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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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12화
112화
지하 일 층으로 내려가자 심부름하는 여인이 다가왔다.
독고무령은 안을 훑어보았다. 전에 봤던 애화라는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놀이를 하러 오셨나요?”
여인은 독고무령이 두려운지 유원위에게 말을 걸었다.
유원위는 환하게 웃으며 한곳을 향해 턱짓을 했다.
“자고로, 노름 중 최고는 주사위지.”
“호호호, 그럼 저를 따라오세요.”
여인이 유원위의 팔을 끼고 주사위판이 벌어진 곳으로 이끌었다. 팔을 타고 전해지는 가슴의 푹신한 감촉에 유원위의 입이 헤 벌어졌다.
누가 봐도 멍청한 촌놈이 여인의 살내음에 취한 표정이었다.
독고무령은 묵묵히 그 뒤를 따라갔다.
그때 다른 여인이 다가오더니 머뭇거리며 독고무령에게 물었다. 잔뜩 겁이 난 표정으로.
“무, 무사님은 어떤 걸……?”
“나도 주사위를 하지.”
한편인 사람을 같은 판에 끼게 할 수는 없는 일. 여인은 독고무령을 유원위가 가고자 하는 곳의 옆자리로 안내했다.
독고무령이 앉은 곳에서 벌어지는 주사위 놀음은 아주 간단했다.
만금도국에서 내세운 도귀(賭鬼-도박꾼)가 세 개의 주사위를 흔들어 탁자에 내려놓으면, 손님은 높은 수나 낮은 수에 돈을 걸었다.
구 이하가 나오면 낮은 수, 십 이상이 나오면 높은 수다.
못 맞힌 사람들의 돈에서 만금도국의 몫인 오 푼을 뺀 돈을 맞힌 사람들이 나누어 가지면 되었다.
간단하면서도 승부가 빨리 나는 게 주사위다. 그러다 보니 따는 사람도 잃는 사람도, 판이 더할수록 긴장감이 극대화되었다.
독고무령은 열 판을 진행하는 동안 세 판 이기고 일곱 판을 졌다. 그리고 다섯 냥의 은자를 잃었다.
하지만 조금의 표정변화도 없이 묵묵히 돈을 걸었다. 많이도 아니고 딱 한 냥씩.
그렇게 이십여 판이 지나자 잃은 금액이 열 냥을 넘어섰다.
반면 유원위는 다섯 냥씩 걸어서 열 판 중 일곱 판을 이겼고, 독고무령이 열 냥을 잃는 동안 사십 냥 이상을 땄다.
그 즈음 독고무령과 함께 노름을 하던 자 하나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제길, 이거 감질나서 하겠나? 이럴 게 아니라 열 냥씩 걸고 하는 게 어떻겠소?”
앉아 있던 세 사람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는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독고무령도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에서 열 냥짜리 은원보를 열 개쯤 꺼냈다.
사람들은 독고무령의 은자를 바라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조금만 있으면 자신들의 것이 될 거라 확신하며.
그리고 다시 판이 시작되었다.
독고무령은 정확히 서른세 판 만에 백이십 냥의 은자를 모두 잃었다. 하지만 별다른 표정변화도 없이 주머니에서 돈을 모조리 꺼냈다.
독고무령 앞에 은자 이백팔십 냥이 앞에 쌓이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주사위판을 휘감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상황이 조금씩 달라졌다.
열 판 중 세 판밖에 이기지 못하던 독고무령이 네 판을 이겼다. 그러더니 조금 더 지나자, 다섯 판 이상을 이기며 더 이상 은자를 잃지 않았다.
마음들이 조급해진 상대들은 판을 키웠다.
“이십 냥씩 걸읍시다.”
독고무령은 또 고개를 끄덕여서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한 판을 잃으면 한 판 땄다.
수십 판이 흐르도록 상황이 변하지 않자, 사람들은 더 이상 독고무령의 돈을 따는 걸 포기하고, 독고무령이 한 판을 따면 그 다음에는 당연히 잃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렇게 지하 일 층에 들어온 지 반시진이 지날 무렵, 독고무령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할 수도 없으니, 백 냥씩 걸고 합시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다섯 냥이면 다섯 식구가 한 달을 먹고살 수 있다. 은자 백 냥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하지만 판이 커지는 것에 희열마저 느끼는 족속들이 바로 도박꾼이다. 더구나 독고무령은 아무리 봐도 초짜도박꾼.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까짓 거, 승부를 보자고!”
