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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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22화
122화
독고무령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역시 그녀였나?
“지금도 계속 추적하고 있겠지?”
“물론이네. 어떻게 할 건가? 사로잡으면 상당히 쓸모가 있을 것 같은데.”
독고무령은 운양을 쳐다보았다.
전쟁에서 치사한 작전이란 건 없다. 적을 잘 속이고, 뒤통수를 잘 치는 사람에게 병법이 뛰어나다고 하는 곳이 바로 전쟁터다.
하물며 가치가 있는 자를 사로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그쳐서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 인질로 상대에게 그만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으니까.
승리만이 진리인 곳. 정의가 푸대접받는 곳.
전쟁터는 그런 곳이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터에서 정의를 따지지 않는다 해도 독고무령은 그녀가 다치는 걸 원치 않았다.
약간의 빚이 있기도 했고, 그녀가 장유유를 닮은 순진한 소녀라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보다 큰 이유는, 모순되게도 그녀가 위지천백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기만 하게.”
운양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이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무령은 암천회의 회주다. 비록 친구간이라 해도 떨어진 명에 바로 토를 다는 것은 옳지 않았다.
“알았네.”
운양이 돌아서려 할 때다.
독고무령이 나직이 말했다.
“운양, 내가 아는 위지천백은 말이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람이라네.”
기회라는 듯 운양이 자신의 생각을 빠르게 말했다.
“그건 나도 아네. 하지만 그는 딸을 끔찍하게 아낀다고 하더군. 솔직히 말해서, 딸을 우리가 잡을 수만 있다면 위지천백의 목줄을 틀어쥘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네.”
독고무령이 느릿하니 고개를 저었다.
“그가 딸을 아끼기 때문에 더 안 된다는 거야. 아마 그는 은룡산장과의 전쟁도 제쳐놓고, 먼저 제왕성의 모든 무사들을 태원에 풀어서 무인들을 모조리 잡아 죽일 것이네. 그리고 그 후에는 산서 전역의 무인들을 죽이려 하겠지.”
운양이 해연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만일 독고무령의 말대로 진행된다면, 암천회는 날개를 펴기도 전에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독고무령의 말도 그저 가정일 뿐이었다.
설마 그 정도로 무모하게 움직일까? 딸의 목숨이 걸렸는데?
운양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애지중지하는 딸이 죽을지 모르는데, 정말 그렇게 할까?”
“요구를 들어줄 경우 풀어준다고 하면 그가 무조건 믿을 거라 보나?”
운양은 바로 대답을 못했다.
자신이라면 믿을까?
아니다. 납치범의 말을 어떻게 무조건 믿는단 말인가? 또 다른 요구를 할 수도 있고, 어쩌면 죽이고 도망갈지도 모르는데.
물론 자신들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자신들은 도망가지 않을 것이니까.
그런데 상대가 그 말을 믿어줄까?
어림없는 소리.
“그래도 요구는 들어주지 않겠나?”
운양이 조금 힘없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독고무령은 무심한 눈으로 그런 운양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아무리 그녀의 목숨을 보장해도, 그는 믿지 않을 것이네. 그는 확실치 않은 믿음과 협상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분노를 터트려 우리를 압박하려 할 거야. 그 결과는…… 자네 상상에 맡기지.”
운양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제왕의 분노.
태원을 뒤덮어오는 피의 폭풍!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제길, 그럼 오히려 그녀를 보호해야 한단 말인가? 수상한 자들이 태원에 들어왔다는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거네. 어지간한 자들은 호천위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은룡산장의 간자들이 노릴 수도 있잖은가?”
“제왕성도 그들에 대해 파악하고 있을 거네. 그런데도 위지선유를 태원에 보냈다면, 그들에 대한 대책이 있다는 말이겠지.”
운양이 앓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끄응, 내가 이렇게 멍청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군.”
“자네가 멍청한 게 아니네. 제일 먼저 생각했어야 할 것을 빠뜨린 바람에 판단이 흐트러졌을 뿐이지.”
“빠뜨린 것? 그게 뭔데?”
