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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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97화
97화
후우웅!
대기를 짓누르는 가공할 압력!
구양은은 이를 악물고 마주 검을 뻗었다.
그의 검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진 순간!
콰앙!
굉음이 일며 구양은의 몸이 뒤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황자악 또한 이 장가량 밀려나서 검을 치켜들었다.
중심을 잡은 구양은이 노성을 내지르며 검을 뻗었다.
“흥!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이놈!”
줄기줄기 뻗어나가는 검세에 어둠이 갈기갈기 찢어지자, 황자악도 신중한 표정으로 대항했다.
“제법이구나, 구양은! 하지만 죽는 것은 결국 네놈이 될 것이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접전이 사오 초가량 이어질 때다.
입구 쪽을 막고 있던 자들 서너 명을 도륙한 독고무령이 땅을 박차고 신형을 날렸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흑의인들이 구양은의 등 뒤로 접근하는 것이 보인 것이다.
“보주! 물러서십시오!”
구양은도 등 뒤의 상황을 느꼈는지, 황자악의 공세와 정면으로 부딪치고는 그 반탄력을 이용해서 재빨리 한쪽으로 물러났다.
순간 단숨에 십여 장의 거리를 좁힌 독고무령이 황자악을 향해 검을 뻗었다.
독고무령의 검첨에서 벼락 한 줄기가 번쩍였다.
쿠구궁!
귀청을 울리는 둔중한 굉음!
“크읍…….”
나직한 신음과 함께 황자악의 몸이 뒤로 튕겨졌다.
한순간 멈칫했던 독고무령은 바닥을 차고 재차 쇄도했다.
동시에 좌우에서 세 명의 흑의인이 독고무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네놈들은 내가 상대해주마!”
구양은이 흑의인들을 가로막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 사이 독고무령은 빙글 몸을 돌리며 검으로 땅을 찍었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일장가량 튀어 오르더니, 황자악을 향해 더욱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중심을 잡은 황자악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이십 대로 보이는 자가 자신을 물러서게 하다니. 더구나 신음까지 내뱉지 않았는가!
불신이 분노로 화했다.
하지만 그에겐 분노를 터트릴 시간도 없었다. 날아드는 상대와의 거리가 이 장이나 되는데도 살이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너 따위가 감히!”
분노한 그는 자신의 검에 전 공력을 쏟아 넣고 독고무령의 검에 마주쳐갔다.
찰나, 독고무령의 검첨에서 뇌음이 일었다.
태천일심법의 기운이 실린 뇌정진천세!
우르릉!
일수유의 순간, 독고무령과 황자악의 검세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광! 쩌저적!
태천일심법의 기운이 황자악의 검에 실린 기운을 소멸시키고는, 황자악의 내력과 충돌했다.
“크윽!”
뒤로 주르륵 물러난 황자악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신음과 함께 악 다물린 잇새로 흘러나오는 핏물.
황자악의 핏발 선 눈이 흔들렸다.
그는 핏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입을 열지도 못한 채 오직 독고무령만 노려보았다.
‘이, 이런 개 같은 일이……!’
독고무령은 서너 걸음 물러선 다음 검을 치켜들었다.
연이어 적을 물리치며 적지 않은 충격을 입은 상태였지만, 몸을 다스릴 시간조차 없었다.
철검원에 들어와 있는 흑의인들은 수십 명이나 되었다.
철검보의 장로와 호법 십여 명이 막고는 있지만, 그들을 모두 막기에는 역부족인 상황. 서너 명이 난전 속에서 빠져나와 독고무령의 등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을 노린 소리 없는 공세!
숱한 수련의 반복이 없으면 불가능한 합공이다.
독고무령은 훌쩍 위로 솟구치며 흑의인들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그때 밖에서 최악의 상황을 알리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왕성 놈들이다!”
“뭐야! 제왕성?”
“죽음으로써 놈들을 막아라!”
