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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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92화
92화
순간 고지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고, 주위에 있던 자들도 급살을 맞은 듯 대경하며 몸을 떨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왕성이 이곳을 치기 위해 온단 말입니까?”
관초악과 관조운의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알고 있었다면 보일 수 없는 반응이었다.
독고무령이 그들에게 말했다.
“저분은 정말 모르는 것 같습니다.”
관초악의 이마에 파인 골이 더욱 깊어졌다.
“그게 말이 되나? 그럼 서연에서 화천문에 연락하지 않았단 말인가?”
“전궁산장에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연락이 중간에서 끊긴 것 같습니다.”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전서구가 맹금류에게 당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가끔은 길을 잃고서 헤맬 때도 있고.
그런데 왜 하필 지금, 그것도 두 곳 모두 연락이 끊겼단 말인가.
관조운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곧장 반론을 제기했다.
“그럼, 화천기라도 알렸을 것이 아닌가?”
독고무령이 대답했다.
“그들이 오지 않았다면 모르는 게 당연하지요.”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놈들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잔뜩 겁이 난 그가 어떤 행동을 했을지 누구도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건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제왕성의 공격이 이곳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그때 관초악이 고지태에게 물었다.
“장주, 화천문과 연락할 수 있는 전서구가 있소?”
“이, 있소이다.”
“그럼 즉시 전서구를 날려서 그곳의 상황을 알아보도록 하시오. 제왕성이 공격했을지도 모르니 말이오.”
“예? 예, 알겠소이다.”
고지태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가자, 관초악이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으니 식사는 건량을 구해서 때우기로 하고, 곧장 장치로 가야겠네.”
제왕성 무사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먼저 청강산을 떠나지 않았는가.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그때 독고무령이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일이 이상하게 흐르는 것 같습니다.”
뜬금없는 말에 관초악이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무슨 말인가?”
독고무령은 자신이 의아하게 생각했던 부분을 털어 놓았다.
“좌권(左權)을 지날 때까지는 그들을 봤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좌권 이후로는 그들을 봤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백 명 이상이 움직였다.
화순에서 양원, 장치로 가는 길은 험준한 산맥에 남쪽이 막혀 있어 거의 외길이나 마찬가지다.
설령 다른 길이 있어서 틀어져 봐야 십 리 안팎. 아무리 행적을 숨긴다 해도 목격자가 없을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이 어디 누구를 겁내는 무리들이던가? 걸음을 늦추면서까지 행적을 숨기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독고무령의 말에 관초악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놈들이 화천문을 공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건가?”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만, 이곳의 상황을 보니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말을 듣고 나니 모든 것이 이상하게만 보인다.
“빌어먹을…….”
쉽게 평정을 잃지 않던 관초악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관조운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왜? 대체 왜 그들이 갑자기 계획을 포기한단 말인가? 전력이 모자라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문제가 더 심각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경우는, 그보다 더 큰일이 걸려 있을 때뿐이다.
그들에게 화천문을 치는 것보다 더 큰일이 뭐가 있을까?
독고무령은 짐작 가는 바가 없지 않았지만, 당장 말하지는 않았다. 말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일단 놈들의 행방을 찾는 게 급선무일 것 같습니다. 어차피 식사도 하고 소모된 내력을 보충해야 하니, 그동안이라도 사람들을 시켜 정보를 모아보지요.”
“으음, 좋아. 많은 시간은 없지만 일단 해보는 데까지 해보세.”
때마침 고지태가 전서구를 들고 나왔다.
관초악은 전서구가 하늘로 날아오르자 고지태에게 명을 내리듯이 말했다.
“사람들을 시켜서 급히 해줘야 할 일이 있소, 장주.”
고지태는 장원의 사람들을 모조리 동원해서 양원 일대를 돌아다니게 했다.
고원장 사람들은 말을 타고, 또는 뛰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고는 외부에서 오는 자를 만나면 질문을 던졌다.
“혹시 무사들 수백 명이 몰려다니는 걸 보지 못했소?”
서쪽에서 오던 사람들은 모두가 고개를 저으며 보지 못했다고 했다.
동쪽으로 간 사람들도 무사들이 집단으로 몰려다닌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실망감에 어깨가 처질 무렵, 동북쪽에서 오던 표행의 표사 하나가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화순 쪽에서 수백 명의 제왕성 무사들이 몰려왔다는 말을 좌권에서 듣긴 했는데…… 그 후로는 모르겠소.”
남쪽으로 간 사람들은 핀잔만 들었다.
“예끼, 여보쇼. 무사가 수백 명이나 몰려다니면 화천문에서 왜 여태 가만히 있겠소?”
이 각이 지나자 흩어졌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일각가량이 더 지나자 반 수 이상이 돌아왔다.
그들 중 제왕성 무사들을 목격한 사람을 만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초조한 마음으로 반시진을 기다릴 즈음, 북쪽으로 말을 타고 갔던 자가 마침내 첫 번째 소식을 가져왔다.
“헉헉, 그들을 봤다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관초악이 다급히 물었다.
“어디서 봤다고 하던가? 인원은?”
“무사 수백 명이 유사(楡社)에서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합니다.”
유사라면 양원에서 북쪽으로 백오십 리 이상 떨어진 곳이다.
‘지금쯤이면 배는 더 멀어져 있겠군.’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꼴.
욕이 절로 나왔다. 누구라 할 것도 없었다.
“빌어먹을 놈들!”
관조운도, 전유곤도 이를 갈았다.
