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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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94화
94화
“이곳은 무사한 것 같아 다행이군요.”
“자네에 대한 말은 많이 들었지. 후우, 좌우간 잘 왔네.”
독고무령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제왕성 무사들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 없습니까?”
은창산은 얼굴을 굳히며 눈을 크게 떴다.
“몰랐나?”
밀호방의 정보원에게 들은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 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상태. 독고무령은 일단 아무 것도 모른 척하며 물었다.
“전궁산장에서 놈들과 부딪친 후, 영원까지 쫓았는데, 놈들이 방향을 틀어서 다시 올라왔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습니까?”
은창산은 독고무령에게서 눈을 떼고 관초악과 관조운 등 무천단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일원궁이 놈들에게 당했네.”
관초악과 관조운의 눈이 동시에 홉떠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말 그대로요. 어제 새벽에 일원궁이 놈들에게 공격당했다고 하오. 그리고 어제 저녁 무렵 대련주께서 놈들을 쫓아갔는데, 적의 수장과 싸우다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이 들어왔소.”
“뭐요? 아버님이!”
관조운이 이를 악물고 은창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은창산도 들은 것 이상 아는 바가 없었다.
“본보에서도 일백여 명의 지원무사를 보냈소만…… 거의 다 죽고 이십여 명만 겨우 돌아왔다고 하오.”
일원궁이 당했다는 말은 이미 들어서 별 다를 것도 없었다.
하지만 관천악이 적의 뒤를 쫓다가 중상을 입고, 철검보마저 일백에 가까운 무사들을 잃었다는 말은 독고무령에게도 충격이었다.
독고무령이 다급히 물었다.
“서연의 임시 총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면 제왕성 놈들이 서연을 쳤을지도 모를 텐데 말입니다.”
“다행히 서연에 있던 사람들은 피해를 덜 입었네.”
“그럼 공격이 없었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고…… 놈들의 공격이 있기 직전에 사람들이 모두 서연을 빠져나왔다더군.”
관초악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놈들의 공격을 미리 알고 빠져나온 것이오?”
“정확한 것을 모르겠소만, 누군가가 보주님께 서신을 보냈다고 하는데…… 좌우간 서연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철검보로 갔다고 합니다. 해서 우리도 평정으로 돌아가려던 참입니다.”
순간 독고무령은 가슴에 뾰족한 얼음이 꽂힌 기분이 들었다.
최악의 경우는 벗어났지만, 이제 철검보와 철검보에 있는 사람들만 제거되면 무천련은 해체된 거나 다름없었다.
독고무령은 굳은 표정으로 관초악을 쳐다보았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바로 올 테니 이야기들 나누고 계십시오.”
“어딜 가려고 그러는가?”
“만나볼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관초악은 의문이 가득했지만, 이제는 그조차 독고무령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알겠네, 다녀오게.”
독고무령은 심지어 진사혁조차 떼어놓고 혼자 조양표국을 나왔다.
밖으로 나온 그의 눈에 갈의를 입은 청년이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가 들어간 골목으로 들어갔다.
순간, 앞서 들어간 갈의청년이 골목 안쪽의 작은 주루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뒷짐 진 채 손가락을 둥글게 말고서.
독고무령은 그를 따라 주루로 들어간 후, 뒷문으로 나갔다.
갈의청년은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십칠호(十七狐)가 독고 공자를 뵙습니다.”
“서연은 어떻게 된 상황이오?”
“상황이 급박해서 저희가 공자의 이름을 빌어 구양 보주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름을 빌린 점,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고 말고 할 게 뭐 있겠소. 덕분에 사람들이 무사했는데.”
무천단도 없는데다 대련주 관천악을 비롯한 일원궁의 무사들마저 빠져나갔다. 남은 사람들만으로 제왕성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면 엄청난 피해를 봤을 터. 서연을 넘겨준 것이 아쉽긴 해도 일보 후퇴한 것은 상책이었다.
독고무령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십칠호에게 물었다.
“일원궁을 친 자들에 대해서 알아냈소?”