첫 판에서 낮은 수에 건 독고무령이 이겼다.
사람들은 다음 판에 독고무령이 무조건 질 거라 생각했다. 하기에 독고무령이 높은 수에 돈을 걸자, 모두가 낮은 수에 돈을 걸었다.
반대편에 쌓인 돈은 모두 사백 냥.
만금도국의 도귀는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주사위가 든 종지를 들어올렸다.
순간 여기저기서 ‘억!’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삼사사, 합이 십일이다.
또 독고무령이 이긴 것이다.
오 푼을 뗀 삼백팔십 냥이 독고무령 앞으로 옮겨지자 사람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하지만 그때부터 또다시 한 판 이기고, 한 판 지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전처럼 모험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유원위가 속한 곳의 판이 깨졌다.
유원위가 네 사람의 돈을 모조리 따버린 것이다. 무려 천오백 냥의 돈을.
독고무령은 자신 앞에 쌓인 은자를 주머니에 넣었다.
사람들이 핏발 선 눈으로 독고무령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인상이 워낙 험하다 보니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유원위가 있던 곳에서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개자식! 감히 이곳에서 사기도박을 하다니! 돈을 놓고 꺼져라!”
그러고는 주먹을 뻗어 유원위를 향해 휘둘렀다.
유원위는 가볍게 고개를 젖혀 피하고는, 상대의 손을 확 잡아당긴 후 손등으로 콧등을 후려쳤다.
퍽!
“컥!”
“어디서 헛소리야? 졌으면 깨끗이 승복할 것이지.”
유원위는 냉랭히 한소리 내지르고 주머니에 은자를 쓸어 담았다.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지는가 싶더니, 만금도국의 무사들이 천천히 유원위와 독고무령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유원위가 고개를 돌리고는 피식 웃었다.
“어쭈? 지금 뭐하자는 수작이지? 만금도국의 평판이 좋아서 계속 놀러오려고 했더니, 이건 뭐 완전 생양아치들이잖아?”
무사들 중 책임자로 보이는 삼십 대 장한이 유원위를 노려보며 말했다.
“의문을 품은 사람이 있으니, 일단 당신이 편도(騙賭-사기도박)를 했는지 조사해야 하오. 순순히 응하시오.”
“응하지 않겠다면?”
“그럼 후회하게 될 거요.”
바로 그때 주머니를 품속에 넣은 독고무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지하 이 층으로 갈 테니 조사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만금도국 무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돈을 따서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지하 이 층으로 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구나 두 사람은 단순한 도박꾼이 아니라 무사들이 아닌가.
장한은 잠시 망설이더니, 독고무령의 얼굴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지하 이 층에서 도박을 할 생각이오?”
“다시 한번 운을 걸어볼 생각이다.”
독고무령은 짧게 대답하고 구석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안내하지.”
여인은 장한을 힐끔 쳐다보고는, 장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종걸음으로 지하계단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저를 따라오세요.”
운양에게 돈을 더 빌려서 바로 내려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몰랐다.
독고무령은 의심을 피할 겸 지하 일 층에서 도박을 하며 자신의 인상을 각인시키고, 이 층으로 내려갈 돈을 딸 생각이었다.
자신이 많이만 잃지 않고 유원위가 딴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설령 돈을 다 잃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마인걸을 찾아가 되찾으면 되니까.
그런데 계획도 성공하고, 예상보다 더 많은 돈을 땄다.
내심 만족한 독고무령은 은자를 만금도국에서만 통용되는 동전으로 바꾼 후 여인을 따라서 계단을 내려갔다.
한 걸음 뒤처져서. 또 안겨들지 모르니까.
오히려 떨어져서 가는 걸 여인이 더 반기는 것은 생각도 못한 채.
‘휴우, 무슨 얼굴이……. 다행히 악귀는 아닌가 봐.’
반면, 유원위는 아예 여인과 찰싹 붙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
“흐흐, 이 아래서 진짜 큰 판이 벌어진단 말이지?”
“흐응, 정말이라니까요, 공자님.”
곧 지하 이 층의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간 유원위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좋아! 아주 좋아!’
유원위의 진짜 실력이 발휘된 것은 지하 이 층에서였다.
유원위가 앉아 있던 탁자에는 모두 다섯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이각이 지나기도 전에 세 사람이 손을 털고 일어났다.
