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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109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1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109화

 

109화

 

 

 

 

 

 

독고무령이 의자에 앉자, 양우천은 담담한 목소리로 벽도정의 뜻을 전했다. 살짝 돌려서.

 

“……그러다 보니 문주께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소.”

 

“그럼, 이대로 있겠다는 것입니까?”

 

“이미 제왕성이 산서를 다 차지하다시피 했으니 문주인들 어쩌겠소?”

 

말끝마다 문주를 들먹인다. 모든 게 벽도정의 뜻일 뿐 자신의 뜻이 아니라는 듯.

 

‘벽도정과 뜻이 다르다는 건, 속에 또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것.’

 

독고무령은 양우천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음미하며 본론을 꺼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본격적인 전쟁은 아직 시작도 안 했지요.”

 

“하하하, 이 양모도 안다오. 허나 누가 봐도 단주와 제왕성의 싸움은 당랑거철처럼 보일 터. 문주 역시 마찬가지 생각…….”

 

“제 말을 잘못 아셨군요.”

 

“무슨……?”

 

“저희와 제왕성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우천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허, 현재 산서에서 누가 제왕성과 전쟁을 벌인단 말이오?”

 

“아직 확실치 않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제 생각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근 시일 내에 그 세력의 윤곽이 드러날 겁니다.”

 

양우천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그 미지의 세력이 천하팔패의 하나인 제왕성과 싸울 정도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리 자신하는 이유라도 있소?”

 

“간단합니다. 그들이 바로 위치천백을 제왕성의 성주로 만든 자들이지요.”

 

양우천의 눈이 한껏 홉떠졌다.

 

“설마…… 소문으로만 떠돌던 제왕성의 배후?”

 

단번에 자신의 생각을 짚어낸다. 다른 사람처럼 헛소문만으로 치부하지도 않고.

 

독고무령은 그런 양우천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그런데 위지천백이 그들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가주께선 애써 키운 개가 손에서 벗어나 물려고 덤비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양우천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벽도정이 공노명과 같은 선상에 올려놓는 자다. 굳이 길게 말할 것 없었다.

 

“매로써 다스릴 거요.”

 

“매로써 다스리기에 이미 늦었다면?”

 

“그럼…… 죽이는 수밖에…….”

 

그 말인 즉, 전쟁이 벌어진단 말이다.

 

그것도 제왕성과 그 배후가 주역이 되어서!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양우천의 입에서 조금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굉장한 일이 생기겠구려.”

 

“저는 그 사이에서 또 하나의 힘을 만들 생각입니다. 불가능하다고 보십니까?”

 

파르르 떨리는 양우천의 눈꺼풀 사이에서 기광이 번쩍였다.

 

열기. 흥분. 잠자고 있던 욕망의 분출!

 

양우천은 탁자 아래의 주먹에 힘을 주었다.

 

“결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오.”

 

“듣자하니, 화천문은 세 가문이 합쳐서 이뤄졌다 들었습니다.”

 

“무슨 뜻이오?”

 

“벽 문주의 뜻이 화천문 모든 사람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사실이 그렇다. 하기에 자신도 슬쩍슬쩍 돌려서 말했었다.

 

그걸 알고 묻는 질문이다.

 

양우천은 독고무령을 뚫어지게 바라본 채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소만…… 그래도 모든 결정은 문주가 내리게 되어 있소.”

 

“당장 이런저런 말을 하기는 성급한 것 같군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하나만 약조해 주시지요.”

 

“약조라면?”

 

독고무령은 한없이 깊어진 눈으로 양우천의 뜨거워진 눈을 직시한 채 또박또박 말했다.

 

“오늘 나눈 이야기는 벽 문주에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상황이 제 말대로 흐르면, 그때 가주께서 나서주시기 바랍니다. 화천문을 위해서 말이지요.”

 

화천문을 위해서!

 

양우천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오한이 드는 기분이었다.

 

죽일 수 없다면, 적으로 만들어선 안 될 자.

 

그것이 그날 독고무령을 상대한 양우천의 마음이었다.

 

 

 

* * *

 

 

 

독고무령 일행이 백천산에 도착한 것은, 떠난 지 십사 일 만이었다.

 

구양손은 물론이고, 무천삼대와 철검보 모든 사람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마치 집 나갔다 돌아온 사람처럼.