“아직 확실한 것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만…… 그들이 제왕성의 사람들이 아니란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서연에 있는 제왕성 무사들의 움직임은?”
“아직까지 특별한 움직임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놈들이 철검보로 움직일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소?”
“현재로썬 반반입니다. 열두 명의 정보원들이 서연에서 평정까지 흩어진 채 감시하고 있으니, 만일 수상한 행동이 보인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서연에 있던 무천련의 전력이 철검보의 무사들과 합류한 만큼 그들도 당장 공격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런 이유만이 아닌 듯했다.
독고무령의 눈에서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위지천백, 또 무엇을 노리고 기다리는 거지?’
그는 꿈에도 몰랐다. 일원궁을 친 자들의 위치가 어떻게 밝혀졌는지. 그러니 위지천백의 노림수에 대해서는 추측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위지천백과 배후에 대해서 완벽한 백지는 아닌 상태. 짐작 가는 바가 아주 없지도 않았다.
‘계속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고 그대의 뒤통수를 후려쳐주지.’
독고무령은 속으로 차가운 냉소를 흘리며, 제왕성의 무사들을 쫓던 중 숲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게만 말하면 방주가 알아서 할 거요.”
“예, 공자.”
“더 할 이야기 없으면 이만 가보겠소.”
독고무령이 돌아서려 할 때였다. 갈의청년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방주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뭐요.”
“워낙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서 추가비용이 들지 모른다고…….”
지독한 친구!
수백 명이 죽어나가는 판에 그걸 따지다니!
하지만 독고무령은 조금도 서운해 하지 않고 돌아서며 말했다.
“한 번에 준다고 하시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 * *
태양이 중천으로 솟구칠 즈음, 은룡산장의 깊은 곳에서 나직한 노성이 흘러나왔다.
“뭐라? 귀원장이 놈들에게 당했다고?”
“일원궁과 철검보 놈들이 악에 받쳐서 달려드는 바람에, 놈들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태사자조차 중상을 입었다 하옵니다.”
쾅!
은포노인은 탁자를 내리치며 눈을 치켜떴다.
“이런 멍청한…….”
얼굴이 노인만큼이나 하얀 중년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마저 보고를 올렸다. 그러잖아도 가느다란 목소리가 더욱 떨렸다.
“그리고 전궁산장을 친 제왕성 무사들이 서연에 들어섰사온데, 무천련 놈들은 이미 서연을 비우고 철검보로 도주했다는 보고이옵니다, 노태군.”
“끄응, 그 소식을 들으면 위지천백, 그 어린놈이 기고만장하겠군.”
“하교를 바라옵니다.”
은포노인, 노태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붉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얼굴이 하얀 중년인은 그러한 행동이 노태군의 버릇임을 알기에 묵묵히 답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렸다.
노태군은 한참만에야 붉은 입술 가를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끼어들었으니 할 수 없지. 셋째를 들어오라 해라. 그 아이를 보내서 벌레 같은 놈들이 뭘 잘못했는지 알려줘야겠다. 그리고 서연에 있다는 제왕성 놈들에게도 전해서, 셋째를 도우라 해라.”
* * *
관조운이 먼저 세 명의 무사들만 데리고 곧바로 일원궁으로 향했다.
부친인 관천악이 사경을 헤매는 상황. 누구도 그가 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무천단과 철양검대는 조양표국을 나와 곧장 철검보까지 치달렸다.
오시가 되기 직전, 평정에 도착한 무천단이 철양검대와 함께 철검보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서연이 적의 손에 넘어가고, 일원궁은 괴멸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거기다 산서 각지에서 모여들었던 중소문파의 무사들마저 겁에 질려 무천련을 등지고 떠난 마당이었다.
아마 전궁산장의 상황을 듣는다면 그나마 남아있던 사기마저 땅바닥에 떨어질 터. 철검전으로 향하는 무천단원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철검전에는 구양은과 벽도정, 설자웅이 각파의 장로 다섯 사람과 함께 모여 있었다. 아마도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던 듯했다.
