치 유령이 움직이는 듯했다.
소리 없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휘두르는 그의 검에 대여섯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적은 한 놈이다! 포위해서 상대해!”
누군가가 소리쳤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그들이 포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붙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좌우로 흐르면서 적의 심장을 취하고 목을 갈랐다.
잠깐 사이 제왕성 무사 십여 명이 쓰러졌다.
그제야 숲 안에서 기다리던 자들이 여유를 잃고 모조리 풀숲으로 달려 나왔다.
실처럼 눈이 가느다란 중년인이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놈이 숨지 못하게 풀을 모두 베어라!”
백수십 명이 한꺼번에 달려 나오며 사람 키만큼 자란 풀을 베어냈다.
촤촤촤촥! 촤아아아아!
마른풀들이 베어지는 소리가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 같았다.
독고무령은 뒤로 몸을 날리며 자신의 뒤쪽을 막고 있는 무사 셋을 단숨에 베어 넘겼다.
“놈이다!”
“조심해!”
여기저기서 경악에 찬 고함과 함께 수십 명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독고무령은 도주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싸우기 편한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뒤로 물러선 것일 뿐.
일 대 이백의 결전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누구나 공포심을 느끼게 마련이다.
더구나 옆에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대항조차 못하고 죽어나간다면, 도저히 적을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 공포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지금 제왕성 무사들이 그랬다.
적이 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기에 더 두려웠다.
차라리 적이 많다면 좌충우돌하며 싸우느라 공포를 느낄 겨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은 달랑 한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에게 삼십여 명이 죽어갔다. 단 반각 만에.
독고무령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 그놈이다! 철검보의 사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