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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99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1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99화

 

99화

 

 

 

 

 

 

[보의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타서 제대로 남은 건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보의 안팎에서 삼백 사십여 구의 시신을 찾아…….

 

보주님의 생사에 대해선 누구도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자는 그날 뒤늦게 몇 사람이 보를 빠져나갔다며, 그 사람들 중 보주가 있을지 모른다고도 하는데…….

 

제왕성은 더 이상 본보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합니다. 조심스럽게 평정 일대를 둘러보았는데, 제왕성의 정보원으로 보이는 자가 없었습니다.

 

나머지 일을 처리하는 즉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독고무령은 제왕성의 정보원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도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태원으로 가서 운양과 장이생 가족도 만나고 싶었지만, 백천산의 계곡을 떠나지 않고 연락만 취했다.

 

자신의 모습을 아는 제왕성의 무사들이 많아진 이상 언제 어디서 누가 자신을 알아볼지 모르는 일. 자칫 제왕성의 정보망에 걸려들기라도 하면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일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었다.

 

독고무령은 모든 아쉬움을 마음 한편에 처박고 힘을 키우는 일에만 집중했다.

 

제왕성과 싸우려면 더 강해져야 한다.

 

게다가 정체불명의 적마저 있는 상황이다.

 

그는 무천단과 철검보의 무사들을 주어진 시간 안에 더욱 강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무천단과 철검보의 모든 무사들은 독고무령의 뜻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들은 제왕성을 생각하며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수련했다.

 

구양손과 구양진을 비롯한 철검보의 장로들도 자신들의 모든 것을 수하들에게 내놓고 수련을 독려했다.

 

복수!

 

피의 대가를 받으려면 지금보다 몇 배 더 강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 * *

 

 

 

모두가 합심하여 수련에 전념한 지 한 달이 지났다. 

 

흘린 땀만큼 무천단과 철검보 무사들의 무위가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와중에 철검보에서 살아남은 무사들이 하나둘 합류했다. 대부분은 철검보의 무사들이었지만, 간혹 전궁산장의 무사들도 있었고, 무천련에 속했던 자들도 있었다.

 

그즈음, 산서를 휩쓸던 핏빛 바람도 완전히 가라앉았다. 일원궁을 공격할지 모른다 생각했는데, 그 일조차도 벌어지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암암리에 구양은과 원로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일반 무사들에 대한 것뿐, 어디에서도 구양은과 원로들에 대한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더 보낸 독고무령은 마침내 백천산을 나가서 운양을 만나보기로 했다.

 

당장 산서가 조용해졌다고 해서 세상이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더 큰 바람이 불어올지도 몰랐다.

 

산서를 통째로 쓸어버릴 광풍이!

 

제왕성과 정체불명의 배후세력이 주역이 되어서 말이다.

 

그 전에 준비할 것이 있었다.

 

시기를 놓치면 손을 써보지도 못한 채 광풍에 휘말릴지도 모르는 일. 그것은 절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한 독고무령은 진사혁을 불렀다.

 

“밖으로 나가서 운양을 만나보고 두어 가지 일을 처리할 생각이네. 자넨 남아서 내 대신 철검기를 좀 맡아주게.”

 

“설마 혼자 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한 형과 감 형, 도 형을 데리고 갈 생각이네. 정주를 갔다 올 생각인데, 강호를 많이 돌아다녀본 사람들이니 적잖은 도움이 될 거라 보네.”

 

시간이 있을 때 유백하가 남긴 석 장의 동판도 찾아볼 작정이었다.

 

동판은 천자무서에 나온 것. 그 안에서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줄 뭔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예상 외로 진사혁은 별다른 불만 없이 독고무령의 말에 따라주었다. 위태하게 보일 정도로 미친 듯이 스스로를 닦달하는 구양소현 때문이었다.

 

“뭐 그렇게 하지. 조심해서 다녀오게. 나는 누님을 좀 지켜봐야겠어.”