“개자식들! 대체 무슨 꿍꿍이지?”
관초악은 주먹을 움켜쥐고 독고무령을 직시했다.
“자네, 저들의 목적이 뭐라 보는가?”
마치 ‘너는 알고 있지?’ 그런 눈빛이었다.
독고무령은 차갑고 무심한 눈빛으로 관초악을 마주보았다.
“어쩌면……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야 할 겁니다.”
관초악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잘게 떨렸다.
그는 독고무령을 바라보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서, 설마…… 놈들이 서연을 노린단 말인가?”
관조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네. 서연을 노릴 거였으면 저번에 왜 총공세를 포기했단 말인가?”
거의 입을 열지 않던 사공화정도 곤혹스런 표정으로 의문을 표했다.
“그럴 거면 왜 복잡하게 전궁산장을 치고, 화천문을 공격할 것처럼 꾸민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군요.”
은연중 독고무령에게 답을 바라는 표정들이다.
독고무령은 여전히 무심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배후에 대해 모른다면 당연히 의문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배후에 대해 확실히 모르는 만큼, 그가 말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눈을 돌려야 할 이유가. 서연을 단숨에 치지 않고 자신들의 힘을 숨겨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관초악이 눈을 치켜떴다.
“힘을 숨겼다고? 숨겨야만 했던 이유? 그게 무슨 말인가?”
“저도 확실히는 모릅니다. 그저 제왕성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 때문이 아닐까 하는 짐작만 할뿐이지요.”
제왕성의 배후.
그 소문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 다만 듣고도 속에 담아두지 않았을 뿐.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그 말에 가슴이 떨리고 소름이 돋았다.
관초악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배후가 있다는 것은 소문일 뿐이네. 사실이라면 왜 여태껏 드러나지 않았단 말인가?”
“글쎄요. 그걸 알면 더 많은 것을 추측해 보겠습니다만, 지금은 그보다 되돌아가는 게 더 급할 것 같군요.”
관초악은 그제야 불에 덴 사람처럼 다급히 돌아서서 소리쳤다.
“맞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준비되었으면 즉시 이곳을 떠난다!”
독고무령은 무저갱의 늪처럼 깊은 눈빛으로 관초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남쪽으로 내려오기 전부터 마음에 걸렸던 일이 현실로 드러났다.
막을 수만 있었다면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기만 바라며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끝내 바람은 바람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무리 빨리 간다 해도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차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최선이 될지도 모르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 * *
무천단이 유사에 도착한 것은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간단하게 식사한 후 곧바로 북으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그때 밀호방의 요원 하나가 객잔에서 식사하고 있는 독고무령을 찾아왔다.
그는 평범한 보부상처럼 보였는데, 독고무령의 건너편에 앉은 그는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잡아 둥글게 만들고 상대의 반응이 있기를 기다렸다.
독고무령은 곧 그의 수신호를 알아보았다.
‘저것은……?’
운양이 알려준 밀호방 정보원과의 접선 신호다.
그 역시 마침 알아볼 것이 있던 터라 반갑기 그지없었다.
독고무령은 운양이 알려준 대로 엄지와 중지로 호리(狐狸)모양을 만들고는, 입을 거의 벌리지 않은 채 전음을 보냈다.
<밀호방에서 왔소?>
그제야 확신을 했는지 전음이 들려왔다.
<이십팔호(二十八狐)가 공자를 뵙습니다. 본방의 모든 정보원들에게 공자를 찾으라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자신을 찾는데 비상이 걸렸다는 것은 그만큼 급한 일이 생겼다는 뜻. 독고무령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우선 자신이 급한 것부터 물었다.
<어쨌든 잘 왔소. 혹시 제왕성의 무리들이 어느 쪽으로 움직였는지 아시오?>
<그들은 지금쯤 수양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독고무령은 다문 이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들이 철검보를 노리는 것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수양에는 철검보의 분타나 다름없는 조양표국이 있다. 그들이 그곳을 놔두고 지나갈 리가 없었다.
<왜 나를 찾은 거요?>
<일원궁이 당했습니다.>
순간, 독고무령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그 말을 듣자 안개 속에서 희미한 그림이 그려지는 듯했다.
<자세히 말해보시오.>
<자시 넘어서 공격을 당했는데, 적은 침입한 지 한 시진 만에 일원궁의 무사 수백을 죽이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제왕성이오?>
<아닙니다. 제왕성은 그쪽으로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제왕성이 아니다?
독고무령의 뇌리에 그려지던 그림이 보다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배후에 있다는 자들이 움직였나?’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지금 생각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은 어떻소?>
<그 일로 대풍장에 있던 일원궁의 사람들이 모조리 출동했습니다만, 적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제왕성의 무사들이 전궁산장을 치고 북쪽으로 향했다는 건 알고 있소?>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비상이 걸린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방주께선 독고 공자가 서연으로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일원궁이 당하고 서연이 비었다. 제왕성이 서연을 친다면, 그곳으로 가는 일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격.
운양은 그러한 상황이 걱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독고무령으로선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구양손을 비롯한 철검보의 사람들이 그곳에 남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는 곧바로 수양으로 갈 것이오. 결정은 그곳에서 하도록 하겠소.>
<방주께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십팔호는 앞에 있는 엽차를 자연스럽게 마시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진사혁이 입을 닦으며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무령, 속이 안 좋은가? 식사를 왜 하다 말아?”
독고무령이 찻잔을 바라보며 나직이 대답했다.
“피 냄새가 너무 진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