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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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96화
96화
관초악이 일원궁의 무사들과 함께 거처에서 나오는 게 보인다. 독고무령은 그에게 다가가며 담담히 말을 건넸다.
“일원궁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관초악은 착잡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야기하지. 아무래도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안 되겠네. 형님도 사경을 헤매는 상태고……. 해서 돌아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장로들과 상의해볼 생각이네.”
“그럼 무천단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관초악이 쓰디 쓴 땡감을 베어 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만들어지자마자 이 모양이 되어버렸네. 자네도 앞으로는 무천단에 얽매일 필요가 없네.”
“해체라도 하겠단 말입니까?”
“그리 생각해도 무방하네.”
“너무 무책임한 말씀이군요. 저는 조금 다른 생각입니다만.”
“무슨 말인가?”
“비록 소수지만, 힘을 정비한다면 나름대로 제왕성에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힘을 스스로 해체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관초악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지금 인원만으로 제왕성을 상대할 수 있다고 보나?”
“항상 이 인원이란 보장은 없지요.”
“본궁은 물론이고 화천문과 전궁산장마저 떠나가는 판이네. 보충할 인원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기껏해야 이삼십? 훗,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네.”
“무리라…….”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관초악을 똑바로 바라본 채 나직이 물었다.
“일 푼도 안 되는 확률에 목숨을 던져본 적 있습니까? 저는 던져 보았습니다만.”
“…….”
관초악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독고무령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아주 양호한 상황입니다. 정 그런 생각이시라면 아예 단주직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시지요.”
관초악은 물끄러미 독고무령을 보더니, 품속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패(牌) 하나를 꺼냈다.
금으로 감싸진 벽옥에 ‘무천(武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패였다.
뒤에는 오대세력 주인들이 직접 쓴 이름이 파여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무천단주의 상징인 무천패였다.
“그럼 나는 단을 이렇게 만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네. 원한다면 단주의 자리를 자네에게 넘기지.”
독고무령은 관초악을 무심히 바라보며 손을 뻗어 무천패를 건네받았다.
관초악은 무천패를 건네준 후 곧바로 몸을 돌렸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내 먼저 가겠네. 다음에 보세.”
정일청을 비롯한 일원궁의 무사들 중 일부가 조소를 띤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며 스쳐지나갔다.
“잘해보게.”
“팔면 술값은 두둑이 나오겠군.”
그들의 눈에는 독고무령이 유명무실해진 무천단주의 자리를 욕심내는 것처럼 보인 듯했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가 관초악을 만나러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관초악에게서 무천패를 얻는 것.
자신이 왜 무천패를 얻으려 했는지 알았다면 과연 관초악이 줬을까?
돌아서는 그의 입가로 차디 찬 미소가 번졌다.
‘일단 명분은 얻었군.’
이제 위지천백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을 하나 얻었다.
독고무령은 그걸로 만족했다.
* * *
사람들이 빠져나간 철검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밤이 되어서만은 아니었다.
화천문과 전궁산장의 무사들이 있을 때만 해도 빈 그림자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빠져나가자 유난히 텅 빈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빈자리가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철검보의 사람들은 무거운 마음을 억지로 다스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사위가 어둠에 짓눌린 시각.
무사 수백 명이 지옥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들처럼 철검보를 향해 묵묵히 전진했다. 은룡산장의 무사들이었다.
밀호방의 정보원이 그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들이 철검보의 오 리 이내에 들어선 뒤였다.
정보원은 자신이 가서 알린다 해도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현청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현청의 입구에는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그 누각 안에는 현령에게 소를 올릴 때 쓰는 북이 하나 걸려 있었다.
비록 현령이 바뀐 일 년 동안 거의 쓰지 않아서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고리로 잠가놓은 누각 안에 북이 있을지 몰랐다.
