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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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26화
126화
순간 독고무령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사혁이만 남고, 모두 방에서 나가시오. 세 분도!”
사람들이 머뭇거리며 방을 나갔다.
치선도 육풍원에게 옷자락을 잡힌 채 밖으로 끌려 나갔다.
독고무령이 방을 나온 것은 이 각가량이 지나서였다.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한 사람을 불렀다.
“용설.”
방문 옆의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던 용설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깨어나면 그대가 좀 보살펴줘라.”
진사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급히 소리쳤다.
“무령! 왜 용설에게 부탁하는 거야? 차라리 내가…….”
하지만 독고무령은 진사혁의 애원을 들은 척도 않고, 용설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마디 더 했다.
“해주겠나? 그럼 서로가 편할 거 같은데.”
용설이 힐끔 구양소현의 방문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자신이 여자임을 드러내라는 무언의 압력.
하긴 독고무령에게 들통 난 이상 더 이상 숨긴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알았어요.”
막 ‘결사반대!’를 외치려던 진사혁이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용설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쇳소리 나는 갈라진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꾀꼬리가 옆에서 우는 것처럼 맑은 목소리였다.
“뭐, 뭐야?”
독고무령은 어리둥절해 있는 진사혁의 어깨를 툭 치며 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여자가 보살피는 게 낫지 않겠나?”
“여…… 자?”
진사혁뿐만이 아니라 사람들 모두가 석상처럼 굳은 채, 용설이 구양소현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 * *
황사바람이 고원지대를 쓸고 동쪽으로 해일처럼 밀려갔다.
햇살조차 뿌연 황사에 가려지고, 온 세상이 황달에 걸린 사람처럼 누렇게 떴다.
우현 사람들은 눈뜨고 걷기도 쉽지 않을 정도의 황사바람에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대상도 명확치 않은 욕설만 퍼부었다.
하지만 그들은 황사바람보다 더 독하고 암울한 혈풍이 자신들을 지나쳐갔음을 알지 못했다.
스스스스…….
수억 마리 개미 떼가 숲을 갉으며 지나가는 듯했다.
수백 인영이 움직이는데도 들리는 건 바람이 나뭇잎을 뒤흔드는 소리뿐.
그들 중 십 리가량 앞서서 달리는 자들이 있었다.
인원은 모두 일백 정도.
따로 명령을 내리는 자도 없었다.
명령을 받기 위해서 멈칫하는 자도 없었다.
그들은 오직 한곳만을 쳐다보며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달렸다.
어스름이 깔릴 무렵, 산장을 둘러싼 담장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였다.
제왕성 제검전의 부전주 곽호상의 입에서 살기 가득한 명령이 떨어졌다.
“일각! 그 안에 최대한 피해를 주고 빠져나온다! 가자!”
순간 일백의 인영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고 담장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어스름 속에서 날아오른 일백의 인영은 곧장 장원의 건물을 향해 치달렸다.
마당에 나와 있는 자가 보이지 않은 게 조금 이상했지만, 걸음을 멈추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곽호상은 와락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멈추지 말고 달려라! 나오는 자는 누구든 베어버려!”
그렇게 그들이 마당의 중앙 부위를 통과할 즈음이었다.
건물 지붕 위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화살과 암기가 우박처럼 쏟아졌다.
피비비빙! 투두둥!
쏴아아아!
“암기다! 조심해!”
“함정이다! 전력을 다해 마당을 벗어나라!”
고르고 고른 정예라 해도 쏟아지는 암기가 너무 많았다. 더구나 어스름으로 인해 암기의 형체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았다.
감각만으로 암기를 쳐내기에는 한계가 있는 상황.
곧 여기저기서 나직한 신음과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헌원조는 한광이 이는 눈으로 그 모습을 이층 전각에서 바라보았다.
암기로 적을 모두 처리할 수는 없다. 아니 반도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상당수에게 부상을 입히고, 사기를 땅바닥에 처박을 수는 있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바라보는 사이 적들이 암기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진다.
전열이 흐트러진 상태. 이제 힘으로써 적을 제거해야 할 때였다.
