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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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02화
102화
“맞소만, 그대는 누군데 이리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오?”
독고무령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팔목을 툭 찼다.
썩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듯 팔목이 똑 부러지자, 곡부귀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크읍!”
“묻는 것은 나다. 그대는 질문에 대답만 하면 돼. 다시 묻지. 그대는 정주부사와 무슨 관계지?”
“아무 관계도…… 아니오.”
“관계가 없다? 정주부사와 관계도 없는 자가 백운서원에서 칠 년 이상 원주자리를 맡아왔단 말이지?”
곡부귀의 눈알이 빠르게 굴렀다.
“그거야…… 백운서원이 워낙 몰락한 곳이어서, 부사가 그냥 아무에게나 맡긴 것일 뿐…… 끄아아악!”
대충 둘러대던 곡부귀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졌다.
독고무령은 곡부귀의 부러진 팔목을 밟아 으스러뜨리고는, 여전히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팔목을 으스러뜨려도 실실 웃던 자가 있었지. 하지만 그도 결국은 죽여 달라고 애원하며 모든 것을 다 말했다. 시간이 길어지면 그대가 고통을 겪는 시간도 그만큼 길어지지. 선택은 그대가 알아서 하라.”
곡부귀는 덜덜 떨리는 턱에 힘을 주고 독고무령을 올려다봤다.
사람의 팔을 으스러뜨리고도 눈빛 한 점 변화가 없다.
지옥야차의 표정이 저럴까?
곡부귀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공포심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대, 대체 왜…….”
“오늘 오전에 한 사람이 무풍객잔에서 죽었다. 알고 있나?”
순간적으로 곡부귀의 눈이 흔들렸다.
독고무령은 굳이 더 묻지 않고 말을 이었다. 으스러진 팔목을 밟고 있는 발에 서서히 힘을 주면서.
“왜 그를 죽였지?”
“끄으……. 내, 내가…… 죽이지 않았…… 소.”
“그럼 누가 죽였지?”
곡부귀가 잠시 망설였다. 순간 독고무령의 발이 팔목 위쪽으로 옮겨졌다. 동시에 멀쩡하던 팔꿈치가 또다시 으스러졌다.
우두둑.
곡부귀는 몸을 들썩거리며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끄어어어…….”
“내 충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군.”
자신이 알고 있을 거라 확신을 가진 질문. 아니라고 해봐야 자신의 고통만 더 심해질 뿐이다.
그렇게 생각한 곡부귀는 사력을 다해 한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동초광. 그가…… 죽였소.”
“동초광은 그대의 수하인가?”
“아니오…….”
“그럼 누구지? 제왕성의 사람인가?”
곡부귀의 눈빛이 파도 위의 가랑잎처럼 출렁였다.
저자가 모르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아낸 걸까?
그는 으스러진 팔의 고통보다도 그것이 더 두려웠다.
그가 대답을 못하자, 독고무령의 발이 어깨 쪽으로 향했다.
곡부귀의 입이 그 자신의 의지와 달리 다급하게 열렸다.
“그, 그렇소.”
“어디에 속해 있지.”
말해선 안 될 비밀을 말한 이상, 하나를 말하나 둘을 말하나 마찬가지. 곡부귀는 모든 것을 단념하고 순순히 불었다.
“그는…… 멸사당(滅邪堂) 사람…….”
“그대도 멸사당에 속해있나?”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곡부귀는 힘들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나는…… 추전당(追傳堂)에 속해 있소.”
멸사당이라면 비화당, 은향당과 더불어 제왕성 내삼당(內三堂) 중 하나다. 잠입과 살행이 주 임무인 단체.
반면 추전당은 외육당(外六堂) 중 하나. 동초광이 멸사당 사람이라면, 추전당 사람인 곡부귀 정도가 부릴 수 없다.
“그가 무풍객잔에 있는 자를 왜 죽였지? 그가 뭘 알고 있었던 거지?”
“그, 그가…… 도망친 자를…… 찾아내…….”
독고무령의 눈 깊은 곳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도망친 자의 이름은?”
“조, 조병탁.”
“동초광은 지금 어디 있지?”
“개, 개봉으로 갔…….”