정보원은 누각 위로 올라가 문고리를 잡아 뜯었다. 생각대로 북은 누각 안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북채를 찾아들었다. 그러고는 누각의 문을 활짝 열고 북을 빠르게 두들겼다.
둥! 둥! 둥! 둥! 둥……!
철검보를 향해 빠르게 다가가던 은룡산장의 무사들은 갑작스런 북소리에 흠칫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욕설을 내뱉었다.
“어떤 미친놈이 이 밤중에 북을 치는 거지?”
“제기랄! 안 되겠다! 철검보 놈들이 북소리에 깨기 전에 친다! 가자!”
그 시각, 독고무령은 자신의 방에 앉아 태천일심법에 따라 기운을 다스리고 있었다.
북소리가 들린 것은, 세 번에 걸쳐 운기를 한 그가 천천히 눈을 뜰 즈음이었다.
둥, 둥, 둥…….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눈을 반쯤 뜬 채 북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빠르게 울리는 북소리. 너무 빨라서 누가 장난처럼 쳐대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다.
동시에 전신으로 밀려드는 미묘한 한기!
독고무령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사혁, 모두 깨워라!”
이미 북소리에 반쯤 잠이 깨어있던 터다.
와중에 독고무령의 목소리가 들리자, 진사혁뿐만이 아니라 방에서 자던 자들이 일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진사혁이 방에서 다급히 나오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무령?”
전유곤과 사공화정도 곧 뒤따라 나왔다.
“적이오, 단주?”
전유곤이 묻는 사이 철풍검대의 무사들이 무기를 들고 방에서 나왔다.
독고무령은 북녘 하늘을 보며 빠르게 명을 내렸다.
“그렇소. 사혁은 구조와 함께 수경원으로 가고, 전 기주와 사공 기주는 철검원의 후원으로 가시오! 적 조장과 석 조장께선 대원들을 이끌고 노약자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확보하시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즉시 사람들을 데리고 빠져나가도록!”
명이 떨어지자 철풍검대와 삼대의 무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곧 그들의 목소리가 철검보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적이 오고 있소! 모두 일어나시오!”
“일어나라! 무기를 들고 나와!”
갑작스런 소란에 철검보가 들썩였다.
“뭐야? 제왕성이 쳐들어 온 거야?”
“적이라고? 어디야?”
언제 제왕성의 공격이 있을지 몰라 모두가 긴장하고 있던 상황. 철검보의 무사들은 무기를 쥐고 득달같이 방에서 뛰어나왔다.
독고무령은 무사들이 모두 깨어나자 즉시 지붕 위로 올라가 상황을 살펴보았다.
바로 그때 외곽에서 비명과 고함이 들려왔다.
“으악!”
“크어억!”
“적의 습격이다!”
독고무령은 즉시 신형을 날려 싸움이 벌어진 곳으로 향했다.
어둠속의 적은 강하고 잔혹했다.
미리 사람들이 깨어나 대항하는데도 적들은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철검보 안으로 날아들었다.
흑의를 입은 사백여 명의 무사들. 그들은 추호의 인정도 남기지 않고 손을 썼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베어버렸다.
“으아악!”
“살려줘! 아악!”
“개자식들! 어린아이를 죽이다니! 천벌을 받을 놈들!”
비명이 어둠을 뒤흔들고, 처절한 악다구니가 암천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곧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았다.
말살(抹殺)! 징벌(懲罰)!
적은 단순히 철검보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우현에서 당한 복수를 하기 위해, 무너진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 왔다.
말살이라는 방식으로!
적들의 뜻을 짐작한 독고무령은 힘없는 일반식솔들이 머무는 수경원으로 향하는 적들 앞을 가로막았다.
“사혁! 사람들을 피신시켜라!”
그 사이 진사혁이 철풍구조와 함께 수경원으로 들어갔다.
당랑거철(螳螂拒轍)처럼 보인 듯 독고무령을 향해 두 명의 흑의인이 달려들었다.
