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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108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3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108화

 

108화

 

 

 

 

 

 

“저에 대해서요? 왜요?”

 

추월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지난 오 년, 그녀는 모든 것을 잊고 살아왔다. 여자로서의 삶도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했다.

 

속마음이 얼어붙은 삶.

 

그녀를 아는 사람은, 그녀의 가슴에 추월이 아닌 빙월이 존재하고 있을 거라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거늘…….

 

한순간 모든 게 흔들린다. 아니라 부정해 보지만, 이미 그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흔들린 상태다.

 

그가 왜 자신에 대해 묻는단 말인가? 혹시 그가 자신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진 건 아닐까?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얼굴에서 열이 나는 듯했다.

 

그녀는 붉어졌을지도 모를 얼굴을 감추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숙였다.

 

“이상하네요, 그는 날 오늘 처음 봤을 텐데?”

 

조병탁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추월에 대해서 묻는 게 아니었네. 그는 유하령이라는 여인을 찾고 있었지. 어릴 적의 루주를…….”

 

추월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겨우 입을 열어 단절된 두어 마디만을 뱉어낼 수 있을 뿐이었다.

 

“그가…… 왜……?”

 

“이유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네. 다만 알아볼 것이 있다고만 하더군. 전해줄 말이 있다고도 하고 말이야.”

 

“그럼 저에 대해 말했나요?”

 

“내 어찌 루주의 허락도 없이 그 말을 할 수 있겠나?”

 

하긴 조병탁처럼 철저한 사람이 쉽게 입을 열었을 리가 없다. 만일 그가 적이라면 큰일이잖은가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왠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는 거짓말할 사람이 아닌 것 같던데…….’

 

그녀는 입술을 질겅거리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사람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결심을 굳힌 그녀는 눈을 들어 조병탁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른 말은 하지 않던가요?”

 

“사람을 사서라도 알아봐 달라고 하더군.”

 

추월의 눈이 반짝였다.

 

그 말인즉 아직 고리가 끊어진 것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연락은 어떻게 하기로 했죠?”

 

“사람을 보낼 테니, 알아낸 것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네.”

 

추월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겠군.’

 

 

 

 

 

 

 

제2장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자

 

 

 

 

 

추월루를 나온 독고무령은 북문 근처 객잔에서 하루를 꼬박 쉬고 다음날 오전 개봉성을 나섰다.

 

하루를 쉬며 운기에만 몰두한 덕에 한무종을 비롯한 세 사람의 흔들린 내력도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개봉성을 나선 그들은 곧장 황하를 건넜다. 그리고 화북평원의 드넓은 땅을 지나서 산서의 고원지대로 들어섰다.

 

산서에 들어선 독고무령은 백천산으로 가지 않고 장치로 향했다. 그곳에 화천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화천문은 고평의 은창보가 몰락한 이후, 산서 남부 제일의 세력으로 부상한 문파였다.

 

본래는 벽가와 양가, 공가가 힘을 합쳐서 이루어진 문파였는데, 지금은 벽가의 힘이 오 할 이상이어서 실제로는 벽가의 문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화천문이 제왕성에 대항해 일원궁과 함께 무천련을 결성한 곳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한손을 거들어준다면 무천련이 해체되다시피 한 지금 큰 힘이 될 것이다.

 

물론 그들이 당장 들고 일어나서 전격적으로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었다면 철검보에서도 그렇게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

 

“단주, 그들이 도와줄 거라 보십니까?”

 

장치가 가까워지자 한무종이 물었다.

 

독고무령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황토고원을 달리는 봄바람을 바라보았다.

 

완연한 봄.

 

화북평원을 지나 힘들게 산맥을 넘은 바람이 산서의 북쪽을 향해 밀려간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서 부는 바람은 여전히 한겨울의 북풍처럼 차가왔다.

 

“무천련이 이렇게 된 이상 벽도정은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할 거요.”

 

“그들이 제왕성과의 싸움을 포기할 거란 말씀이십니까?”