 

용설은 나인창과 함께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가장 반가워할 진사혁이 보이지 않았다.

 

그에 대해선 구양소현이 설명해주었다.

 

“며칠째 저 뒤에 있는 동굴에 처박혀서 끙끙거리고 있어요.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밥도 거기서 먹는데, 전에 비해서 반도 안 먹어요.”

 

관천뇌곤의 중육식을 보름 안에 익히려고 침식도 동굴에서 하는 듯했다.

 

독고무령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해도 좋겠군.”

 

“예?”

 

“며칠째 그러고 있다면 뭔가 좀 달라져서 나오지 않겠나?”

 

달라지긴 달라질 거다. 하지만 달라진다는 것에 대해 구양소현의 생각과 독고무령의 생각이 조금 달랐다.

 

“며칠 사이에 얼마나 달라질진 몰라도, 살은 좀 빠졌겠군요.”

 

독고무령은 구양소현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구양손 쪽을 향해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으니 세 분은 저를 따라오시지요.”

 

 

 

구양손과 전유곤과 사공화정이 그를 따라서 독고무령의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왔다.

 

독고무령은 그들이 모두 의자에 앉자 입을 열었다.

 

“제왕성은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까?”

 

구양손이 눈살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없네. 너무 조용해서 이상할 정도네.”

 

심지어 일원궁에 대한 공격조차 없는 상태다.

 

몰락한 그들 정도는 문제될 것 없다는 건가?

 

그럴지도 몰랐다. 배후와 싸우려면 힘을 비축해야 할 테니까. 

 

자세한 것은 밀호방을 통해서 알아보면 될 일. 독고무령은 그 일은 놔두고 곧바로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내일 오후, 일차로 사십 명을 뽑아서 태원으로 갈 거요.”

 

세 사람의 눈빛이 반짝였다.

 

마침내 백천산을 떠나 세상 속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 비록 반도 안 되는 인원이지만 이제 시작일 뿐.

 

“그럼 태원에다 거점을 만들 생각이십니까?”

 

“일단은 밀호방에 머물면서 돌아가는 강호 상황을 주시할 거요. 강호의 상황변화에 빠르게 대처하기 위함이니, 모두들 내 뜻을 알고 움직여주기 바라겠소.”

 

구양손이 걱정되는 듯 말했다.

 

“태원에는 제왕성의 정보원들이 많을 텐데, 그들의 정보망에 걸리면 위험하지 않겠나?”

 

“그래서 밀호방을 이용하려는 겁니다. 때가 될 때까지는 개인행동을 철저히 금할 것이니, 그리 알고 수하들을 철저히 관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공화정이 물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여기에 남겨놓을 겁니까?”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강호에 나가봐야 애꿎은 목숨만 버릴 뿐이오. 당분간은 이곳을 수련장으로 활용할 것이니, 실력이 딸리는 사람은 이곳에서 자신을 키우는 일에 전념하라 해주시오.”

 

전유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독고무령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새로이 영입되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함께 지내게 하면 서로 연대감도 생길 것 같고 말입니다.”

 

“그럼 그리 알고, 일차로 출발할 무사들을 뽑아주시오.”

 

 

 

* * *

 

 

 

진사혁이 동굴에서 나온 것은 다음날이었다.

 

확실히 달라진 점이 많았다. 구양소현의 말대로 살도 빠진 것 같았고, 몸에서 풍기는 기세도 전과 확실히 달랐다.

 

“노력한 보람이 있는 것 같군.”

 

“음하하하. 그러고 보면 나도 인내심이 제법이란 말이야. 무려 보름 동안이나 쉬지 않고 수련을 하다니.”

 

“그래, 중육식은 완성했나?”

 

진사혁은 자신이 생겼는지 독고무령에게 넌지시 도전을 청했다.

 

“한번 해볼까? 직접 대해보면 더 잘 알 것 같은데.”

 

독고무령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 곧 잔뜩 공력을 끌어올린 진사혁이 먼저 선공하는 것으로 비무를 시작했다.

 

붕붕! 휘이익!

 

진사혁의 곤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는 전과 확연히 달랐다.

 

변화는 간결해진 것 같은데, 대신 상대를 압박하는 기세가 배는 더 강해졌다. 

 

마주 대하는 사람은 숨이 막힐 정도.