관초악을 비롯한 무천단의 기주들이 들어가자, 그들은 고개를 돌려서 건성으로 치사했다.
“어서 오게나, 관 단주.”
“수고했네.”
“먼 길을 다녀오느라 애 많이 썼네.”
말로는 수고했다고 하면서도 탐탁치 못한 표정들이었다.
하긴 무천단이 쫓던 제왕성의 무리들이 서연으로 되돌아오는 바람에 도망치듯 떠나야 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몇 사람은 무천단이 쓸데없는 일을 했다고 생각한 듯 중얼거리며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넌지시 표했다.
“무천단만 있었어도 서연을 뺏기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대체 왜 그들을 쫓아간 건지 원…….”
관초악도 그들의 마음을 알았지만 별 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대신 툭 던지듯이 한마디 해서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전궁산장의 일은 아쉽게 되었습니다.”
설자웅의 눈이 커졌다.
그는 전유곤을 바라보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이냐?”
전유곤은 상기된 얼굴을 푹 숙인 채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막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부님.”
설자웅이 벌떡 일어섰다.
“설마, 본장이 놈들에게 당했단 말이더냐?! 부인은! 아이들은!”
“다행히 사모님과 홍아는 무사합니다. 하지만 송 사숙님을 비롯해서, 장로님 중 네 분이 놈들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고 그만…….”
설자웅은 부인과 자식이 살았다는 것에 내심 안도하면서도, 자신이 피땀 흘려 일으켜 세운 터전이 피로 물들었다는 걸 알고 분노가 치밀었다.
전궁산장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사제와 장로들마저 죽다니.
“이이이……!”
쾅!
탁자를 두 손으로 내리친 설자웅이 벌건 얼굴로 소리쳤다.
“전서구를 보냈는데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이냐!”
“산장에 전서구가 도착하지 않았다 합니다.”
“뭐야? 그럼, 우리가 보낸 사람들은 만났느냐?”
“바로 적을 쫓느라 만나지 못했습니다.”
“제길, 제기랄! 내 직접 갔어야 했거늘…….”
그때 벽도정이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본문은 어찌 되었는가? 본문도 놈들의 공격을 받았는가?”
관초악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놈들은 좌권에서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간 다음 북상했습니다. 덕분에 화천문은 무사합니다.”
벽도정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설자웅의 마음을 의식해 겉으로 기쁨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곧 화천기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음을 알고 다급히 물었다.
“그런데 계진이는, 화천기는 오지 않았나? 설마 놈들에게 당한 것은 아니겠지?”
관초악이 벽도정을 똑바로 바라본 채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청강산에는 놈들 삼백여 명이 남아 있었지요. 본단의 무사들이 그들과 마주쳤는데, 화천기주는 싸우다 말고 화천문으로 간다며 화천기와 함께 먼저 갔습니다.”
“싸우다 말고? 그게 무슨 뜻인가?”
“그 바람에 대여섯 명의 무천단 무사들이 헛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만, 문주님을 생각해서 목을 치지는 않았습니다.”
벽도정의 입이 꾹 닫혔다. 그제야 관초악의 말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벽도정은 얼굴이 벌게진 채 무천단원들을 둘러보았다. 사실이냐는 듯.
전유곤이 냉랭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나중에 만나면 직접 물어보시지요. 제 입으로는 더러워서 차마 말을 못하겠습니다.”
당황한 듯 벽도정이 말을 얼버무렸다.
“내 확인해보겠네. 어찌 그런…….”
그러잖아도 무거운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까지 하자 구양은이 나섰다.
“자자, 그 일은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고, 당장 닥친 일부터 이야기합시다. 단주도 그리 앉으시게나.”
관초악이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남은 자리는 하나. 누가 말하기도 전에 정일청이 그 자리에 앉으며 독고무령에게 수하 부리듯이 말했다.
“그만 가서 쉬게나.”
독고무령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도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던 설자웅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적의 꽁무니만 쫓아다녔는데 뭐가 피곤해 쉰단 말인가?”
독고무령을 따라가던 사공화정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입이 근질거려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