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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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75화
75화
또다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독고무령은 입술가로 흐르는 피를 다시 한번 쓱 닦아내고는, 관천악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저는…… 세 번째 비무를 하지 않겠습니다, 대련주.”
뜻밖의 선언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관천악도 뜻밖인지 이마를 찌푸린 채 물었다.
“이유가 뭐냐? 부상 때문이더냐?”
“부상도 부상입니다만, 이유야 어쨌든 사욕을 가지고 출전해서 무천련의 사기를 손상시켰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생각입니다.”
백마방의 사기가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여차하면 철검보와 한바탕하겠다는 사람마저 있는 상태다.
그러니 무천련 전체로 봤을 때, 사기를 손상시켰다는 말만큼은 사실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백마방을 달래야 할 상황에 처한 관천악으로선 독고무령의 선언을 반겨야 할 판이었다.
“으음, 그대의 마음이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감사합니다.”
이차전 출전을 포기한 독고무령은 곧바로 몸을 돌려서 비무대를 내려갔다.
독고무령이 내려가는 비무대 아래쪽이 쫙 갈라졌다.
단순한 승자가 아니다. 무천련 최강 중 한 사람이라는 서문태강을 꺾은 사람이다.
무천단의 단주?
그딴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군웅들은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넓게 길을 만들어주었다.
화산의 용암이 그 사이를 흐르는 듯 뜨거운 열기가 후끈하니 달아올랐다.
* * *
“정말 굉장했어요, 숙부!”
구양소현은 마치 자신이 싸운 것처럼 얼굴이 벌게져 소리쳤다.
구양손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구양소현을 바라보았다.
‘그가 강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서문태강마저 꺾다니…….’
그 자리에서 자신에 대한 일을 말했다고 했다.
군웅들은 ‘과연 인의철검!’이라고 하며 자신을 칭송했다고 한다.
가슴이 떨렸다. 너무 떨리고 좋아서 벌떡 일어나 달려가고 싶을 정도였다.
‘흐흐흐, 좌우간 사람 하나는 제대로 골랐어.’
그때 구양소현이 갑자기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조장도, 아니 이제 대주지. 좌우간 대주도 부상이 상당히 큰가 봐요. 이차전을 포기했어요.”
그럴 수밖에. 상대가 누군가. 백마방의 주인인 서문태강 아닌가?
그 정도로 그친 것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래, 비무는 계속 진행되고 있느냐?”
“일단은 한쪽에서만 해요. 한쪽은 많이 부서져서 지금 고치고 있어요.”
* * *
독고무령은 일단 내상을 핑계대고 별원의 방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어차피 이차전에 출전하지 않으니 누구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진사혁이 염려되는지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상대도 상대 나름이었다. 그런 고수를 이기려면 내상을 각오해야만 했다. 게다가 입술가로 피가 흐르는 것을 봤지 않은가 말이다.
그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몸은 괜찮은가?”
“음, 심하진 않지만, 바로 운기해서 내력을 바로잡아야 할 것 같네.”
그런데 그런 말 하는 사람치고 너무 태연하다.
진사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독고무령을 살폈다.
하지만 서문태강을 이기고도 내상을 입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
진사혁은 그러려니 하고는 넌지시 물었다.
“출전하지 않는다고 비무장에 안 나오는 건 아니겠지?”
“일단 몸을 좀 추스르고 나가보겠네.”
그제야 진사혁의 얼굴이 펴졌다.
“하하, 뭐 자네가 없어도 잘 할 수는 있는데, 기왕이면 자네가 있어야 더 힘이 날 것 같아서 말이야.”
독고무령은 조용히 웃었다.
진사혁도 긴장이 되는가 보다. 나중에 나온 자들도 그렇고, 자격만으로 삼차전에 올라간 사람들이 모두 강한 자들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자네가 비무할 때까지 운기를 마치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 할 것 같군.”
