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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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47화
147화
곧 십칠호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남쪽과 서쪽 길은 막힌 것 같습니다만, 북쪽 길은 괜찮아 보입니다, 방주. 가시죠.”
“알았어. 그대는 태원을 빠져나가서 회주에게 풍운장이 당했다는 걸 알려라.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서 가!”
“예, 방주.”
십칠호가 먼저 급박하게 집을 빠져나갔다.
운양은 비밀통로를 나온 사람과 함께 북쪽으로 통하는 쪽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 * *
술시가 다 지나갈 무렵.
독고무령 일행은 태원의 동쪽을 가로막은 오금산(烏金山) 남쪽 자락에 도착했다.
산을 넘고, 계곡을 지나고, 평원을 달린 지 두 시진.
이제 태원의 동문이 이십 리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만 더 가면 태원의 성문 위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보일 터. 그들은 속도를 늦추고서 주위를 살피며 태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들이 길게 뻗은 오금산 자락을 돌아서 북서쪽으로 꺾어질 때였다.
“응?”
저만치 앞장서서 걷던 한무종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뒤를 따라가던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한무종은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좌측을 향해서 빠르게 달려갔다.
독고무령은 이십여 장 앞서가던 한무종이 나지막한 언덕 뒤쪽을 향해 달려가자 걸음을 늦추었다.
조금 있으니 언덕 너머에서 한무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주!”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한무종의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긴장과 초조.
독고무령은 즉시 땅을 박차고 한무종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언덕을 넘자 바위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한무종이 보였는데, 그의 앞에는 한 사람이 누워있었다.
피에 젖은 채 숨을 껄떡이는 서른 전후의 장한.
그를 본 독고무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누워있는 자는 밀호방의 정보원인 십칠호였던 것이다.
다행이라면 아직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는 것.
독고무령이 빠르게 다가가자 한무종이 옆으로 비켜났다.
다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독고무령 아니던가.
독고무령은 십칠호의 맥을 잡고 숨을 두어 번 쉬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십칠호의 가슴을 세차게 눌렀다.
“우욱!”
숨이 넘어갈 것 같던 십칠호가 시커먼 피를 토해내며 눈을 부릅떴다.
독고무령은 급히 품속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내서 매듭을 풀고는, 그 안에서 기다란 침을 집어 들었다.
그즈음 가까이 다가왔던 구양소현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으음.”
예전 독고무령이 백마방 무사의 가슴에 저 침을 꽂았었다. 그리고 백마방의 무사는 그 후 몇 마디만 남긴 채 죽어야만 했다.
구양소현은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만 해도 독고무령이 너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위험에 빠질지 모르는데 일단 한 사람을 먼저 살리는 것과, 한 사람의 죽음을 앞당겨서라도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그녀의 눈빛이 흔들린 잠깐 사이, 독고무령의 손에 들린 침이 십칠호의 심장어림에 꽂혔다.
역시나 그날과 비슷한 상황.
“커억!”
구양소현은 십칠호의 입에서 급박한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들으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태원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오?”
독고무령이 빠르게 물었다.
십칠호의 입술 사이로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왕…… 공…… 풍운…… 멸…… 방주…… 지금…… 추적당하고……. 컥!”
풍운장에는 구양가의 사람들이 있다. 십칠호가 죽어가는 몸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건 운양에게도 위험이 닥쳤다는 말.
독고무령은 손가락으로 침을 튕기고는, 십칠호의 몸이 파르르 떨리자 다시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소?”
“반…… 시진…… 빨리…….”
십칠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격발된 잠력이 거의 다 소진되었다는 뜻.
독고무령은 십칠호의 몸을 조심스럽게 눕혀주었다.
“가면서 보시오. 실망하지는 않을 거요.”
언뜻 몸이 굳어가는 십칠호의 입가로 가느다란 웃음이 맺혔다. 왠지 모르게 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몸을 일으킨 독고무령은 더 이상 뒤를 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냉정하고도 단호한 행동!