 

“그걸 확실히 알기 위해서 만나보려는 거요. 도와주든, 아니면 등을 돌리든, 그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아두어야 뒤통수를 맞지 않을 테니까.”

 

 

 

황하를 건넌지 이틀째. 

 

정오가 막 지날 즈음 독고무령이 일행과 함께 화천문에 도착했다.

 

독고무령은 정문위사에게 무천단주의 영패를 내밀고 용건을 말했다.

 

“무천단에서 문주님을 뵙고자 왔소. 안에 기별을 주시오.”

 

정문위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무리 천 리 떨어진 곳에 있다 해서 어찌 무천단을 모르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문위사가 뛰다시피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되지 않아 마흔쯤 되어 보이는 중년인이 위사를 따라 나왔다.

 

중년인은 독고무령 일행을 둘러보고는 조금 귀찮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화천문의 공하라 하네. 무천단에서 왔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문주님을 만나 뵈려 왔습니다.”

 

“무천단의 뉘신가?”

 

독고무령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다른 말로 둘러댔다.

 

“비밀을 요하는 일로 왔습니다. 인사를 나누는 것은 문주님을 만난 다음에 해도 될 것 같습니다만.”

 

공하는 기분이 나쁜 듯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나 당장 발작을 하지는 못했다. 무천단이 비록 해체 직전의 상태이긴 해도 그 하나하나가 모두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일단 나를 따라오게.”

 

 

 

공하는 독고무령 일행을 객방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게.”

 

그는 그 말만 남기고 바로 방을 나갔다.

 

독고무령은 공하의 등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문이 닫히자 고개를 돌렸다.

 

무천단에서 왔다고 했는데도 일반 손님들이 머무는 객방으로 안내했다. 그러고는 차 한 잔도 내주지 않고 휑하니 가버렸다.

 

무천단을 그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는 말.

 

만일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면 어땠을까?

 

좀 더 나은 대접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다못해 가식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차라도 한 잔 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 대한 대접일 뿐이다.

 

화천문이 무천단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잘한 것 같다.

 

도일성도 어느 정도 감을 잡았는지 투덜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제길, 이거 아무래도 틀린 것 같은데요?”

 

 

 

벽도정은 무천단에서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이마를 좁혔다.

 

“그들이 왜 찾아왔다고 보느냐?”

 

벽계진은 찻잔을 들며 반문하듯 대답했다.

 

“그야 도와달라고 온 것 아니겠습니까?”

 

“네 생각은 어떠냐? 그들을 도와줘야 할 거라 생각하느냐?”

 

“어차피 무천련도 끝장이 난 마당인데, 굳이 끼어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아버님.”

 

“강호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지 모르는데도 말이냐?”

 

“차라리 그 소리를 듣는 게 낫지, 애꿎은 수하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벽도정은 이마를 펴고 수염을 쓸어내렸다.

 

수하들의 죽음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들도 위험해진다는 게 더 마음에 걸렸다.

 

“문제는 제왕성인데……. 그들이 우리를 이대로 둘지 모르겠구나.”

 

“저희가 무천단을 도우면 더 위험해집니다. 지금처럼 조용히 있어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저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무천단을 돕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마 제일 먼저 저희를 치려 할 겁니다. 우리만 없애면 무천단도 더 이상 기댈 언덕이 없을 거라 생각할 테니까요.”

 

“그렇다고 당장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니……. 그거 참.”

 

벽도정은 찻물로 입술을 적시고는 좌측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마흔 전후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벽가, 공가와 함께 화천문을 이루는 삼대가문 중 양가의 가주, 양우천이었다.

 

“우천, 이 아이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양우천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소문주의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무조건 거절하는 것도 그간의 정리로 봐서 못할 짓이라고 봅니다.”

 

유난히 ‘못할 짓’에 힘주어 말하는 양우천이다.

 

벽계진은 양우천을 슬쩍 흘겨보고는 찻잔을 들었다.