“으하하하! 이놈들! 내가 바로 은창산이다! 얼마든지 와라! 내 시신을 밟지 않고는 절대 지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은창산의 분기에 찬 목소리가 울린다.
엎친 데 덮친 격. 제왕성 무사들마저 쳐들어왔다는 소리는 철검보 무사들의 실낱같던 희망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독고무령은 몸을 뒤집으며 세 명의 흑의인 중 하나의 심장을 뚫어버렸다.
푹!
그러고는 구양은에게 소리쳤다.
“보주! 제왕성까지 왔습니다. 일단 물러나시지요!”
하지만 구양은은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곳은 우리에게 맡기고 빠져나가게! 어서!”
독고무령은 남은 두 명의 흑의인을 몰아붙여 단숨에 고혼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그 사이, 또 다른 자들이 밀물처럼 철검원으로 밀려들어왔다.
독고무령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제왕성의 무사들마저 왔다면 무천단 삼대는 물론이고, 그들이 보호하고 있는 구양가의 가족들도 위험할지 몰랐다.
설령 무사히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분명 추적하려는 자들이 있을 터. 그들의 추적을 끊어야 했다.
독고무령은 허공에서 방향을 틀고 사선으로 미끄러졌다.
그 와중에도 마지막으로 구양은의 각오를 흔들었다.
“보주! 삼대가 가족들을 대피시켰을 것입니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빠져나가십시오!”
문득 구양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느껴졌다.
비감에 찬 웃음. 철검보와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의지에 찬 표정이었다.
곧 구양은의 노호성이 철검원을 울렸다.
“와라! 이제부터 철검보의 진정한 검을 보여주마!”
적의 습격이 있은 지 반시진. 제왕성마저 공격에 가세한 지 이 각이 지났다.
사방에서 치솟던 불길이 점점 커지며 철검보를 통째로 휘감았다.
넘실거리는 불빛에 반사되어 더욱 붉게 보이는 핏물.
여기저기 널린 시신들.
철검보가 곧 지옥이었다.
건물 안에 있던 시신이 타들어가는 지 연기 속에선 살타는 노린내가 진동한다.
그 와중에도 서로의 심장을 가르고 목을 베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드는 사람들.
모두가 극에 달한 광기에 젖어 있다.
상대의 몸에서 뿜어지는 핏물이 얼굴을 적시는데도 하얗게 웃으며 검을 내지르고 도를 휘두른다.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과 고함은 불길에 잡아먹혀 들리지 않는다.
결국, 달도 겁에 질려 구름 속으로 숨어버리고, 광란하는 불길만이 통곡하며 지상에서 솟구쳤다.
* * *
무천단 삼대의 인솔로 철검보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서남쪽으로 이동했다.
인원은 삼대까지 합쳐 백오십 명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그중 구양가의 직계가족은 이십여 명 정도였고, 일반가솔이 삼십여 명, 철검보의 무사들이 칠십여 명이었다.
언덕 위에 오른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가족들의, 동료들의 뼈와 살을 태우며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불길은 십 리 떨어진 곳에서도 환하게 보일 만큼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강호에 내맡겨진 삶이라 하나, 말로만 들어왔던 거와 직접 당한 것과는 천양지차의 심정이었다.
목숨을 칼날 앞에 내맡기고 사는 무사들조차 공포에 질릴 상황. 평범한 아녀자들은 혼이 달아날 정도의 충격에 휩싸여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고 장원을 빠져나왔다.
그러던 차에 불길이 솟구치는 철검보를 보니 울음부터 터져 나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간간이 흘러나오던 흐느낌이 점점 커졌다.
구양소현조차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울먹였다.
“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피눈물이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흘러내렸다.
가족들과 동료들이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들이 도망칠 길을 열어주던 그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저 안에 있던 사람 중 어느 정도나 빠져나갔을까?
그러나 언제까지 무너지는 철검보를 보며 울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구양손은 이를 악물고 소리쳐 철검보의 사람들을 다그쳤다.