그가 밖을 향해 냉랭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은룡의 형제들이여!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낸 제왕성의 개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처리해라!”
순간, 황자악을 필두로 은룡산장의 무사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헌원조도 옆구리에 걸쳐진 검을 움켜쥐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고는 적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 곽호상을 향해서 신형을 날렸다.
‘위지천백, 그대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구나!’
비싼 값을 치른 만큼 정보는 숫자와 무위까지 무서우리만치 정확했다. 알고도 이기지 못한다면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도 할 말이 없으리라.
그는 자신했다. 오늘의 승리로 자신의 입지가 확실해질 거라는 것을.
하지만 그가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밀호방이 건네준 정보가 반쪽이라는 걸.
은룡산장의 무사들은 적을 완벽히 포위한 채 천천히 압박했다.
숫자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게다가 은룡산장의 무사들도 모두가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었다.
제검전과 환무단의 무사들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포위망을 뚫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명이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핏물이 골을 따라 흐르며 비릿한 혈향이 진동했다.
쓰러진 자는 팔십여 명. 대부분이 제검전과 환무단의 무사들이었다.
그럼에도 남은 사람들은 전력을 다해 방어하며 지원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기껏해야 반각만 기다리면 지원대가 온다.
그러나 그 반각이 그들에게는 지옥에서 헤매는 시간과도 같았다.
“흥! 순순히 무기를 던지고 투항해라!”
황자악이 코웃음을 터트리며 거만하게 소리쳤다.
바로 그때, 밖에서 경악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적이다! 적이 또 온다!”
곧이어 수백의 무사들이 장원의 담장을 넘어왔다.
황자악이 일그러진 얼굴로 악을 썼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을 막아!”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 * *
은룡산장에 혈전의 결과가 전해진 것은 하루가 지난 후였다.
노태군이 붉은 입술을 찻물로 적시고는, 앞에 앉은 장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호오, 놈들을 물리치고 삼백을 넘게 제거했다고?”
장한은 웃는 표정으로 담담히 대답했다.
“놈들의 지원군이 바로 뒤따라온 바람에, 본장의 피해도 백오십이나 된다고 합니다.”
“흠, 그 정도야 어쩔 수 없지. 흘흘흘, 첫째가 단단히 준비했나 보구나.”
오랜만에 웃음을 보이며 즐거워한다. 장한은 그 모습을 보고 가슴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슬며시 꺼냈다.
“사실 일전의 싸움도 제왕성의 수작만 아니었다면 큰형님께서 그리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부님.”
“그건 그렇지……. 그래, 어떠냐? 너도 가보지 않겠느냐?”
순간 장한의 두 눈에 열기가 피어올랐다.
“보내주시겠습니까?”
“지금 가 있는 전력만으로 위지천백을 상대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소리다. 그냥 위지천백의 힘을 가늠해볼 생각으로 보냈던 것뿐인데, 놈들을 물리쳤으니 그 정도면 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위지천백의 숨통을 조일 것이니라. 네가 다섯째와 함께 창룡군과 귀전단을 이끌고 가보도록 해라.”
창룡군과 귀전단이라는 말에 장한의 눈에서 기광이 번쩍였다.
은룡산장의 삼군(三軍) 중 하나인 창룡군(蒼龍軍)의 숫자는 총 삼백에 불과했다.
그러나 헌원조와 황자악이 이끌고 간 백룡군보다 한 단계 위의 전력이 바로 창룡군이었다.
하북의 무림세가인 팽가라 해도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멸문을 각오해야 할 만큼 강력한 무력.
그리고 귀전단(鬼戰團)은 각기 이백으로 이루어진 삼단의 하나로, 전장에서 고르고 고른 전사들의 집단이었다.
실전무예에 상승무공을 더해 익힌 그들의 실력은 어지간한 일류고수조차 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생사투에서 더욱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는 자들이었다.
그들 오백이라면, 당장 제왕성을 무너뜨리진 못해도 산서에 영역을 구축하는 일쯤은 충분했다.
“예, 사부님.”
노태군은 양아들 중 넷째인 적수천이 방을 나가자 찻잔을 들어 붉은 입술을 적셨다.