조병탁이란 자를 쫓아간 듯하다.
“정확한 위치를 말해봐라.”
“추월루요.”
독고무령이 곡부귀의 방을 나온 것은 일각가량이 더 지나서였다.
그는 곡부귀가 한 말을 듣고서야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혈겁이 벌어진 다음 들어온 학사들. 그들은 대부분 남조경이 들여보낸 자들이었다.
그들은 백운서원에 머물며 유하령과 소악귀를 찾고, 하남 무림에 대한 정보도 모았다. 만에 하나 천자무서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그에 대한 대처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그들은 유하령과 소악귀 찾는 일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고, 오직 하남 무림의 상황만 살피며 정기적으로 보고를 했다.
그런데 유하령이 사라진 지 팔 년이 다 되었거늘, 누군가가 그녀에 대해서 수소문하는 것이 아닌가.
신경이 쓰인 그들은 일단 밀호방의 수하가 움직이는 것을 그대로 놔두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밀호방의 수하가 자신들의 손에서 빠져나간 학사를 찾아냈다.
그 사실을 안 그들은 밀호방 수하를 심문해서 학사가 사는 곳을 알아낸 후 죽여 버렸다.
‘개봉으로 가봐야겠군.’
동초광이란 자가 그곳으로 간 이상, 마지막 남은 학사도 이미 죽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가서 확인은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운이 좋으면 살았을 수도 있으니까.
그가 마당으로 나가자, 한무종을 비롯한 세 사람이 다가왔다.
“단주, 학사들과 하인들, 모두 제압했습니다.”
“대항한 자는 없었소?”
“다섯이 대항했는데, 대항한 자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이미 그들이 제왕성의 무사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일의 전말에 대한 것도 곡부귀의 입을 통해 다 들은 상황. 죽였다 해도 아쉬울 건 없었다.
독고무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학사들이 제압되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혈도가 제압되어 누워있는 자는 모두 여섯.
독고무령이 그들에게 물었다.
“어느 분이 이곳에 온 지 가장 오래되었소?”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중년학사가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려움에 질렸을 법한데도 목소리는 거의 떨리지 않았다.
“내가 제일 오래되었소이다.”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사 년 되었소이다.”
사 년이라면 곡부귀와 함께 들어온 사람은 아니라는 말.
독고무령은 다른 학사들을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
“그 전에 들어온 사람은 없소?”
“없소이다. 나보다 먼저 왔던 학사들은 모두 떠나거나 죽어서…….”
학사들의 표정을 보니 거짓은 아닌 듯하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만일 곡부귀와 함께 들어온 자가 있다면 만약을 생각해서 죽이려 했거늘, 불필요한 살인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귀하는 원주와 죽은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소?”
“잘…… 모르고 있소이다. 그냥 학문보다 엉뚱한 일에 더 관심이 많은 정도로만……. 나라에서 임명한 사람이니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냈소이다.”
“동초광이라는 사람을 아시오?”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동 학사는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았소이다.”
동초광은 학사가 아니라 제왕성의 무사다. 그런데도 서슴없이 동 학사라 부르는 걸 보니 중년학사는 그들의 정체를 정말 모르는 듯했다.
“원래 그들은 산서 무림세력의 간자들이었소. 해서 우리가 제거한 것이오. 앞으로의 일은 귀하들이 알아서 하시오. 이곳을 떠나든, 남든 상관하지 않겠소.”
중년학사의 얼굴에 비감이 떠올랐다.
“세상이 수상하고 나라가 어지러운 때외다. 명운서원은 시류에 영합한 자들만이 우글거려 썩은 내가 진동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 해도 우리를 받아들일 곳이 있을까 싶소이다. 우리가 이곳에 있었던 것은, 그나마 원주가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소이다. 오늘 일로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차라리 이곳에 남아 학문이나 연구하면서 지낼 생각이외다. 설마 무림협사들이 힘없는 학사들을 무조건 죽이지는 않을 것 아니겠소이까?”
힘은 없을지 몰라도 눈빛만큼은 형형하다.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다.
의외였다. 몰락한 백운서원에 얹혀살고 있어서 별 볼 일 없는 학사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귀하의 이름이 어떻게 되오?”
“방호민이라 하외다.”
