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88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88화
88화
제5장 은룡산장(隱龍山莊), 기지개를 켜고 세상을 향해
은룡산장(隱龍山莊)이 하북성(河北城) 보정현(保定縣) 북서쪽 낭아산 자락에 세워진 것은 오십사 년 전이었다.
그 크기가 하도 커서 세워질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주시하며 주인이 누군지 궁금해 했다.
누구는 장원의 주인이 북경의 황족과 밀접한 관계라고도 했고, 누구는 강호를 뒤흔들던 고수가 은거하면서 세운 곳이라고도 했다.
그렇게 삼 년, 신비에 쌓인 채 장원이 완성되자, 몇몇 강호 세력이 그들을 주시하며 찝쩍거렸다.
개중에는 오대세가 중 하나인 팽가와 신주팔가 중 하나인 진주언가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싸움 한번 걸어보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은룡산장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그리고 관심을 접은 이유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 일로 인해서 사람들은 은룡산장이 황족과 밀접한 관계라는 추측에 더 무게를 두었다.
은룡산장은 시인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 자리에서 세월을 보내며, 정말 숨어든 용처럼 조용히 지냈다.
그런데 겨울이 마지막 몸부림을 치며 차가운 바람을 쏟아내는 이월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뇌리에서 잊힐 정도로 조용하던 은룡산장이 서서히 기지개를 켰다.
“흐음…….”
은색 장포를 입은 노인은 콧숨을 내쉬며 앞에 놓은 찻잔을 들었다.
뼈만 남은 것 같은 호리호리한 몸, 하얀 얼굴에 그어진 자잘한 주름, 유난히 붉은 입술. 그리고 깊게 가라앉은 눈빛.
겉만 봐서는 도무지 나이를 짐작키 힘든 노인이었다.
은포노인 앞에는 사십 초중반의 중년인이 앉아있었는데, 다부진 몸에 풍성한 흑염, 두 눈 깊은 곳에 자리한 형형한 눈빛이 노인의 모습과 정반대였다.
천천히 찻잔을 반쯤 비운 노인은 중년인을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놈에게 우리의 힘을 한 번쯤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그래야 은혜를 잊지 않고 충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래, 몇 명이나 데려갈 생각이냐?”
마치 옆집에 심부름 보낼 사람을 묻는 것처럼 편안한 표정이다.
중년인은 손에 들린 차로 입술을 적시고 나서 눈을 들었다.
“삼백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와는 주되, 너무 나서지는 마라. 혹시라도 그를 만나면 절대 가벼이 상대하지 말고.”
“천하에서 그를 가볍게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소자는 아직까지 한 번도 그를 가볍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님.”
노인은 남은 차를 마저 비우며 조용히 웃었다.
언뜻 보면 자식과 마주한 부친의 따스한 웃음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년인은 조금의 온기도 느끼지 못했다. 그 웃음의 진의를 알기 때문이었다.
‘실패하면 언제든 도태된다. 자식이란 것은 결코 이유가 되지 않아.’
노인은 빈 찻잔을 내려놓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입술을 닦았다.
“신속하게 처리하고 명을 기다리도록 해라. 어쩌면…… 처리할 일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순간, 중년인의 눈 깊숙한 곳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처리할 일이라 했다. 자신이 처리할 일이 결코 단순한 일일 리가 없다.
문득 번개처럼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 * *
서연의 무천련 임시 총단인 대풍장이 발칵 뒤집혔다.
오대세력, 아니 이제는 사대세력이 되어버린 무천련의 수장들이 일제히 대풍전으로 모여들었다.
설자웅이 자리에 앉지도 않고 관천악을 향해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대련주? 놈들이 남쪽으로 내려갔다니요?”
관천악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놈들이 백마방에게 썼던 방법을 쓰려는 것 같소. 그래, 연락은 취했소?”
“가져온 전서구를 급히 날리긴 했습니다만, 놈들의 규모를 정확히 모르는 터라서……. 허어…….”