 

“아마 열흘에서 보름 정도 걸릴 것 같네. 너무 구양소현에게만 신경 쓰지 말고, 자네도 열심히 수련해서 관천뇌곤의 중육식을 완성해놓게. 그래야 내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진사혁도 약한 것은 아니다. 그의 나이 또래에서 적수를 찾자면, 산서를 통틀어도 겨우 한 손을 채울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적들 중에는 진사혁보다 더 강한 자가 부지기수였다.

 

하다못해 제왕성의 장로들만 해도 진사혁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언제 그들을 만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 독고무령은 닦달을 해서라도 진사혁을 강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진사혁도 독고무령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 문제는 주어진 시간이었다.

 

삼 년을 매달리고도 팔성 수준에 이른 것을 보름 안에 완성하라고?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

 

‘보름은 너무 짧은데……. 석 달은 줘야지.’

 

하지만 못한다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한번 해보지 뭐.”

 

“대충하지 말고, 꼭 해야 하네.”

 

“알았다니까? 까짓 거, 죽기 살기로 하면 될 거 아냐. 걱정 말고 갔다 오라고. 자네를 실망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독고무령은 퉁퉁거리듯 말하는 진사혁을 보고는 조용히 웃음 지었다.

 

‘그때쯤 되면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하나 완성할 수 있을 거네.’

 

 

 

진사혁이 방을 나가자, 독고무령은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는 보따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매듭을 풀었다.

 

철검보의 표식이 있는 옷을 입고 태원에 갈 수는 없는 일.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마침 그에게는 한번도 입지 않은 새 옷이 있었다. 수선해놓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옷, 소설향이 만들어준 옷이.

 

그는 철검보의 무복을 벗고 그 옷으로 갈아입었다.

 

부드러운 감촉에 무심하던 표정이 절로 펴졌다.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알아보실지 모르겠군.’

 

검을 허리띠에 꽂은 독고무령은 방을 나섰다.

 

일단 전유곤과 사공화정, 구양손을 만난 그는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논의했다.

 

전유곤이 잘 되었다는 듯 말했다.

 

“나도 전궁산장에 다녀올까 하오. 대주가 올 때까지 돌아오도록 하겠소.”

 

사공화정도 가족들의 상황이 궁금한 듯했다.

 

“저 역시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대주.”

 

가족에게 일이 생겼다면 오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막을 수도 없는 일. 독고무령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좋소. 단 보름 안에 돌아와 주시오.”

 

그러고는 구양손을 향해 당부했다.

 

“돌아올 때쯤이면 우리가 머물만한 곳이 마련될 겁니다. 그때까지는 수련에 모든 것을 집중해주십시오.”

 

“걱정 말고 다녀오게나.”

 

길어야 보름이다. 혼신을 다한 수련으로 땀을 흘리다 보면 지루할 틈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날 즈음, 진사혁이 한무종과 감가기, 도일성을 찾아서 데려왔다.

 

한무종과 감가기는 무덤덤했지만, 도일성은 드디어 답답한 계곡을 벗어나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일각. 독고무령은 세 사람을 대동한 채 백천산의 계곡을 나섰다.

 

철검보가 불타오른 지 한 달 열흘이 되던 날이었다.

 

 

 

* * *

 

 

 

태원은 무천련에 휘몰아친 혈풍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씁쓸했지만 그게 세상이었다.

 

한쪽에서는 수백 명이 죽어가고, 한쪽에서는 희희낙락하며 술잔을 부딪치는 곳.

 

세상은 아픔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마음을 따로 알아주지 않는다.

 

고통과 환희는 종이의 앞장과 뒷장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은 같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그것은 상황이 달라지면 언제든 변화한다. 고통이 환희로, 환희가 고통으로. 하거늘 다를 것이 뭐란 말인가.

 

‘세상을 원망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저들은 저들의 삶이 있어 저렇게 사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의 삶이 있어 이렇게 사는 것뿐이니까.’

 

 

 

독고무령은 한무종 등을 객잔에 머물게 하고 혼자서 운가고서점으로 갔다.

 

운가고서점으로 들어가자 운양이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

 

“오랜만이군.”

 

“고생한 줄 알았더니 얼굴만 좋아졌잖아?”