 

하지만 상대가 독고무령이라는 게 진사혁에게는 불행이었다.

 

비무는 길게 가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관천뇌곤의 중육식을 두 번에 걸쳐 모두 견식한 다음, 진사혁을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늘긴 했는데, 아직 내가 원한 정도는 아닌 것 같군.”

 

진사혁은 억울하다는 듯 씩씩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끄응, 빌어먹을……. 열흘도 넘게 죽어라고 수련했는데, 한 대도 못 때리다니. 자네도 그렇지, 한 대 정도 맞아주면 안 되나?”

 

안 되지. 누구 골병 들으라고?

 

아무리 금강불사공으로 인해 도검불침의 몸이라 해도 곤은 또 다르다.

 

더구나 곰이 전력을 다해 휘두르는 곤은 더욱더 맞을 수 없었다. 겉은 멀쩡하다 해도 속으로 골병들지 모르니까.

 

독고무령은 피식 웃으며 진사혁을 달래주었다.

 

“그래도 전보다 훨씬 좋아졌군. 하마터면 진짜 맞을 뻔했어. 조금만 지나면 후삼식을 익혀도 무리가 가지 않겠는 걸?”

 

후삼식을 익혀도 된다는 말에 진사혁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정말이지?”

 

정말이었다. 그래서 독고무령도 마음이 놓였다.

 

후삼식을 익힌다는 것. 그것의 의미를 누구보다 그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관천뇌곤의 후삼식은 절대(絶對)의 길.

 

진사혁이 그 길을 갈 수 있다면, 자신은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게 된다.

 

‘절대’의 약속을.

 

 

 

* * *

 

 

 

진사혁과 헤어져 통나무집으로 돌아온 독고무령은 품속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바라보던 그는 매듭을 풀고 동판을 꺼냈다.

 

유등잔 불빛에 비친 그것은 어둠에서 볼 때보다 더욱 신비하게 보였다.

 

독고무령은 동판을 통나무로 만든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동판에는 순서가 있었는데, 태천일심을 아는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순서였다.

 

첫머리의 글자가 태천일심의 법문 순서에 따라 쓰여 있었던 것이다.

 

태천(太天), 일심(一心), 무아(無我).

 

독고무령은 동판에 적힌 내용을 천천히,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겼다.

 

개봉에서 백천산으로 향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연구해보았다.

 

하지만 동판은 그 이상의 비밀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기껏해야 흐름 정도를 알아냈을 뿐.

 

하긴 승천무조 단목승이 평생 걸려 깨달은 바를 함축해서 적어놓은 것이다. 더구나 천하인들이 해석조차 못한 천자무서를 바탕으로 한 구결이 아닌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그나마 수천제마구겁무처럼 깊숙이 잠들지 않고 자신의 손 안에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두 시진.

 

독고무령은 석 장의 동판에 적힌 글을 모두 외우고 눈을 감았다. 이미 몇 번 읽어본데다가 천자무서와 비슷한 흐름이어서 외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천뢰무적파천검처럼 형(形)이 정해진 무공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구겁무처럼 의념으로 행할 수 있는 대능력도 아닌 무공.

 

아니, 솔직히 말해서 무공이라 부르기조차 어색하다.

 

굳이 따진다면, 태천일심의 기운을 이용할 수 있는 세 가지 기법이라고나 할까?

 

때론 무기로, 때론 몸으로, 때론 마음으로.

 

모든 걸 익혔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독고무령조차 모른다.

 

예상보다 약해서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가 전념하려는 이유는, 단목승의 모든 것이 거기에 담겨 있다는 것과 태천일심의 기운을 믿기 때문이다.

 

‘최소한 나 자신은 발전시킬 수 있겠지.’

 

독고무령은 일단 그것으로 만족했다.

 

남은 것은 시간과의 싸움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 문제일 뿐이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독고무령은 명상을 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새 태천일심을 운용해서인지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청명했다.

 

밖으로 나간 그는 오랜 만에 백수만타를 펼치며 몸을 풀었다.

 

여명이 그의 몸을 휘감아 돌며 눈부시게 빛났다.

 

그날 아침, 수련을 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온 이들 중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특히 용설은 독고무령이 동작을 멈추고 호흡을 고를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름다워, 너무나…….’

 

비록 긴 세월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용설이 사람의 움직임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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