“위지천백의 성격.”
독고무령은 그 말만 뱉어내고 눈을 반쯤 감았다.
‘자넨 계산으로 그를 판단하지만, 위지천백은 계산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네. 그는…… 나와 비슷한 부류거든.’
그때 운양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우, 회주나 위지천백이나 정말 골치 아픈 사람들이야. 좌우간 회주 말대로 일단은 지켜만 보라고 하겠네.”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것도 피하라고 하게. 자칫하면 엉뚱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태원에 들어온 수상한 자들에 대해서 최대한 빨리 알아보게.”
“알았네.”
독고무령은 운양이 나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필 전쟁을 앞둔 시기에 위지천백의 딸이 태원으로 놀러오다니. 게다가 수상한 자들에 대한 것은 아직 파악도 안 된 상태.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봐야겠어.’
제9장 하늘이 땅이 된다 해도 나는 독고무령일 뿐
“와! 진짜 예쁘다!”
남들이야 고민을 하든 말든, 위지선유는 즐겁기만 했다.
사실 구경거리라고 해봐야 별 것도 없었다. 오히려 거리가 복잡해서 구경할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위지선유는 무척 즐거웠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모습, 그 자체를 보는 걸 즐기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가판에 놓인 형형색색의 노리개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노리개는 그녀의 발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간혹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하나씩 사기도 했다.
벌써 산 것만 열 개. 하지만 위지선유는 또 예쁜 노리개가 보이자 걸음을 멈추고 구경했다.
좌판을 벌여놓고 노리개를 파는 사람은 빼빼한 몸에 염소수염이 난 중년인이었는데, 그는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위지선유에게 노리개를 내밀었다.
“헤헤헤, 아가씨, 이것도 한번 보십시오, 정말 예쁘지 않습니까요?”
“와, 조개로 만든 목걸이네?”
그동안에도 그녀를 지키는 호천위들은 바짝 긴장한 채, 주위를 살피며 은연중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다.
“매종, 이거 어때?”
위지선유는 조개를 깎아 만든 목걸이를 들어 보이며 바로 옆의 호천위에게 물었다.
매종은 일곱 명의 호천위 중 유일한 여자로, 위지선유 옆에서 절대 다섯 자 이상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위지선유의 말친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쁩니다, 아가씨.”
“그래? 그럼 이거 매종 가져.”
“제가요?”
“응. 매일 무복만 입고 지내지는 않을 거 아냐. 나중에 치마 입을 때 걸어봐.”
“아가씨, 저는…….”
매종이 거절하려고 하자 위지선유가 불쑥 손을 내밀어 매종의 손에 노리개를 얹었다.
“설마 싼 거 줬다고 싫어하는 건 아니지?”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아가씨.”
“그럼 무조건 가져. 알았지?”
매종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예, 아가씨.”
위지선유는 활짝 웃으며 사주경계를 서고 있는 호천위들을 바라보았다.
“노리개 가지고 싶은 사람?”
여섯 명의 호천위는 꿈쩍도 하지 않고 눈에 힘만 주었다.
위지선유는 피식 웃으며 자신도 노리개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매종이 계산하자 방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매종, 우리 맛있는 거 사먹어. 뭐 먹을까?”
그녀가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며 사오 장가량 멀어질 즈음, 노리개를 판 중년인의 눈빛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명이 없으니 처리할 수도 없고…….’
그때였다. 중년인은 등 뒤로 다가오는 섬뜩한 느낌을 느끼고 재빨리 눈빛을 가라앉혔다.
순간, 예리한 기운이 등을 파고들었다.
중년인은 몸을 틀어 피하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예리한 검날이 그의 등을 헤집고 있었다.
중년인은 미처 반도 돌리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동시에 나직한 전음이 그의 귀청을 흔들었다.
<감히 아가씨를 농락하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은룡산장의 개.>
중년인은 부르르 떨며 좌판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등을 통해 심장이 뚫린 그는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서른 명으로 이루어진 제왕밀위 중 오호라 불리는 여불소는 중년인이 쓰러지지 못하도록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는 위지선유가 보이지 않을 즈음에야, 중년인을 벽에 기대어놓고 그곳을 벗어났다.