독고무령은 학사들의 혈도를 모두 풀어주었다.
그리고 한무종 등에게 시신을 정원 구석에 묻도록 지시한 후, 자신은 서고로 향했다.
* * *
서고는 유백하에게 들었던 대로, 낡은 건물 곳곳에 빗물이 스며든 자국이 보였다. 심한 곳은 부풀어 올라서 손만 대면 무너질 것처럼 보이는 곳조차 있었다.
독고무령은 곰팡이 냄새가 풀풀 나는 서고로 들어가 걸음을 옮겼다.
빛 한 점 없이 어두웠지만, 그의 눈을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동쪽 벽에 도착한 독고무령은 벽을 유심히 살폈다.
얼마 살피지 않아서 조금 밝은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팔 년 가까이 넘게 흐르며 색이 변색되긴 했지만,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넓이는 가로세로 두 자 정도.
독고무령은 손으로 그 부분을 쓸어 만지면서, 손가락으로 벽을 두들겨 보았다.
퍽, 퍽, 퍽……. 텅.
곧 회벽을 두드릴 때와는 조금 다르게 둔탁한 금속성 소리가 들렸다.
독고무령은 그 부분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회칠한 벽이 반죽한 찰흙처럼 깎이면서 깊게 파이더니, 세 치 깊이에서 누런 동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백하가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 석 장의 얇은 동판이었다.
독고무령은 동판을 꺼내서 흙을 털어냈다.
동판은 단순한 동으로 만든 것이 아닌 듯, 어둠 속에서도 황금빛에 가까운 노란빛이 흘러나왔다.
조금 두터운 종잇장 두께에 크기는 가로세로 여섯 치 정도.
동판의 양쪽에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쌀알만 한 글씨가 어찌나 정교한지 새긴 사람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자는 각 면마다 백 자 내외. 모두 합해서 육백 자 정도였다.
그 대부분이 천자무서와 비슷할 정도로 난해한 문구였다.
‘태백산인께서 남긴 선도의 법문인가?’
독고무령은 안력을 돋우고 동판의 글씨를 대충 읽어보았다.
그런데 두 장을 넘기고, 석 장째 마지막 세 줄을 남겨놓았을 때였다.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럼 이게…….”
[스승님의 가르침으로 얻은 바를 육신과 함께 사멸(死滅)시키려 했으나, 인간의 간사한 마음이 버릴 수 없게 하는구나. 어차피 태천일심을 얻지 못한 자라면 얻어도 소용이 없음이니, 인연은 하늘에 맡기고 평생 얻은 세 가지 공법(功法)을 남기노라…….]
태천일심을 알고 스승을 논할 자 누구던가.
승천무조 단목승 외에 누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랬다. 동판은 승천무조 단목승이 평생의 심득을 적어놓은 것이었다.
그것도 태천일심의 기운을 직접 이용할 수 있는 심득을!
가슴이 뛰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고막까지 울렸다.
동판은 천자무서의 겉장에서 나온 것. 그런 만큼 천자무서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했었다.
그러나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천자무서는 무공비급이라기보다 선도술이 적힌 경전에 가까웠다. 태천일심도 일반무공의 내공심법과는 전혀 달랐다.
그저 욕심이라면, 자신의 미진한 부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단서라도 있었으면, 하는 정도였을 뿐.
그런데 기대 이상이었다.
설마하니 승천무조 단목승이 태천일심의 기운을 응용할 수 있는 무공 구결을 남겨놓았을 줄이야!
‘어르신……!’
-허허허, 내 선물이 마음에 드느냐?
유백하가 어둠속에서 묻는 듯하다.
‘예, 마음에 듭니다.’
독고무령은 마음으로 답하며 동판을 바라보았다.
동판에 적힌 글의 내용은 천자무서나 다름없이 선문답과도 같았다.
하지만 천자무서의 해독을 곁에서 지켜보았고, 그 내용을 익혀서 지금은 태천일심의 기운을 주먹 이상의 크기로 키운 그가 아니던가.
시간이 문제일 뿐, 하나하나 해독하다보면 결국 답이 나올 것이었다.
독고무령은 동판을 가죽주머니 안에 갈무리하고 서고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