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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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10화
110화
제3장 태원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백천산을 출발한 무천단 삼대와 철검보의 무사들은 새벽 무렵이 되어서야 태원에 도착했다.
그들은 동문이 열리자마자 다섯 명씩 나누어서 태원성 안으로 들어갔다.
동문위사들은 별다른 제지도 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간단한 검문도 하지 않는 걸로 봐선 단순히 강호의 무사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곧 밀호방의 정보원이 다가오며 손짓을 했다. 손가락으로 여우 모양을 만들면서.
다섯 명씩 나누어진 일행은 그들을 따라 밀호방으로 향했다.
밀호방의 정보원들은 그들을 복잡한 골목으로 데려간 후 빙빙 돌아 밀호방으로 데려갔다. 혹시 모를 추적도 피할 겸, 태원을 감시하는 제왕성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밀호방에 도착한 독고무령은 운양을 만나자마자 정주에 파견된 자의 죽음에 대해 말해주었다.
“빌어먹을! 개자식들!”
운양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죄 없는 이만 갈았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표정을 풀고 독고무령에게 물었다.
“그래, 갔던 일은 잘 되었나?”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네만, 찾지는 못했네.”
독고무령은 추월루에서 벌어진 일을 간단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와중에 황보세가와의 마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운양의 눈이 동그래졌다.
독고무령은 이야기를 대충 마치고 운양에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한 달 간격으로 사람을 개봉으로 보내주게. 조병탁이란 자가 혹시 뭔가를 알아낼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 근데…… 황보세가가 가만히 참고 있을까?”
“황보광이라는 자, 어리석은 자는 아닌 것 같았네.”
“뭐 나도 그자에 대한 걸 듣긴 했는데……. 그래도 세가의 자존심이 상했는데, 그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자들이 방방 뜰지 모르는 일 아닌가?”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나에 대한 것을 안다 해도 찾기 쉽지 않을 거네. 제왕성의 눈조차 속이려 하는데, 그들 눈에 띈다면 헛일 아닌가?”
“그건 그렇군. 뭐 운이 좋아 찾아낸다고 해도 당할 자네가 아니지만 말이야.”
운양은 어깨를 한번 추켜올리는 것으로 걱정을 털어냈다. 그러고는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잘하면 배후에 있는 놈들의 정체를 알아낼지도 모르겠네.”
순간 독고무령의 깊게 가라앉은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빠르면 보름, 늦으면 한 달.”
밀호방의 장원 후원에는 두 채의 기다란 건물이 나란히 있었다.
본래는 밀호방의 사람들이 기거하던 곳이었는데, 운양은 그곳을 무천단 삼대와 철검보의 무사들에게 내놓았다.
그가 그곳을 내놓은 것은 건물의 지하에 복잡한 미로와 함께 밀실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지하밀실은 모두 열두 개. 그중 몇 곳은 대여섯 명이 무공을 수련하는데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제법 넓었다.
지하의 밀실을 본 독고무령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수련을 멈출 수는 없는 일. 자칫 제왕성의 눈에 띌까봐 걱정했는데 지하밀실이라면 그럴 걱정이 없는 것이다.
* * *
“아무래도 하북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총관 막도환의 말에 추월, 유하령의 아미 끝이 살짝 올라갔다.
“그래요?”
추월루를 나간 독고무령을 찾아보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개봉에서 곧장 북쪽으로 간 그의 일행이 황하를 건너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 했다.
말투에 북경 쪽 사투리가 섞여 있던 터. 그가 하북 사람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하북으로 먼저 사람을 보냈는데, 하북에는 ‘무령’이라는 청년고수가 없다고 한다.
‘혹시 산서 사람이 아닐까?’
그의 수하라는 사람들은 그와 달리 산서의 말투가 강했다.
그러고 보니 무령이라는 자의 말투에도 심하진 않지만 산서 사투리가 조금 섞여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는 제왕성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찌 알까. 독고무령은 북경 태생인 독고헌과 살았기에 하북의 말투가 입에 배어 있다는 걸.
“그럼 산서에 사람을 보내 알아봐요.”
“알겠습니다, 루주.”