조소를 지은 채, 단숨에 죽일 것처럼!
독고무령은 마주 달려들며 일검에 목을 베고, 일수에 적의 심장을 터트렸다.
“네놈이 감히!”
생각지도 못한 듯, 무너지는 자들의 뒤에 있던 자들이 노성을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그때부터 독고무령의 검이 어둠을 장악했다.
그의 검이 번쩍일 때마다, 번갯불 같은 손 그림자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피가 튀고 뼈가 부러졌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대여섯 명이 쓰러졌다.
적들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단호한 손속.
흑의인들은 멈칫거리며 신중하게 접근했다.
그러나 독고무령은 멈추지 않고 안개 속을 휘젓는 한 줄기 바람처럼 적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서걱!
우두둑! 콰직!
어둠속에서 파륙음과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기괴하게 울렸다.
그렇게 대여섯 명이 더 쓰러지자, 스멀거리는 공포가 흑의인들의 뇌리를 잠식했다.
“무, 물러서라!”
“포위해서 상대해!”
퍽!
독고무령은 탈월인으로 흑의인 하나의 심장을 터트리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한곳의 기세를 꺾었다지만, 다른 곳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최악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무위의 격차가 너무나 컸다.
숫자는 비슷한데 적은 수백의 무사들이 모두 일류 이상의 고수들이었다.
그나마 미리 깨어나서 대비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속수무책으로 순식간에 당했을 것이다.
독고무령은 상황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렵게 흐르자, 철검보를 포기하더라도 사람을 먼저 구하기로 작정했다.
지금쯤이면 수경원의 사람들이 피신했을 것이다. 나머지는 삼대에게 맡기면 될 터. 독고무령은 지체 없이 신형을 날려,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철검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구양은이 장로와 호법들과 함께 적이 철검원의 내원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독고무령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격전지로 뛰어들며 검을 뻗었다.
가공할 압력을 느낀 흑의인 하나가 몸을 억지로 틀며 검을 치켜들었지만, 그가 막기에는 독고무령의 검세가 너무 강했다.
쩡!
독고무령의 검은 상대의 검날을 부러뜨리고 목에 구멍을 내버렸다.
“끄어…….”
“이놈!”
옆에 있던 자가 노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독고무령은 슬쩍 옆으로 흐르며 상대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움찔한 흑의인이 몸을 비튼 순간, 독고무령은 상대의 칼을 어깨 위로 흘리고는, 좌수로 상대의 심장을 터트렸다.
쾅!
입을 쩍 벌린 흑의인은 붕 떠서 이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독고무령은 순식간에 두 명의 흑의인을 제압하고는, 십여 장 떨어져 있는 구양은을 바라보았다.
“보주! 제가 맡을 테니 일단 뒤로 물러나시지요!”
구양은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어둠을 찌를 때마다 줄기줄기 뿜어지는 검기가 어둠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의 강력한 검세에 합공하던 자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서자, 여유를 얻은 구양은이 빠르게 대답했다.
“물러날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여기서 이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 거네! 자네에게 부탁 하나 하지! 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이곳을 빠져나가게!”
그러고는 검을 높게 쳐들었다.
“이놈들! 내가 바로 구양은이다! 철검보를 모욕하려면 내 시신을 밟아야만 할 것이니라!”
바로 그때, 지붕 위에서 한 사람이 솟구쳤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사방으로 뻗은 한 마리 사자와 같은 중년인이었다.
은룡산장 노태군의 셋째 아들, 황자악이 바로 그였다.
그가 손에 들린 검을 쳐들자, 검첨에서 뿜어지는 시퍼런 검강에 달빛이 갈라졌다.
달빛을 가른 그는 구양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며 냉랭히 소리쳤다.
“구양은! 철검보는 오늘로 사라질 것이다! 어리석은 몸부림 그만하고 이제 죽어라!”
소리친 황자악은 검을 들어 아래로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