 

“부러우면 자네가 산속에서 살게. 이곳은 내가 대신 맡아주지.”

 

“훗, 농담하는 걸 보니 그래도 정신에 이상은 없는 것 같군.”

 

운양이 피식 웃고는 문을 걸어 잠갔다.

 

“장 어르신에게 먼저 가봐야겠지?”

 

독고무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한마디 더했다.

 

“돗자리를 깔아도 되겠군.”

 

운양은 힐끔 독고무령을 흘겨보았다.

 

“얼굴만 좋아진 줄 알았더니, 말도 늘었군.”

 

그리고 이유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조금 더 편안해졌다.

 

운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핏빛 폭풍우를 헤치고 돌아온 독고무령이다. 

 

들은 대로라면 독고무령의 손에 죽은 자만 백 명이 넘는다 했다.

 

당연히 가슴에 시퍼렇게 날이 선 칼 한 자루가 들어섰을 거라 생각했거늘, 그게 아닌 것 같다.

 

‘감정조차 다스려지는 경지에 오른 건가?’

 

그럼 대체 얼마나 강한 걸까?’

 

운양은 어깨를 후드득 떨고 몸을 돌렸다.

 

‘내가 괴물을 친구로 둔 것 같군.’

 

 

 

* * *

 

 

 

장이생의 얼굴은 전보다 조금도 나아진 게 없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모든 것을 초탈한 것처럼 맑았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불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나야 잘 지내고 있다만, 네가 고생이구나.”

 

“별 말씀을…….”

 

그때 옆에 있던 장유유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운양 오빠에게 들었어요. 제왕성 무사들이 아수라처럼 무서워한다면서요?”

 

“입이 싼 운양의 말은 믿지 마라. 나처럼 생긴 아수라가 어디 있단 말이냐?”

 

운양이 독고무령을 째려보았다.

 

장유유는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장이생도 조용히 미소를 베어 물고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그래, 철검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함께 지낸다고? 마음이 아플 텐데, 잘 견디고 있나 보구나.”

 

“예.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들도 마음이 안정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도와줄 일은 없느냐?”

 

“비록 산속이지만, 간간이 사냥도 하고 사람들을 내보내 생필품을 보급하고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그래도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라. 내 비록 이곳에 있지만, 그래도 돈은 아직 제법 있단다. 어려워하지 말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내가 고맙지. 허허허…….”

 

오랜만에 독고무령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니 즐거운 듯했다.

 

그러나 장이생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창백하게 변해갔다. 마음과 달리 몸이 견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독고무령은 손을 내밀어서 장이생의 손을 잡았다.

 

“억지로 운기하려 하지 마시고, 그냥 제가 이끄는 대로 놔두십시오.”

 

단전을 다쳤으니 운기하려고 해봐야 고통만 심해질 뿐이다. 하기에 독고무령은 미리 주의를 주고 나서 맥문을 통해 내력을 집어넣었다.

 

다행히 꾸준하게 치료를 받아서인지 혈맥의 손상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독고무령의 진기가 부드러운 바람처럼 장이생의 혈맥을 어루만지며 흘렀다.

 

전이었다면 충격을 줘서 자칫 혈맥의 상황을 악화시켰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백천산에서의 수련으로 태천일심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지라 혈맥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이 각.

 

장이생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몸도 편해졌는지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보였다.

 

독고무령은 일각가량 더 진기를 돌리고 가만히 손을 떼었다.

 

장이생은 그 사이 잠이 들어 있었다. 독고무령은 모르지만, 장이생은 어느 때보다 편안한 잠을 자는 중이었다.

 

옆에 말없이 앉아 있던 소설향의 얼굴에 처음으로 밝은 웃음이 보인다.

 

독고무령은 가만히 잠든 장이생을 바라보고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푹 주무시고 나면 조금 나으실 겁니다.”

 

소설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고 하고 싶은데 행여나 울먹이는 소리가 나올까봐 조심스러웠다.

 

대신 그녀는 고개를 살짝 틀고 화제를 돌렸다.

 

“무령아, 그 옷,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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