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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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24화
124화
막위지의 눈이 홉떠졌다.
자신이 아는 한 십여 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위지선유와 자신뿐.
그런데 갑자기 전음이 귓전을 때린다. 그것도 엄청난 내력이 실린 전음이.
‘누가 위지선유를 암중에서 보호하고 있나?’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했다. 아무리 뒷마당이라지만, 사람이 붐비는 선화루의 뒷마당에 아무도 없다니.
하지만 막위지는 냉소를 머금은 채 위지선유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천하에서 누가 감히 자신의 발길을 막는단 말인가!
하지만 몸을 날린 순간, 예리한 뭔가가 뒷골을 엄습했다.
막위지는 몸을 비틀며 두 손을 휘둘렀다.
섬뜩하게 다가오던 뭔가가 그의 소매에 부딪치며 튕겨졌다.
팍!
튕겨진 그것은 뒷마당 정원의 정원석에 깊이 박혔다.
옆으로 일 장가량 밀려난 막위지는 재빨리 중심을 잡고, 옆구리의 도를 빼들었다.
스릉!
자신에게 충격을 주고 정원석에 박힌 것은 작은 나뭇조각이었다. 그러한 고수를 맨손으로 상대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위지선유가 깜짝 놀라 몸을 돌리고는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
“어마! 누구세요?”
막위지는 대답할 틈도 없었다. 암중의 인물이 자신을 덮쳐오고 있었다.
사실 막위지의 등장은 워낙 의외의 일이어서 독고무령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금원에서 봤던 제왕오로 중 한 사람.
밀호방에서 본 책자에 의하면, 눈앞에 있는 자는 묵혼신도 막위지가 분명했다.
제왕오로마저 이 일에 투입되었단 말인가? 그들은 금원을 벗어나지 않는다 했거늘.
기이한 것은 막위지가 위지선유를 향해 살기를 흘린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된 그는 일단 경고를 보내 막위지의 발걸음을 막으려 했다.
그때 막위지가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위지선유를 향해 살기를 뿜어내는 것이 아닌가.
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독고무령은 창문을 조금 뜯어서 암기처럼 날리고는, 곧바로 신형을 날렸다.
단숨에 칠 장의 거리를 좁힌 그는 막위지를 덮쳐가며 검을 뽑아들었다.
막위지도 도를 비틀며 독고무령의 검세에 맞부딪쳐갔다.
독고무령이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뭇조각에 실린 내력만으로도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직감한 터였다.
쩌정!
두 사람의 기운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대기가 터져나갔다.
“뒤로 물러나 있어라.”
독고무령은 위지선유에게 한소리 내지르고는, 막위지를 향해 다시 일 검을 뻗었다.
막위지는 조금도 방심하지 못한 채 내력을 팔성까지 끌어올렸다.
그 정도면 상대를 막고 몸 하나쯤은 빼내는데 지장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그를 알기에 추호도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독고무령은 금원에서 펼쳤던 검초를 자제했다.
쾅!
찰나 간에 삼초의 검세와 도세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제야 막위지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온몸이 저릿저릿하며 가슴에서 울컥, 핏물이 치솟는다.
그는 뒤늦게 공력을 더 끌어올렸다. 하지만 형세를 뒤집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설마 이 정도였단 말인가?’
막위지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독고무령이 무심한 표정으로 다가가며 일 검을 쭉 뻗었다.
막위지는 사력을 다해서 도를 휘두르며 독고무령의 검세를 차단했다.
콰르릉!
뇌음이 일며 막위지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얼굴이 일그러진 게 상당한 내상을 입은 듯했다.
바로 그때, 선화루 안쪽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가씨가 사라졌다! 아가씨를 찾아라!”
“뒤로 가봐라! 뒤쪽에서 누가 싸우고 있다!”
독고무령은 공격을 멈추고 위지선유에게 고갯짓을 했다.
“가봐라.”
눈을 크게 뜨고 있던 위지선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고무령의 얼굴에는 깊은 칼자국이 나있었다. 자신이 아는 얼굴이 아닌 것이다.
“저기 그 얼굴……?”
“어서!”
위지선유는 독고무령이 큰 소리로 차갑게 말하자,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며 물러났다.
독고무령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몸을 날렸다.
막위지를 두고 가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제왕성의 무리들과 마주쳐봐야 좋을 게 없었다.
<운이 좋군. 우리 일은 나중에 해결합시다.>
차가운 전음이 막위지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부르르, 몸을 떤 막위지가 다급히 독고무령의 뒤를 따라가며 전음으로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리게! 물어볼 말이 있네!>
독고무령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굳이 다음으로 미룰 것도 없지.’
<따라오시오.>
독고무령 태원의 북문이 있는 외곽지역까지 달려간 후에야 걸음을 늦췄다.
그는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이 나오자 몸을 세우고 돌아섰다.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다문 채 뒤따라가기만 하던 막위지도 사오 장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물어볼 게 있다고 했소? 죽기 전에 말해 보시오. 마지막 유언 정도는 들어줄 테니까.”
독고무령은 무심하게 말하며 검을 사선으로 늘어뜨렸다.
하지만 막위지는 도를 뽑을 생각도 않고 독고무령만 쳐다보았다.
“일단 얼굴부터 보세.”
독고무령은 의외의 말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무슨 말이오?”
“아무래도 늙긴 늙은 것 같네. 한바탕 싸우고 나서야 생각이 나다니. 그 검, 그리고 자네의 검세.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네만.”
독고무령의 두 눈이 막위지의 노안에 꽂혔다.
“알고도 따라오다니, 의외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죽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면 잘못 생각한 거요.”
무심한 목소리. 검에서 검기가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막위지가 허탈한 표정으로 툴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흘흘, 나를 죽인다 해도 상관없네. 자네가 내가 아는 ‘그’라면 말일세.”
