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89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89화
89화
그도 불안했다. 하지만 독고무령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독고무령이 그런 전유곤을 직시한 채 입을 열었다.
“여기에서 전궁산장까지 얼마나 되오?”
“십 리가 조금 넘을 거요.”
“만일 전궁산장에서 격전이 벌어졌다면, 이곳에서 들을 수 있소, 없소?”
전유곤이 이를 악물고 전궁산장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나 큰 소리가 나느냐에 달려 있을 거요.”
“그럼 고수들의 기운이 맞부딪치는 소리는 충분히 들리겠군.”
전유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그건…… 그렇소.”
어느새 그들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침중하게 굳은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독고무령은 전유곤을 똑바로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본 시신의 상태로 봐서, 놈들은 우리보다 반시진 정도 앞서서 이곳에 도착했소.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놈들은 곧바로 산장을 공격했을 거요. 그런데…… 반시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오.”
창백하게 질린 전유곤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래도…… 나는 믿을 수 없소. 산장에는 오백이 넘는 무사가 있소. 전서구로 소식이 전해졌다면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적과 대치했을 텐데, 어떻게 그리 빨리 무너진단 말이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상과 현실은 다를 때가 많다.
“믿을 수 없어도 사실이 그런 상황이오.”
“내가 직접 올라가서 확인해볼 거요.”
“당연히 확인은 할 것이오. 하지만 무턱대고 올라갈 수는 없소.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 모르는 한은.”
독고무령은 전유곤과 전궁기의 무사들이 입술을 씹으며 말을 못하자 청강산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싸움이 끝났다 해도 놈들은 아직 산을 벗어나지는 않았을 거요. 아마 그들과 마주칠지도 모르오. 그때는 최대한 빨리 적을 치고 뒤로 물러나시오.”
독고무령은 나직이 입을 열고, 전유곤의 두 눈을 직시했다.
“개별적인 행동은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행동임을 잊지 마시오.”
전유곤은 이를 악문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숲을 헤치고 빠르게 십 리를 전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청강산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전궁기의 사람들은 평지를 가듯이 빠른 속도로 전진했다.
철검기와 포원기의 대원들은 그들이 만든 길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산을 오른 지 일각, 앞장서서 산을 오르던 전유곤이 적으로 보이는 자들을 발견했다.
전유곤이 손을 들자 전궁기의 무사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뒤따르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몸을 낮추었다.
독고무령은 전유곤의 옆으로 다가가서 나뭇가지 사이로 앞을 바라보았다.
저만치, 삼십여 장 앞의 계곡에 모여 있는 자들이 보였다. 제왕성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웅성거리며 차가운 계곡 물에 몸을 씻고 있었는데, 대충 봐도 사오십 명은 되어 보였다.
“일각의 여유밖에 없다. 빨리 피를 씻어내라. 전광당 놈들보다 늦으면 저녁을 굶을 줄 알아라!”
“클클, 비교할 놈들이 없어서 우리 전호당을 굼벵이 전광당 놈들에게 비교하는 거요, 부당주?”
“그러니 빨리 하란 말이다!”
독고무령은 그 말에서 두어 가지 상황을 유추하고 전유곤을 바라보았다.
<건너편의 산등성이를 타고 저들 정면까지 갈 수 있겠소?>
독고무령의 전음에 전유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운 그의 눈빛에서 분노에 찬 살기가 넘실거렸다.
건너편은 경사가 심해서 짐승들도 다니기 힘들 듯했다.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적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궁으로 공격하기에는 최적의 장소.
<걱정 마시오. 이곳은 우리 안방이나 마찬가지니까.>
<건너편에서 활로 공격하면 우리가 뒤를 치겠소. 가시오.>
독고무령의 명이 떨어지자, 전유곤은 전궁기의 무사들을 이끌고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독고무령은 그들이 건너편 산등성이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소리 없이 앞으로 전진했다.
쉬쉬쉬쉭!
이십여 발의 화살이 계곡에서 쉬고 있는 제왕성의 무사들을 향해 날았다.