네가 빨리 가야 내가 빨리 낫는다는 말.
은근한 축객령이었다.
진사혁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흠, 알겠네. 그럼, 조심해서 몸을 추스르게. 나 먼저 비무장으로 가볼 테니까.”
진사혁이 환한 표정으로 나간 후에야 독고무령은 눈을 감았다. 그저 운기행공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서문태강과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펼친 일수의 변화를!
그것은 결코 자신이 익힌 수법이나 장법 등이 아니었다. 일만 가지 변화를 포용한다는 백수만타의 어디에도 없는 변화였다.
그는 그 정체불명의 초식이 어디에서 나온 변화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진가철방의 암각화! 수천제마 구겁무!
그곳에서 본 남자의 춤, 그리고 아홉 개의 손짓.
그중 하나였다.
그렇게 노력해도 떠오르지 않던 손짓이 무의식중에 펼쳐지다니.
뒤도 안 돌아보고 방으로 돌아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잊히기 전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번 펼친 이상 다시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돼. 그래야 위지천백에게 한 발 다가설 수 있어!’
암각화의 춤은 아홉 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중 이제 겨우 하나를 얻을 기회가 왔다.
놓칠 수 없었다.
작은 파편이 모여 하나가 되고,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면서 발전하는 법이다.
시작이 있으면 언젠가는 끝도 볼 수 있겠지.
독고무령은 눈을 감고 모든 의식을 망아의 상태로 돌렸다. 그러고는 오직 하나, 당시 자신의 손만 떠올렸다.
안개가 너울지며 태산을 타넘듯 뻗어나가는 손에서 무수한 변화가 일어난다. 너무 많은 변화로 인해 변화가 없는 듯 보일 정도다.
만변(萬變)은 무변(無變)이라.
만 가지 변화가 일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했던가.
그런데 암각화에 그려진 남자의 손짓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곧 모든 변화가 하나로 돌아가 무변으로 화한다.
자생만변(自生萬變)이 무변귀일(無變歸一)이라고나 할까?
그럼 만변이 무변보다 먼저인가?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둘을 따로 나눠야 할 이유가 있을까?
독고무령은 무의식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스으으…….
찰나였다. 머릿속에서 자신의 손동작이 그대로 떠올랐다.
괴이한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무 것도 없는 안개 속에서 일수를 내지른 것 같았는데, 갑자기 뭔가가 눈앞에 가득 찼다.
그것은 귀령처럼 보이기도 하고, 수라귀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마치 필생의 적을 만난 것처럼 너울거리며 달려들었다.
독고무령은 무의식 상태에서도 달려드는 괴이한 환영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순간! 휘저어진 손에서 영롱한 광채가 솟구쳤다.
너무나 아름답고 휘황한 빛을 발하는 광채였다.
“아아아!”
독고무령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광채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다.
광채가 뻗어나가는 변화!
그것이 암각화의 미묘한 실선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탄성이 아연한 신음으로 바뀌었다.
“으음…….”
광채가 스친 곳마다 괴이한 환영들이 갈가리 찢겨지며 비명을 지른다. 목이 잘리고, 팔다리가 잘리고, 몸뚱이가 통째로 잘린 후 먼지처럼 스러진다.
마치 지옥이 펼쳐진 것처럼 참담한 광경!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정말 저게 자신이 펼친 일수로 인한 결과일까?
독고무령은 몸을 부르르 떨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그 바람에 계속될 것 같던 광경이 다시 안개로 뒤덮여버렸다.
‘이런!’
안타까움에 전력으로 마음을 비웠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한번 사라진 그 광경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쉬웠다. 이제 겨우 실마리를 잡았거늘 사라져 버리다니.
그렇다고 언제까지 아쉬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독고무령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아쉬움을 털어냈다.
그러고는 좋은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래, 이제 하나 생각해 냈잖아? 곧 나머지도 떠오를 거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눈을 감은 채 슬며시 좌수를 뻗어보았다. 수많은 암각화의 실선을 떠올리면서.