‘위지천백, 내 눈을 속이고 잘도 일을 꾸몄지만, 내 손을 빠져나간다는 게 네 맘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네놈은 아직 나를 너무 몰라.’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소한.”
뒤쪽의 휘장이 젖혀지며 한 사람이 나왔다.
그는 사십 대로 보이는 중년인이었는데, 창백한 얼굴에 하관마저 뾰족하고 입술도 가늘어 사이한 느낌이 드는 자였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천아의 성취는 어떠하냐?”
소한은 가느다란 입술을 살짝 말아 올렸다.
“공자의 잠천혈왕기(潛天血王氣)가 이미 팔 단계에 올라 있습니다, 주군.”
노태군의 작은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호오, 그래?”
“곧 구 단계에 돌입하실 것 같습니다.”
“흠, 십 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거늘, 예상보다 빠르군. 좋아, 아주 좋아. 흘흘흘흘…….”
“해서 말씀드리는 것이온데, 이제 혈마단을 복용시킬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소한의 입에서 혈마단이라는 말이 나오자 노태군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노태군은 그 상태로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 일은 일단 구 단계에 오르는 것을 지켜본 후에 결정하지.”
“하오나 자칫하면…….”
“소한.”
노태군이 나직이 이름을 부르며 소한을 바라보았다.
얼음알처럼 투명하고 차가운 눈빛.
소한은 뇌리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듯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속하가 그만 실수를…….”
“천아의 수련을 도운 공으로 오늘의 잘못을 상쇄하겠다. 허나 두 번의 용서는 없을 것이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주군.”
노태군은 소한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 찻잔을 잡았다.
“언제쯤이면 천아의 수련이 구 단계에 이를 거라 보느냐?”
“속하의 예상대로라면, 석 달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석 달이라……. 조금 늦군.”
“최대한 당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라. 그 아이는 내 미래와 같으니라.”
“예, 주군.”
* * *
쾅!
한 번의 발구름에 전각이 흔들렸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깟 놈들에게 당하다니 말이야!”
전각 안에 모인 열두 명의 간부들은 숨도 크게 못 쉬고 고개를 숙였다.
“놈들이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로 봐서, 아무래도 우리의 움직임이 놈들에게 알려진 것 같습니다, 성주.”
“공노명, 간자들 눈을 완벽히 속였다 하지 않았는가?”
공노명의 고개가 더욱 깊게 숙여졌다.
“분명 그렇게 했습니다만…….”
“만약 놈들이 우리의 움직임을 아는 게 확실하다면 그만큼 움직임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속하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어느 정도 손실을 보더라도 확실히 알아봐!”
“그리하겠습니다, 성주.”
위지천백은 노화가 깃든 눈을 들어 허공을 노려보았다.
‘헌원조, 벌써 그렇게 컸던가? 관천악에게 당해서 아직 호랑이새끼라 생각했거늘…….’
제검전과 환무단의 무사들 태반이 죽고, 살아남은 자들도 부상자가 반이 넘는다 했다. 거기에 서연의 무사들 이백 수십이 단 한 번의 싸움에서 사라졌다.
막대한 피해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피해만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노태군, 한 번의 승리로 기고만장하지 마라.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위지천백은 의자의 손잡이를 두어 번 쥐었다 펴고는 공노명을 바라보았다.
“공노명,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서연으로 가야겠다. 가서 놈들에게 산서는 제왕성의 영역임을 확실하게 알려줘라!”
“존명!”
“노태릉! 그대는 본성을 따르는 모든 문파에 알려서 지원무사를 보내라 하라!”
“예, 성주!”
앉아 있던 열두 간부들의 표에서 후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들은 위지천백의 단호한 의지를 느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위지천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간부들을 둘러보았다.
“올해 모든 것을 마무리 지어야만 우리의 꿈이 이루어진다! 모두 그 점을 명심하고,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일제히 일어난 간부들이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숙였다.
“복명!”
위지천백은 간부들이 모두 나가자, 의자에 다시 앉아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에게 말하듯 그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태군이 어떻게 나올 거라 보는가?”
순간 허공에서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