독고무령의 무심한 눈빛에 의혹이 떠올랐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마치 자신을 아는 듯 말하지 않는가?
검과 검세를 보고 자신의 정체를 눈치 채는 거야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막위지의 말에는 또 다른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금원에서 만났던 자신이 아닌, 그 이전의 자신을 아는 것 같지 않은가?
독고무령은 천천히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그는 더 깊은 말을 듣고 싶었다. 자신의 무엇을 아는지.
스윽.
손을 따라 얇은 인피면구가 벗겨졌다.
막위지는 그 모습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았다.
그리고 독고무령의 얼굴이 다 드러나자, 격동을 참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나직이 말했다.
“역시…… 내가 잘못 보지는 않았어. 자네 혹시…… 비옥 십팔호실에서 나오지 않았나?”
* * *
헌원조는 꾸깃꾸깃한 서신을 내려놓고 냉소를 머금었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대범한 놈이군.”
신시 무렵, 서신을 매단 화살이 장원 안으로 날아들었다.
근처를 지나던 무사 하나가 대경해서 즉시 화살에 매달린 서신을 펼쳐 보았다. 그로부터 두 단계를 거쳐서 헌원조에게 전해졌다.
내용은 간단했다.
[제왕성과 관련된 긴급 정보가 있습니다. 사실 의양이 있으시면 정문에 파란 깃발을 거십시오.]
“자악, 어떻게 생각하느냐?”
황자악은 서신을 받아들고 눈살을 찌푸렸다.
“둘 중 하나 아니겠소? 어떤 놈이 장난친 것이든지, 아니면 사실이든지.”
“나는 이자를 만나볼 생각이다만.”
찰나 간 황자악의 눈에서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거야 형님 마음대로 하시구려. 수장은 형님이 아니시오?”
헌원조의 두 눈이 황자악을 향했다.
그도 황자악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죽거나 회복하기 힘든 중상을 입기를 바랐을 터였다. 그랬으면 자신이 수장이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양부인 노태군을 너무나 모르는 생각이었다.
자신이 죽어도 황자악은 수장이 되지 못한다. 황자악은 머리보다 힘을 앞세우는 자. 제왕성과의 싸움에 수장으로 세우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은 것이다.
‘내가 회복되지 못했으면 넷째를 수장으로 삼았을 거다, 자악. 그러니 너는 오히려 나의 회복을 고마워해야 한다. 아우 밑에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헌원조는 속으로 황자악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목적까지도.”
움찔한 황자악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들이 산서에 넘어온 것은 비밀에 속한 일이다. 목적은 더욱더 극비라 할 수 있고.
그런데 도대체 누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헌원조는 표정이 굳어진 황자악을 똑바로 바라본 채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만나볼 가치가 있지. 장난을 한 것이면 잡아 죽이며 될 것이고, 사실이라면 그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말, 뭔가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정말 우리 목적을 알고 있다고 보는 거요?”
“그렇지 않다면 왜 제왕성과 관련된 정보를 우리에게 팔려고 하겠느냐?”
“으음, 아버님께 보고해야 하지 않겠소?”
목적이 새어나갔다면 일이 틀어질지도 모르는 일. 자신들만의 판단으로 움직이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러나 헌원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전에 확인하는 것이 순서겠지. 너는 일단 순찰을 강화하고, 수하들을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아라.”
시작하기 전부터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
황자악은 불만을 일단 깊숙이 집어넣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 * *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도 독고무령은 밀호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운양은 독고무령의 행방이 파악되지 않자, 진사혁을 불러 상의해 보았다.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군. 짐작 가는 데 없나?”
진사혁은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걸치고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모르는데 난들 알겠나?”
“선화루에 있던 수하들 말로는, 싸우던 노인과 함께 떠났다고 하던데…….”
진사혁은 손사래를 치며 만사태평하게 말했다.
“곧 오겠지 뭐. 무령이 누구에게 당할 사람인가?”
그는 오지 않는 독고무령보다 다른 일이 더 걱정되었다.
“그보다 삼괴어르신이나 어떻게 좀 말려 보게나.”
“왜 또? 그분들이 무슨 말썽이라도 피웠나?”
말썽을 피운 정도가 아니다. 비상을 걸어야 할 판이다.
진사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귀도 어르신은 천하무적 고금제일의 수법을 가르치신다고 일곱 명을 때려눕히셨고, 마불 어르신은 무슨 금강불괴 어쩌고 하면서 다섯 명이나 기절시켰다네. 그래도 그분들은 낫네. 그걸로 끝났으니까. 치선 어르신이 자기 약 좀 먹어보라고 이 사람 저 사람 쫓아다니시는데…….”
운양은 골이 지끈지끈했다.
독고무령을 제외하고, 그들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육풍원과 우도진뿐이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설사에 시달린 두 사람은 이만 갈고 있을 뿐,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삼괴의 일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독고무령이 나서주는 것. 그가 나서면 삼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질 터였다.
이러나저러나 독고무령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할 상황.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우, 나도 모르겠네. 일단 회주가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 * *
분하의 강물에 비쳐진 반달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은지 벌써 두 시진째.
그러나 독고무령이 보고 있는 것은 출렁이는 물 위에 떠 있는 달이 아니었다.
허공에 초점을 둔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관조(觀照)하고 있었다.
비옥 십팔호실에서 아버지와 놀던 때, 아버지가 죽기 전 해준 이야기들, 지하수로를 통과할 때, 장가장의 사람들…… 태행산…… 진가철방…… 철검보…… 전쟁…….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위지가 해준 이야기까지.
“어떻게…… 알았소?”
“그보다 먼저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
“말해 보시오. 어떤 이야기든.”
막위지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