너울거리는 변화가 이는가 싶더니, 영롱한 광채가 희미하게 손을 감싸고 휘돌며 앞으로 뻗쳤다.
뻗어나간 광채가 스러진 순간.
스스스스…….
여덟 자 앞에 있던 탁자 위 찻잔이 먼지처럼 변한 채 무너져 내렸다.
“마, 맙소사…….”
독고무령은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인데도 스스로가 놀라버렸다.
물론 다른 무공으로도 찻잔을 가루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내력을 의식하지 않고 행할 수는 없었다.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후, 십성의 내력으로 펼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면서, 조금 전에 머릿속에 그려졌던 광경이 떠올랐다.
절로 이가 악물렸다. 참담한 광경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한 힘을 얻었다는 것, 이제 목적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목적이 제왕성의 멸망이든, 아니면 그 무엇이든.
‘어떻게든 나머지를 얻는다! 반드시!’
* * *
독고무령이 다시 대연무장으로 돌아간 것은 한 시진 반이 지나서였다.
그가 철풍검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대원들이 살짝 고개를 숙여 그를 반겼다.
적수등을 비롯한 철풍검대의 조장들도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독고무령을 대주로서 확실하게 인정한다는 듯.
그들 모두가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어찌 아니 그럴까. 자신들의 대주가 백마방의 방주를 꺾었거늘!
그때 옆으로 다가온 석도명이 담담히 웃으며 물었다.
“괜찮소, 대주?”
“견딜 만합니다.”
진사혁이 넌지시 상황을 알려주었다.
“이제 다 끝났네. 저 친구는 운이 좋아서 한번 이기고 올라가는군.”
“모두 몇 명이 올라갔지?”
진사혁이 장난처럼 되물었다.
“이차전에 출전도 않는 사람이 그건 왜 물어?”
“들어가서 운기나 더해야겠군.”
진사혁이 재빨리 손을 뻗어 독고무령의 소매를 붙잡았다.
“하, 하. 그 친구도 참 성질 급하긴…….”
진사혁은 너스레를 떨며 이차 비무에 올라간 사람들을 말해주었다.
“이차전에 올라간 사람은 모두 스물넷이네. 생각보다 많지는 않은 것 같네.”
그때 진사혁의 말대로, 단 한 번만 이기고 이차전에 올라간 사람이 어깨를 펴고 환한 얼굴로 비무대를 내려왔다.
뒤이어 전곡상이 곧바로 이차전을 시작한다며 소리쳤다.
“이차전에 출전할 무사들은 미리미리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진사혁의 순서는 두 번째였다.
진사혁은 독고무령을 향해 씩 웃고는 붕 떠서 비무대로 올라갔다.
쿵!
마치 곰 한 마리가 내려선 듯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전곡상은 그런 진사혁을 흘겨보았다.
부서진 곳이 이제 겨우 수리가 끝나가는 판이었다. 또 부서지면 밤까지 비무를 진행해야 할지 모르는 일.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물론 진사혁은 그의 마음을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씩 웃어 보인 그가 곤을 빼들었다. 빨리하자는 듯.
전곡상도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철검보의 진사혁 대 화천문의 동수양! 시작하시오!”
진사혁은 전곡상이 외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진가의 신법인 구전질풍보(九轉疾風步)였는데, 마치 산에서 반쯤 미친 곰이 굴러 내려가는 듯했다.
진사혁의 상대인 동수양은 화천문의 양천당주였는데, 그도 상당히 덩치가 컸다.
눈을 치켜뜬 그는 별 미친놈 다 본다는 표정으로 마주 달려들었다.
군웅들이 볼 때는 둘 다 비슷했다.
“이겨라! 젊은 곰!”
“그놈의 몽둥이를 부러뜨려라, 멧돼지!”
진사혁이 먼저 곤을 휘둘렀다.
“차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