 

그때 벽도정이 다시 물었다.

 

“그럼 저들에게 뒷말을 듣지 않고, 본문도 안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문주께서도 고민하는데, 제가 무슨 재주로 듣자마자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겠습니까?”

 

벽도정은 양우천을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은 안다. 양우천의 뱃속에 너구리가 몇 마리 산다는 것을. 능히 제왕성의 공노명과 쌍벽을 이루는 잔머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 그게 양우천이라는 걸.

 

아마 양가가 벽가만큼 힘을 지녔다면, 양우천은 분명 엉뚱한 일을 벌였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흥, 물론 그 전에 내 손에 죽었겠지.’

 

양가의 힘은 화천문 전체로 따져서 이 할밖에 안 된다. 

 

설령 공가와 합친다 해도 최대한 봐주면 사 할이 조금 넘는 정도. 감히 자신들의 상대가 안 되는 것이다.

 

벽도정은 마음속에서 양우천을 한번 죽이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자네가 그들을 한번 만나보겠나?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좋은 방법이 생각날지도 모르잖은가?”

 

‘나에게 짐을 떠맡기겠다는 건가?’

 

양우천은 단번에 벽도정의 생각을 읽어냈다.

 

도와주자니 제왕성이 두렵고, 거절하자니 강호의 친구들에게 욕먹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이 나설 경우, 최후결정은 벽도정이 내리면서도 잘못되면 자신 탓을 하면 된다.

 

이러나저러나 벽도정은 손해 볼 일이 없는 것이다. 잘하면 껄끄러운 상대 하나 제거할 수도 있고.

 

‘쯔쯔쯔, 좀생이 같은 양반…….’

 

그래도 그는 별반 불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께서 맡기신다면 노력해 보겠습니다.”

 

 

 

독고무령은 방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혼자다. 역시나 공하처럼 처음 보는 사람.

 

“양가의 양우천이외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나 모르겠구려.”

 

하지만 말투나 포권을 취하는 태도가 공하와 완전히 달랐다.

 

나이가 훨씬 많음에도 예의로써 손님을 맞이한다. 그것도 진심이 담긴 듯 웃음까지 띤 채.

 

더구나 양우천이라면, 화천문 삼가 중 양가의 주인이 아니던가.

 

화천문에 대해 지나친 편견이 있었던 건가?

 

오죽하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독고무령은 마주 포권을 취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무천단의 독고무령이라 합니다.”

 

양우천의 얼굴에서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혹시… 철검기를 이끌던 기주가 아니오?”

 

서문태강을 이긴 자. 제왕성에서 지옥사신처럼 생각하는 자. 암천의 별, 암천사신이라 불리는 자.

 

독고무령을 표현하는 말은 많았지만, 막상 대놓고 그렇게 물어보기도 어정쩡한 일이 아닌가.

 

결국 양우천은 철검기를 들먹이고 독고무령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마에서 땀이 삐질 새어나왔다.

 

“그렇습니다.”

 

젠장, 진짜잖아?

 

양우천은 땀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헛웃음을 흘렸다.

 

“하, 하, 하. 이거 실례를 했소이다. 이제 단주가 되었다 들었는데…….”

 

“그전에 철검기를 이끌었으니 가주님의 말씀도 틀린 것은 아니지요.”

 

“그렇소? 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양우천의 가슴이 열기로 달아올랐다.

 

‘벽도정! 당신은 지금 누가 왔는지 알기나 하는가? 멍청한 양반!’

 

그가 아는 독고무령은 천하를 뒤흔들 변수다.

 

그런 사람이 찾아왔는데도 박대하다니!

 

은근히 즐거웠다. 아마 그 말을 해주면 벽도정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날 것이다.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니 어찌 즐겁지 않을까.

 

물론 독고무령이 분노했을 경우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자신이 잘해주면 되니까.

 

양우천은 대소를 터트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의자를 가리켰다.

 

“자, 앉습니다, 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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