“여기서 다 죽을 셈이냐! 우리가 저기서 죽지 않고 왜 여기에 있는지 잊었느냐? 그만 울고 가자!”
진사혁이 구양소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대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누님. 적이 언제 올지 모르니 그만 갑시다.”
“오빠들이…… 동생들이 죽었어! 그들을 놔두고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어! 나도 가서 싸우다가 죽고 싶어!”
진사혁이 구양소현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럼, 놈들이 얼씨구나 좋아할 거요. 그러고 싶어요?”
구양소현은 눈물이 한가득한 눈으로 진사혁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요! 복수를 해야죠! 그러려고 나온 거잖습니까?”
“도망치면…… 여길 떠나면…… 복수할 수 있을까?”
진사혁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령이를 믿으쇼. 무령이가 절대 저들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구양소현은 덜덜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철검보 무사의 등에 업혀 있는 아버지가 보인다. 어머니는 그 옆에서 눈물만 짓고 있다.
그래도 자신은 나았다. 부모님이 목숨이라도 건졌으니까.
하지만 뒤쪽에 늘어선 사람들 중 몇몇은 부모마저 불구덩이가 된 철검보에 남겨 놓고 혼자 빠져나와야 했다.
심지어 백부인 구양은과 숙부인 구양학 그리고 숙조부 등 원로들마저 적을 막기 위해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분들의 가족들 마음은 어떻겠는가.
아마 볼을 타고 흐르는 피눈물은 눈이 아니라 가슴에서 흘러나온 것일 터였다.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참고 있다.
저들은 아는 것이다.
당장 적과 싸우다 죽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걸.
피에는 피로. 복수만이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용설이 나직이 말했다.
“그대는 가족이라도 살았지. 나는 모두 죽었다. 오직 나이어린 동생과 나만 남고. 대주를 만났다는 걸 행운으로 알아. 대주가 아니었으면 모두 죽었을 테니까.”
구양소현은 고개를 돌려 용설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을 보고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분노도 슬픔도 없는 눈빛이다. 먼 과거를 떠올리는 듯, 불타오르는 철검보를 바라보는 것 같은데도 시선은 허공에 걸려 있다.
한 서린 눈빛.
구양소현은 처음으로 보는 용설의 그런 모습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과거가 있었던가? 그래서 그동안 차갑게 행동했나?
구양소현은 이를 악물고 진사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알았어. 가.”
* * *
독고무령은 이십여 명이 담을 넘어 쫓아오는 걸 보고 선두에 있는 자부터 하나하나 처리했다.
열일곱 명째 적이 죽자 뒤따라오던 자들이 멈칫했다.
살인의 광기에 물든 그들조차 두려움이라는 괴물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사, 사신이다! 저놈은 대풍장에서 봤던 그자야!”
제왕성의 무사 하나가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은룡산장의 무사들은 사신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똑같이 몸을 떨었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베어내는 독고무령의 냉혹한 손속에 이미 수십 명이 죽어나간 것이다.
사신!
그랬다. 눈앞에 있는 자는 이제 그들에게도 사신이었다.
독고무령은 더 이상 추적해오는 자가 없는 걸 확인하고, 곧바로 약속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와르르릉!
뒤에서 불길에 휩싸였던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안개처럼 사방을 뒤덮은 연기에서 살점이 타는 노린내가 풍기는 듯했다.
독고무령은 결코 뒤돌아다보지 않았다.
또 하나의 둥지가 무너졌다.
그리고 오늘로써 제왕성이 산서에 뜬 단 하나의 태양이 되었다.
강호의 누가 그것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세상에는 태양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편에는 끝 모를 어둠이 존재한다.
태양의 빛조차 빨아들일 어둠, 암천(暗天)이!
‘위지천백,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독고무령은 철검보의 불길을 등진 채, 땅을 박차고 암천의 하늘로 뛰어들었다.
언제고 암천의 하늘이 열리는 날, 태양은 숨을 죽이고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이다.
그날을 위해, 그는 철검보를 등지고 서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