독고무령의 몸 주위로 한겨울의 북풍이 회오리친다.
호위무사대는 입을 꾹 닫은 채 독고무령의 뒤를 따랐다.
“너희들은 나를 먼저 찾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제왕성이여!”
밤바람을 타고 나직이 흐르는 독고무령의 목소리.
어둠이 얼어붙어 우수수 떨어졌다.
* * *
독고무령은 성문으로 들어가려던 생각을 바꿔서 성벽을 타넘었다.
밀호방에선 태원성의 성문위사들을 오래 전부터 관리해왔다. 그러니 제왕성의 무사들이 대규모로 들어왔다면, 어떤 식으로든 운양이 눈치 챘어야 옳았다.
그런데도 풍운장이 공격당할 때까지 운양이 그들의 출현을 몰랐다는 것은, 성문위사들이 입을 다물었다는 말과 같았다.
그들은 더 이상 밀호방의 친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제왕성에 자신들의 출현을 알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풍운장에 도착하기 전, 본래 흑도삼파의 사람이었던 기호정과 전학이 일행에서 먼저 빠져나갔다.
독고무령의 명으로 암천삼당의 사람을 만나 제왕성 무사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독고무령은 두 사람이 마운방과 백귀회로 달려가자, 나머지 호위무사대를 이끌고 곧장 풍운장으로 향했다.
풍운장으로 접근하던 그들은 담장 외곽에서 대여섯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담장을 넘자 컴컴한 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사십여 구의 시신이 보였다.
마당에 흥건한 검붉은 선혈. 코를 찌르는 비릿한 피비린내.
풍운장에 들어선 사람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단순히 선혈이나 피비린내 때문만은 아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가 가슴속에 남아 있던 약간의 온기마저 식혀버린 것이다.
독고무령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기며 시신들을 살펴보았다.
시반(屍班)이 옅게 나타나기 시작한 걸로 봐서 죽은 지 한 시진 남짓 된 것 같았다.
시신은 대부분이 풍운장의 경비를 맡은 무사들과 수련을 위해서 흑도삼파가 보낸 무사들이었는데, 개중에는 하인도 몇 있었다.
그런데 시신 중 구양가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득, 초조한 표정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던 구양소현이 이마의 땀을 닦는 게 보였다. 시신 중에서 부모와 구양손이 보이지 않자 안도한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그가 구양소현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안쪽으로 들어갔던 한무종과 염부중이 하인 몇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두 명의 여인과 한 명의 노인이었는데, 그들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서 넋이 반쯤 빠진 듯했다.
“안쪽에서도 구양 대협을 찾지 못했습니다. 무사히 빠져나가신 것 같습니다, 회주.”
독고무령은 한무종의 말을 들으며, 염부중이 데리고 나온 노인을 직시했다.
“무슨 말이든, 아는 대로 말해보시오.”
노인은 벌벌 떨면서 횡설수설했다.
“저, 저희는 광의 지하창고에 숨어서 겨우 살았습니다요. 악귀 같은 놈들이 무사님들을 도살하기 전에…… 작은 주인이 몇 분을 풍운전으로 데려갔습지요. 악귀들은 자신들이 찾던 사람들이 없다면서…… 사방을 뒤지고…… 한참 뒤지더니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요.”
노인이 횡설수설하고 있는데, 풍운전으로 들어갔던 진사혁이 뛰어나왔다.
“비밀통로로 통하는 벽이 부서져 있네, 회주.”
독고무령은 즉시 풍운전 안으로 들어갔다.
풍운전의 내실로 들어가자, 산산이 부서진 탁자와 뻥 뚫린 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적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입구를 뒤늦게 발견하고 분노해서 힘으로 부순 것 같다. 다시 말해 비밀통로로 도주한 사람들과 시간 차이가 난다는 뜻.
“밀호방으로 가보는 게 어떻겠나?”