퍼버벅!
“커억!”
“허억!”
“적이다! 바위 뒤로 몸을 숨겨라!”
한 사람이 몇 발씩 쏜 것이지만, 제왕성의 무사들에게는 수십 명이 쏘아댄 것처럼 느껴졌다.
거리라고 해봐야 이십여 장 안팎. 게다가 위에서 아래로 쏘아댄다.
화살의 정확도는 나무에 매달린 호박도 맞출 수 있을 정도였고, 위력은 나무둥치를 깊숙이 파고들 정도였다.
순식간에 제왕성 무사들 중 십여 명이 비명과 신음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바위 뒤로 몸을 숨긴 자들 중 몇 사람도 팔다리에 화살이 꽂힌 채 신음을 삼켰다.
그러나 전궁기가 가지고 있는 화살은 개인당 이십여 발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자 우박처럼 쏟아지던 화살비가 뚝 그쳤다.
기다렸다는 듯 제왕성 무사들이 바위 뒤에서 기어 나왔다.
“올라가서 죽여 버려!”
“개새끼들! 토막을 쳐서 죽여주마!”
그때 그들의 뒤쪽에서 철검기와 포원기의 무사들이 날아 내렸다.
제왕성의 무사들 중 몇이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뒤에도 있다!”
“비, 빌어먹을!”
“몇 명 안 된다! 물러서지 마!”
독고무령은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세 사람을 무너뜨렸다.
동시에 진사혁의 곤이 두 사람을 날려버렸다.
부웅, 쾅!
“누가 죽는가 보자, 이놈들!”
사공화정과 한무종 등 삼대의 무사들도 자신의 모든 실력을 드러내며 냉정하게 적을 추살했다.
맞은편 산등성이에 있던 전유곤과 전궁기의 무사들도 빠르게 내려왔다.
양쪽의 인원이 비슷해졌다.
각자 자신이 맡은 자만 상대하면 되는 상황.
개개인의 실력에선 뒤질 것이 없다. 더구나 적은 급습을 받고 우왕좌왕하는 판이다.
삼대는 그동안 참고 참았던 분노를 쏟아내며 제왕성 전호당의 무사들을 추살했다.
그나마 약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은 구양소현을 비롯한 철풍 팔구조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신중하게 적을 상대하며 구명절혼수를 펼칠 기회만 노렸다.
반면 철검기에 합류한 한무종과 감가기, 도일성은 상대를 압박하며 몇 수 만에 한두 사람씩 제거했다.
포원기의 무사들도 뒤질세라 폭풍처럼 적을 휘몰아쳤다.
특히 전유곤과 전궁기의 무사들은, 팔다리가 잘려 꿈틀거리는 자들조차 사정없이 목을 치고 또 다른 적을 찾아 움직였다.
계곡의 바위가, 유리처럼 맑던 계곡물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쩌저정! 따당!
“그쪽을 막아!”
“으악!”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모두 죽여라!”
“빠져 나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과 악다구니가 계곡을 타고 메아리쳤다.
독고무령은 일곱 명의 목과 심장에 구멍을 내고는, 청의를 입은 중년무사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석도명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그는 나에게 맡기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시오!”
석도명이 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또 다른 놈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이상 시간이 없었다.
석도명도 그 사실을 알기에, 상대와 승부를 내보고 싶은 욕심을 접었다.
독고무령은 석도명이 훌쩍 물러나자 곧장 청의중년 무사를 향해 검을 뻗었다.
청의중년 무사는 전호당의 부당주인 섬혼검 양추량이었다.
그는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일갈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건방진 놈!”
쩡!
두 사람의 검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맑은 검명이 울렸다.
순간 양추량의 안색이 급변했다.
손에서 시작된 저릿한 느낌이 팔을 타고 올라가 어깨까지 떨렸다.
대경한 그는 저릿한 손에 힘을 주고 검을 들어 올렸다.
순간, 독고무령의 검첨이 안개 속으로 빠진 듯 흐릿해졌다.