유하령은 막도환이 방을 나가자 반달처럼 휘어진 눈을 가늘게 뜨고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모란 문양이 새겨진 탁자 위에는 한 장의 그림이 놓여 있었다. 독고무령의 초상이었는데, 그녀가 그린 두 장의 그림 중 하나였다.
‘왜 당신은 나를 찾는 거죠? 정말 악의가 있어서 찾는 건 아니겠죠?’
자신은 혼자다. 외가도 없고 가까운 친척도 없다. 사부도 돌아가셨다.
그러니 자신을 찾을 사람이 있다면, 오직 한 사람뿐이다.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어느 날 밤에 납치되었다.
나중에 사부님으로부터 백운서원에 제왕성의 무사로 보이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아버지를 납치한 곳이 제왕성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아버지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후였다.
그녀는 많은 조사 끝에, 산서에서 일어난 원인모를 실종사건이 모두 제왕성과 연관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기에 아버지도 그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은 사부님께 배운 무공과 몸뚱이뿐. 그것만으로 천하팔패 중 하나인 제왕성을 상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늦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여인의 한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법.
그녀는 차근차근 힘을 모으기로 했다. 제왕성에 복수할 그날을 기다리며.
그런데…… 자신을 찾는 사람이 왔다. 황보세가와의 다툼조차 마다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만큼 절실하다는 뜻.
아버지가 아니고 누가 자신을, 추월이 아닌 유하령을 그렇게 절실히 찾는단 말인가?
‘어쩌면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보냈을지도 몰라.’
원수가 자신을 찾기 위해 고용한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백운서원의 임시원주 일당을 죽이고 조병탁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은 걸로 봐서는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일.
원수가 보냈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기울여서 죽일 것이다. 정 안 되면 자신을 원하는 사람에게 몸을 바쳐서라도.
그게 아니라면 무릎을 꿇고 애원이라도 할 것이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놔두고 백운서원을 뛰쳐나간 이후 영원히 볼 수 없게 된 아버지다.
정확한 소식이라도 알아야만 한다. 최소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그것만이라도…….
‘미안해요, 아버지…….’
툭, 툭.
독고무령의 초상을 내려다보는 유하령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 *
삼대와 철검보의 무사들은 지하밀실에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몸이 녹초가 되도록 수련을 했다. 백천산에서도 그랬고,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철검보의 혈전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다.
강해지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제왕성과 싸울 결심을 했다면, 누구와 싸워도 쉽게 죽지 않을 만큼 강해져야만 한다는 걸.
하기에 모두가 스스로를 극한의 상태까지 몰아넣었다.
영약이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닌 이상 잠력이라도 자극해서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수밖에 없잖은가 말이다.
삼대를 다그치는 역할은 진사혁과 전유곤, 사공화정이 맡았다. 그리고 구양손과 구양조가 철검보의 사람들을 몰아붙였다.
그들은 철검보를 그냥 떠나온 것이 아니었다. 도망치듯 나오면서도 철검보의 주요 비급을 품속에 넣어왔다.
개중에는 구양가의 직계만이 익히는 검보(劍譜)도 몇 개나 되었다.
두 사람은 조금도 아끼지 않고 그것을 모두에게 가르쳤다. 구양가의 직계뿐만 아니라 일반 철검보의 무사들에게도.
그렇게 사람들이 수련에 몰두한 동안 독고무령은 몇 가지 일을 병행했다.
강호의 상황을 지켜보며 운양과 함께 계획을 짜기도 하고, 자신을 담금질하며 태천일심의 크기를 키우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단목승이 남긴 것을 익히려면 아직 태천일심이 더 커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명상에 잠겨서 진가철방에서 봤던 구겁무에 혼을 심었다.
덕분에 짧은 기간인데도 독고무령의 경지는 또 하나의 벽을 무너뜨리기 직전이었다.
물론 이틀에 한 번씩 장이생을 찾아가 내상을 치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열흘째부터 장이생의 몸이 확연히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소설향과 장유유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 모습만 봐도 그 동안의 고생이 봄빛에 눈 녹듯 녹아버렸다.
그렇게 밀호방에 들어온 지 이십 일이 지난 어느 날 오후. 운양이 급히 사람을 보내 독고무령을 찾았다.