설자웅이 자리에 털썩 앉으며 불안에 찬 탄식을 터트렸다.
벽도정도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 문주 역시 전서구를 띄웠습니다, 대련주.”
그는 설자웅에 비해서 침착한 표정이었다.
화천문은 전궁산장에서 사백오십 리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저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 전궁산장을 놔두고 거리가 배는 더 먼 화천문을 칠 리가 없었다.
적어도 하루 이상의 여유가 있는 상황. 그 시간이면 충분히 대응할 준비를 할 수 있을 터, 설자웅보다는 불안이 덜한 것이다.
벽도정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탁탁 치며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답답하군요. 놈들이 남쪽으로 내려갔는데도 우리는 이곳에서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다니…….”
설자웅이 이를 갈며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외다. 사람을 모아서 놈들을 쫓아가야 하지 않겠소이까?”
장원에 남은 무사들 중 성한 자들을 모두 모으면 사오백 정도는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동원하면 서연을 지킬 사람이 없게 된다. 쫓아간다 해서 그들을 따라잡는다는 보장도 없고.
자칫하면 서연은 물론이고, 철검보와 일원궁마저 위험해질지 모르는 일. 구양은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한 일이외다, 설 장주. 우리가 움직이면 놈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설자웅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무천련이라는 단체보다 전궁산장이 더 중요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무사들을 움직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오, 대련주.”
벽도정도 같은 마음인지 설자웅을 두둔했다.
“놈들이 남쪽으로 몰려갔다면 당분간 큰 위협은 없지 않겠소이까? 소수의 고수를 보내서 무천단주가 이끌고 가는 사람들과 합세한다면 놈들을 막을 수 있을 것이외다.”
관천악은 침중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마음을 어찌 모를까. 아마 자신이라 하더라도 일원궁이 공격받고 있다면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무작정 허락할 수도 없었다.
무천련은 단체다. 단체는 대의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백이 생기면 제왕성이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관천악은 절충안을 떠올렸다.
“좋소. 그럼 양쪽 합해서 강한 사람들로만 오십 명 정도를 추리도록 하시오. 어중간한 사람들로 숫자만 많은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이오.”
관천악의 말대로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선 오십 명의 고수가 이삼백 명의 일반무사보다 나았다.
벽도정과 설자웅이 급히 대답하고 몸을 일으켰다.
“알겠소이다, 대련주.”
“전서구를 보냈으니 지원무사들이 갈 때쯤이면 대응준비를 마쳤을 거외다. 즉시 사람들을 모으도록 하겠소!”
그들은 꿈에도 몰랐다.
날아오른 두 마리의 전서구가 남쪽 산을 넘지 못했다는 걸. 화살 두 발에 떨어진 전서구가 한 사람의 식사거리로 전락했다는 걸. 그리고 동쪽에서 잠자던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이다.
바람이 유난히 차갑던 그날, 산서에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 * *
능정을 출발한 사람은 모두 칠십칠 명이었다.
그들은 곧장 평두를 거쳐 수양으로 향했다.
능정에서 화순까지는 삼백 리 길. 제왕성 무사들에 비하면 한 시진 반 정도 늦은 상황이었다.
저들을 따라잡느냐, 따라잡지 못하느냐는 제왕성 무사들이 중간에 얼마나 쉬어가는 지가 관건이었다.
다행히 먼저 떠났던 석도명이 말을 준비한 채 수양 외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석도명까지 칠십팔 명이 된 일행은 즉시 남쪽으로 말을 몰았다.
칼날 같은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바싹 마른 황무지에서 피어오른 먼지가 바람을 타고 온몸을 쓸며 지나갔다.
하지만 추위를 느낄 새도, 먼지바람을 피하자고 주춤거릴 여유도 없었다.
메마른 산야는 죽은 자들의 대지처럼 삭막했다.
산이고 계곡이고 우거진 숲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달리는 사람을 반기는 것은 차가운 삭풍과 머리 위에 떠서 뱅뱅 도는 새들밖에 없었다.
새들도 죽음을 감지했는지 달리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창공을 맴돌았다.