‘지독한 손속이군. 과연 제왕밀위다워.’
막위지는 여불소의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후, 건물을 돌아가는 그의 뒤를 느릿하니 따라갔다.
제왕밀위가 태원에 나타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딸의 안전 때문이라 해도 지나친 일이었다.
호천위 이십 명 정도를 보내는 것이 더 나았을 텐데, 왜 비밀에 감춰진 제왕밀위를 보낸 걸까? 제왕밀위를 보내야만 할 이유라도 있는 걸까?
막위지는 살해된 자가 누군지 몰랐다.
다만 분명한 것은, 위지선유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자라는 것이었다.
‘누굴까? 무천련의 잔당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쫓다보면 뭔가를 알 수 있을 터. 막위지는 건물을 돌아 여불소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와 여불소의 거리가 오 장 정도 되었을 때였다. 감각에 이상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저 멀리 걸어가는 위지선유의 양옆으로 십여 줄기의 기운이 흐른다.
거리가 조금만 더 멀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은밀한 기운.
‘응? 설마 저 아이를 노리는 건가?’
막위지는 눈살을 찌푸린 채 커다란 주루로 향하는 위지선유와 호천위들을 바라보았다.
호천위에게 전음으로 알려줘야 하나?
잠시 망설이던 그는 전음을 보내지 않았다.
자신이 비록 제왕성의 사람이긴 하나, 오래 전부터 위지천백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던 터였다.
아니, 어쩌면 원수지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위지천백의 딸이 어떻게 되든 나와는 상관없어!’
그는 그렇게 자위하며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바로 그때, 제왕밀위가 암중인들의 움직임을 알아챘는지 걸음을 빨리했다.
한편, 위지선유는 커다란 객잔 앞에 서서 깃발을 바라보았다.
“와아, 여기가 그 유명하다는 선화루야?”
“예, 아가씨. 여기가 태원에서 제일 크고, 요리가 맛있기로 소문난 곳입니다. 들어가시지요.”
“쳇, 전에도 두 번이나 태원에 왔는데, 왜 아버지는 이런 곳에 데려오지 않았지?”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매종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앞장서서 선화루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선화루 양 옆의 건물 지붕에서 십여 명이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자들은 허공에 뜬 채 양손을 홱 뿌렸다.
순간, 햇살에 번쩍이는 수십 개의 비도와 소전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쉬쉬쉬쉭!
“조심해!”
“암습이다! 아가씨를 보호해!”
대경해서 외쳐 댄 호천위들이 도검을 빼들고 위지선유를 둘러쌌다.
타당! 쩌저저정!
비도와 소전이 사방으로 튕겨졌다.
하지만 내력이 실린 비도와 소전은 번개처럼 빠른데다 힘마저 예사롭지 않았다.
퍼퍼벅!
“큽!”
“흐읍!”
호천위 두 사람이 신음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그와 동시, 선화루의 맞은편 건물 쪽에서도 십여 명이 쏟아져 나왔다.
“제왕성의 계집을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놈들을 죽여 한을 갚을 것이다!”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자들이 위지선유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대기를 가르며 덮쳐드는 십여 줄기의 칼바람!
갑작스런 암습이었지만, 호천위는 당황하지 않았다.
매일처럼 암습에 대비한 수련을 해온 그들은 위지선유를 철저히 감싼 채 적을 맞이했다.
그러나 위지선유로 인해 움직임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더구나 족히 세 배가 넘는 숫자고 하나같이 일류 이상의 고수들이다.
“목숨을 걸고 아가씨를 지켜라!”
호천위의 수장인 중년의 도객은 비장한 표정으로 소리치며 혼신을 다해 도를 휘둘렀다.
매종을 비롯해 소전에 맞아 부상을 입은 호천위들도 이를 악물고 적의 공세를 막았다.
그때 여불소와 또 다른 제왕밀위, 소청산과 전곡이 암습자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