독고무령은 말을 전하러 온 자의 몇 마디에 즉시 방을 나섰다.
“제왕성과 함께 철검보를 친 자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합니다, 공자. 그리고 무천단 이대의 행방도…….”
이제 겨우 미시가 넘었는데 창문 밖의 하늘이 컴컴하다.
누군가가 먹물을 들어 하늘에 뿌린 듯하다.
축축한 습기가 느껴지는 대기. 아무래도 제법 많은 비가 올 것만 같다.
후원을 나선 독고무령은 하늘을 한번 바라보고 운양의 방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적던 운양이 방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게.”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거 같군.”
“비라도 와야 피 냄새가 씻기지 않겠나?”
“그럴지도…….”
독고무령은 담담히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운양은 산서에 뿌려진 피 냄새가 독하게 느껴진 듯했다.
하지만 솔직히, 독고무령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운양이 비옥 십팔호실에 배인 피 냄새가 얼마나 독한지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독고무령은 문득 엉뚱한 생각을 하며 운양을 바라보았다.
그때 운양이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들어 건네주었다. 그가 조금 전까지 쓰던 것이었다.
“일단 이것부터 읽어보게. 조각조각 쪼개진 것을 머리 빠지게 정리한 것이네.”
종이를 받아든 독고무령은 첫머리부터 표정이 굳었다.
그는 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고개를 들지 않고 종이에 쓰인 글을 먼저 읽었다.
잠시 후, 종이를 탁자에 내려놓은 독고무령이 무심한 눈으로 운양을 바라보았다.
“은룡산장에 대해서는 얼핏 들어본 적이 있네. 한데 그들의 힘이 일원장과 철검보를 괴멸시킬 정도라니. 정말 놀랍군. 물론 그들이 정말 제왕성의 배후세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야.”
“배후에 대한 것은 아직 확실치가 않아. 다만 철검보를 친 자들이 은룡산장으로 들어갔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네. 그동안의 조사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말이야.”
독고무령은 운양의 말을 믿었다.
밀호방이 두 달 이상 집중적으로 조사했다면 황궁의 수저 숫자를 알아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은룡산장이 관여되었다는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비옥의 죄수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에는 은룡산장에 대한 것도 있었다. 비록 단편적인 이야기뿐이었지만.
수많은 무사들을 거느렸으면서도 강호 일에 끼어들지 않는 곳. 진정한 무력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곳. 신비에 쌓여 강호의 누구도 내부사정을 모른다는 곳이 바로 은룡산장이라 했다.
오죽하면 은룡산장 주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까.
“그럼 우리가 예상했던 천룡방은 제왕성과 상관없는 것인가?”
“확실치는 않네만, 지금까지 조사한 대로라면 가능성이 이 할도 안 되네.”
“으음, 은룡산장이라…….”
독고무령이 나직이 뇌까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자, 운양이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조금 묘한 게 있네.”
독고무령이 눈을 조금 올려 뜨자 운양이 고개를 바짝 내밀었다.
“은룡산장이 황궁과 관련 있을지 모른다는 소문 들어봤나?”
“황궁?”
독고무령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 죄수는 강호가 은룡산장에게 속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황궁의 끄나풀이라며.
독고무령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운양은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사실일지 모르겠네. 은룡산장에서 나간 자 중 하나를 북경까지 쫓아갔는데, 그자가 바로 동창의 당두(檔頭)였다더군.”
“동창의 당두?”
“그렇다네. 황궁 제일의 정보조직인 동창의 중간간부가 은룡산장을 제집 드나들 듯 한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야. 더구나 수하가 본 바에 의하면, 동창의 당두가 오히려 조심하는 거 같다고 하더군.”
독고무령의 뇌리에서 몇 개의 단어가 빠르게 이어졌다.
제왕성, 배후, 은룡산장, 그리고 동창.
“자네는 제왕성의 배후에 동창이 있다고 보는 건가?”
독고무령이 단번에 맥을 짚어내자, 운양이 조금 맥 빠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역시 확실하지는 않네. 단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철저히 조사해 보도록 하게. 그게 사실이라면, 시기를 좀 더 앞당길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