그렇게 달린 지 세 시진, 무천련의 무사들 눈에 푸른 숲이 보였다.
화순으로 들어가는 백리계곡의 초입이었다.
두두두두…….
전유곤과 전궁기의 무사들을 선두로 칠십팔 명의 무사들이 계곡 안으로 들어섰다.
그 즈음, 말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거품을 흘렸다.
간간이 속도를 늦췄다고는 해도 세 시진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 말들이 쓰러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워, 워, 워!”
계곡으로 들어가자마자 전유곤이 급작스럽게 말을 멈춰 세웠다.
바로 뒤에 도착한 사람들도 말을 세우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대지에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신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근처가 벌겋게 물든 상태였다.
시신의 숫자는 모두 열넷. 전궁산장의 무사들이었다.
“개자식들!”
전유곤이 이를 갈며 소리치고는, 분노로 벌게진 눈을 들어 계곡 안쪽을 노려보았다.
그때 관초악이 말에서 내리며 소리쳤다.
“더 이상은 안 되겠군. 경공을 펼쳐서 가세!”
한시가 급한 상황. 지친 말을 끌고 가기에는 마음이 너무 조급했다.
사람들이 말에서 내리자, 관초악이 전유곤을 재촉했다.
“전 기주! 앞장서도록 하게!”
전유곤과 전궁기의 무사들은 동료들의 시신을 놔둔 채 몸을 돌렸다.
지금은 죽은 자들보다 산 자들이 더 중요했다. 늦으면 늦는 만큼 산 자들이 시신으로 변할 것이다.
백리계곡은 말이 ‘백리(百里)’지, 실제로는 팔십 리 정도 되었다. 그 계곡을 통과하더라도 전궁산장이 있는 청강산(靑岡山)까지는 삼십 리를 더 가야 했다.
무천련 무사들은 이를 악물고 내달려서 계곡을 통과했다.
통과하는 도중에 이십여 구의 시신이 더 발견되었다.
개중에는 전궁산장의 무사도 있었고, 전궁산장의 지부격인 화순 전양표국의 표사들도 있었다.
독고무령은 시신들의 상태만 보고도 어렵지 않게 상황을 유추했다.
‘시신이 굳은 상태로 봐서는 반시진 전에 죽음을 당했다.’
쉬지 않고 죽어라 달려왔다. 덕분에 한 시진의 간격을 줄였다. 하지만 따라잡지는 못했다.
반시진.
삶에 있어서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그러나 수백의 생명이 사라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최악이군.’
독고무령은 청강산이 보이자 관초악을 불렀다.
“단주.”
오 장가량 떨어져서 달리던 관초악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일단 멈추지요.”
관초악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선두를 향해 명을 내렸다.
“속도를 늦추게.”
전유곤은 분노에 휩싸인 상황인데도 순순히 걸음을 늦추었다. 그제야 관초악이 독고무령의 대답을 재촉했다.
“왜 멈추라고 한 건가?”
적당한 분노는 활력을 불어넣지만, 지나친 분노는 독이 된다. 지금은 분노보다 이성을 앞세워야 할 때.
독고무령은 분노의 열기를 가라앉혔다.
“무작정 올라가면 자칫 놈들의 공격을 받을지 모릅니다. 조금 늦더라도 경계를 철저히 하며 올라갔으면 합니다.”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의견.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쌓인 분노가, 상황의 조급함이 사람들의 사고를 막아버린 상태였다.
관초악조차 흠칫, 정신을 차리고 즉시 일행을 셋으로 나누었다.
“그럼, 자네가 삼대를 맡아 서쪽으로 올라가게. 나와 조운이 중앙과 동쪽을 맡겠네.”
“알겠습니다. 전 기주, 길을 안내해주시오.”
독고무령은 전유곤을 앞세우고 삼대와 함께 서쪽으로 갔다.
독고무령은 청강산 아래에 도착한 후에야 전유곤을 불러 자신이 짐작한 것을 말해주었다.
전유곤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