옆으로 다가온 진사혁이 물었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고개를 저었다.
십칠호는 연락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가 당한 것이지 밀호방에서 당한 것이 아니다.
아직 그곳은 적에게 들키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자신들이 몰려간다면, 밀호방에 공연한 위험만 제공할 뿐.
아마 운양도 자신과 마찬가지 생각일 것이다.
“운양이라면 사람들을 절대 그곳으로 데려가지 않았을 거네. 놈들이 운양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찾고 있겠지. 일단 놈들의 위치를 알아봐야겠어. 그 근처에 운양이 있을 테니까.”
상황을 알아보러 갔던 기호정과 전학이 돌아온 것은, 독고무령이 막 풍운전을 나설 때였다.
기호정이 먼저 보고했다.
“운 방주가 몇 분과 함께 북문로 쪽의 객잔에 은신해 있는데, 제왕성의 무사들이 뒤를 추적해서 북문로 일대를 집중적으로 뒤지고 있다 합니다, 회주.”
기호정에 이어 전학이 보고를 올렸다.
“삼당과의 관계는 아직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도주한 자들의 정보를 제공하면 충분한 대가를 준다면서 백귀회에 협조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풍운장에 있는 흑도무사들도 통일된 무복을 입은 상태. 그들이 흑도의 무사인 것을 몰라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기호정의 얇은 입술이 비틀렸다.
“마운방과 흑호방에도 그런 요청을 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빌빌거리던 일개 흑도무리들이 감히 제왕성에 반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무천련이 지저분한 건달들과 손을 잡을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독고무령의 입가에 차가운 냉소가 걸렸다.
“저들의 인원은?”
“사십여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다. 겨우 그 정도의 숫자가 태원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은 개개인이 그만큼 강하다는 말.
하지만 적이 강할수록 독고무령의 심장도 싸늘하게 식었다.
“일단 운양 일행을 찾아보도록 하지.”
사냥은 그들을 구한 후에 해도 늦지 않을 터. 독고무령은 북쪽하늘을 바라보며 가볍게 땅을 박찼다.
* * *
제왕성 무사들이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게 느껴진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복잡한 태원성 안에서 반 시진 만에 자신들의 뒤를 쫓아오다니.
저들 중에 고도의 추적술을 지닌 자가 있다는 말.
‘개코를 지녔나? 제길, 이제 와서 암천삼당더러 나서라고 할 수도 없고.’
자신이 먼저 그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살펴보기만 하고 절대 끼어들지 마쇼.
상대는 제왕성이다. 흑도삼파가 무천련과 연관되었다는 게 알려지면, 풍운장의 혈풍은 조족지혈이라 할 만큼 엄청난 혈풍이 불 것이 자명하다.
태원의 암천회 세력이 모조리 붕괴될지도 모르는 일.
운양은 최악의 결과가 나오는 것은 절대 원치 않았다.
물론 자신이 죽는 것은 더 원치 않았지만.
‘제길, 충분히 피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후우…….’
속으로 한숨을 쉰 그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가 은신한 곳은 북문로 구석진 곳의 객잔 이 층. 그곳에서는 북문로 일대가 제법 넓게 보였다.
운양은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건너편 큰길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근처까지 온 거 같아.’
평상시 발에 채일 만큼 많이 돌아다니던 술주정꾼들이 반도 보이지 않는다. 싸움질로 시끌벅적하던 골목에선 그저 웅성거림만이 들려온다.
사람들은 유월인데도 어깨를 움츠린 채 주위를 살피며 걷기에 바쁘다.
도대체 저곳이 태원의 북문로가 맞긴 한 걸까?
하지만 운양은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알기에 마음이 더 초조해졌다.
제왕성의 무사들이 태원성 안에서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아는 것이다. 그들이 다가오며 흘리는 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
그때 방문 밖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암암리에 자신들을 돕고 있는 마운방의 무사 목소리였다.
“손님, 손님을 찾는 사람들이 근처까지 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