그때부터 모든 사람들의 눈이 그곳으로 향했다.
독고무령의 탁자에 앉은 사람들도 손을 멈추고 그곳만 바라보았다.
“우리 저 판 보고 합시다.”
독고무령이 제안하자 모두가 찬성했다.
남은 사람은, 유원위와 비단장삼을 입은 중년인, 단 둘뿐이었다.
두 사람 앞에는 동전과 전표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대충 계산해도 은자 이만 냥이 넘어 보이는 엄청난 돈이었다.
유원위는 주사위가 든 종지를 흔드는 도귀의 손이 탁자에 내려서기를 기다리며 찻잔을 들었다.
그때 만금도국에서 제일간다는 도귀, 백사귀(百詐鬼)의 손이 탁자 위에 떨어졌다.
쾅!
비단장삼의 중년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유원위를 쳐다보았다.
유원위는 찻잔을 느릿하니 내려놓고 앞에 놓인 돈을 모조리 앞으로 밀었다.
“낮은 수에 걸지요.”
순간 비단장삼 중년인의 눈빛에서 차가운 광채가 번뜩였다.
“그래? 그럼 나는 높은 수에 걸지.”
이만 냥의 단판 승부.
사람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백사귀의 손이 종지를 열기만 기다렸다.
앉아서 쳐다만 보던 사람들도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행여나 의자 밀리는 소리에 긴장이 깨질까, 조심스런 몸짓이었다.
뒤쪽 휘장이 젖혀지며 한 사람이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호오, 이런 엄청난 승부가 벌어지다니. 하마터면 못 볼 뻔했구려, 허허허허.”
마인걸이었다.
안에서만 지켜보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나온 듯했다.
유원위의 뒤에 서서 두 사람의 승부를 지켜보던 독고무령의 입매가 보일 듯 말 듯 비틀렸다.
‘마침내 나왔군.’
마인걸은 백사귀 옆까지 다가오더니 슬쩍 눈짓을 보냈다.
백사귀의 이마에 맺힌 땀이 흘러 눈썹에 걸렸다.
하지만 그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종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바로 그 순간!
유원위가 나직이, 차갑게 말했다.
“장난하면 죽는다. 그대로 들어 올려.”
백사귀의 손이 찰나 간 멈추었다.
“무슨 말인가?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
“의심받고 싶지 않으면 허튼짓 하지 마.”
“흥, 딸 때는 아무 말도 않더니, 막판이 되니 떨리나 보지?”
유원위가 차가운 눈으로 백사귀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지와 검지로만 종지를 들어. 흔들지 말고. 그럼 의심하지 않지.”
유원위의 말이 떨어진 순간, 백사귀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그때 마인걸이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만금도국의 도귀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
유원위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도박할 때 누구도 믿지 않아. 내가 믿는 건 오직 하나, 주사위에 찍힌 점뿐이지.”
평소의 그와 완전히 다른 모습. 초절정고수의 풍모가 느껴질 정도다.
독고무령조차 눈앞에 있는 유원위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입도 뻥끗 못하고 상황만 지켜보았다.
마인걸은 유원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백사귀에게 명했다.
“그의 말대로 해라.”
“방주님…….”
백사귀가 망설이는 사이 유원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에도 내 앞에서 하튼 수작을 부린 놈이 하나 있었지. 도박꾼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한 놈이었는데, 그날 이후 목 없는 귀신이 되었어. 당신, 그게 누군지 알아?”
뜬금없는 말에 백사귀의 눈이 흔들렸다.
마인걸은 물론이고,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유원위의 입만 바라보았다.
유원위가 하얀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재차 물었다.
“귀편도(鬼騙賭) 사구명이라고 들어봤어?”
일순간 백사귀의 얼굴이 누렇게 떴다.
“대, 대동의 귀편도…… 말이오?”
“그에 비하면 당신은 아직 멀었어. 그러니 죽고 싶지 않으면 하라는 대로 해.”
백사귀는 자신도 모르게 세 손가락을 종지에서 뗐다.
그는 아는 것이다.
대동에서 세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도박꾼 귀편도가 왜 죽었는지. 누구에게 죽었는지.
‘마, 맙소사! 그럼 이자가……!’
만일 자신의 생각대로 눈앞에 있는 자가 ‘그’라면 자신의 손장난은 재롱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세 손가락을 뗌과 동시, 좌우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던 네 명의 무사가 느릿하니 탁자를 향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