기겁한 양추량은 급히 뒤로 몸을 젖혔다.
동시에 불꼬챙이가 꽂힌 듯 가슴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허억!”
벼락을 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눈을 부릅뜬 양추량의 뇌리에 도혼단의 무사들에게 들었던 어떤 말이 떠올랐다.
-사신의 검첨이 사라지면 심장과 목이 뚫린다!
“서, 설마…… 그게…… 악마…… 검……?”
양추량은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며 뒤로 넘어갔다.
독고무령은 완벽해진 뇌정일섬으로 양추량의 심장에 구멍을 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습공격은 완벽했다.
공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전호당의 무사들 중 서 있는 자가 하나도 남지 않은 상태다.
삼대의 대원 중 부상자는 서너 명. 인상을 찡그리고 있지만, 당장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닌 듯 보였다.
독고무령은 삼대의 대원을 향해 나직이 소리쳤다.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이 자리를 벗어납시다. 부상자들을 챙기시오.”
전유곤이 불만인 듯 반문했다.
“놈들이 오면 모조리 때려잡으면 되지 않겠소?”
단숨에 사십 명이 넘는 적을 제거했다. 부상자도 그리 많지 않다. 이대로라면 청강산에 들어온 적들을 모조리 처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전유곤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독고무령은 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급습이었기에 처리하기 쉬웠지만, 놈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우리가 역으로 당할 거요. 나는 적 몇 명 죽이자고 수하들을 희생시킬 생각이 없소. 따르지 않을 거라면 알아서 하시오.”
전유곤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몸을 떨었다.
온몸이 가라앉는 느낌. 등골에 날카로운 얼음이 박힌 기분. 천만 근 바위가 정신을 짓누르는 듯했다.
눈꺼풀을 파르르 떤 전유곤은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알았소. 대주 말대로 하리다.”
삼대가 격전의 자리를 벗어난 직후 백여 명의 무사들이 삼면을 조이며 나타났다.
그들은 계곡의 참상에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았다.
“어떤 놈들이 감히!”
“빌어먹을! 빨리 씻고 합류하라고 했더니…….”
그들 중 오십 대의 초로인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웅평, 놈들의 지원대가 온 것 같네.”
커다란 덩치의 중년인이 양추량의 시신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빠르군요. 그런데 엄청난 고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십 대 초로인. 그는 제왕성의 십이장로 중 하나이자, 산서 오대도객 중 한 사람인 벽산패도(劈山覇刀) 유가중이었다.
그는 양추량의 심장 부위를 보더니 눈매를 꿈틀거렸다.
양추량은 전호당의 부당주로 절정경지에 이른 고수다. 그런 고수의 심장이 깨끗하게 뚫려 있었다. 제대로 대항조차 못해본 것처럼.
유가중의 꿈틀거리는 눈매에서 싸늘한 광망이 쏟아졌다.
일단과 이단이 먼저 떠나고 자신이 맡은 삼단이 뒤처리를 위해 남았다. 그런데 뒤처리는커녕 엄청난 손실만 입었다.
분노가 스멀거리며 끓어올랐다.
“놈은 내가 맡지.”
커다란 덩치의 중년인, 전광당의 당주 가웅평이 양추량을 놓고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모두 주위를 샅샅이 뒤져라! 놈들의 흔적을 찾아!”
독고무령은 백여 장가량 물러나서 계곡 안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제왕성 무사들이 삼대의 흔적을 찾아 다가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석도명이 대충 숫자를 짐작하고 독고무령에게 물었다.
“백이십 명 정도 되오. 어떻게 할 거요, 대주?”
독고무령은 한 점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전면을 바라보며 나직이 대답했다.
“우리가 사냥꾼이 되어보지요.”
질문을 던진 석도명은 물론이고 진사혁과 사공화정마저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전유곤은 마음에 든다는 듯 눈빛을 번뜩였다.
“이곳은 누구보다 우리가 잘 알고 있소. 내가 앞장서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