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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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46화
146화
순간 그의 뒤쪽 어스름 속에서 여섯 명의 흑의장한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감과 동시, 골목의 저쪽에서 몇 명의 무사들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웬 놈들이냐? 이곳은 길이 막혔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
그들은 아직 외부를 감시하던 동료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감시조의 제거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는 말이었다.
흑의장한들은 건들거리며 나타난 자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 없이 무기를 빼들고 주욱 밀려갔다.
그들의 움직임은 어둠과 동화되어 마치 유령이 움직이는 듯했다.
빠르고 강력한 움직임!
무기가 그들의 등과 허리에서 뽑혔을 때는 이미 상대의 목과 허리를 쳐가고 있었다.
“뭐, 뭐야?”
“막아라!”
“적…… 크억!”
곧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싸움이 아니라 도살이었다. 일개 흑도무리들이 조금 강해졌다 해도, 절정에 근접한 일류고수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순식간에 여덟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흑의장한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쓰러진 자들을 지나쳐 곧장 풍운장의 담을 넘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호각소리가 울렸다.
* * *
운양은 구양조의 부인과 새로이 영입한 여량삼호 형제가 풍운전으로 들어오자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여량삼호는 삼십 대 후반의 나이로, 비록 절정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산서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고수들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지닌 무공보다 의협심으로 더 유명했다.
운양은 그들을 끈질기게 수소문해서 끌어들인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곳을 빠져나가면 곧바로…….”
운양의 설명이 다 끝나갈 즈음, 밖에서 급박한 호각 소리가 울렸다.
삐익! 삐이익!
대경한 운양이 눈을 부릅뜨고 벌떡 일어났다.
“설마……?”
구양손이 다급히 물었다.
“적인가?”
“적이 아니라면 비상호각을 불어댈 리가 없습니다. 어서 가시죠!”
운양은 빠르게 대답하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사람들은 다급히 운양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안쪽 방으로 들어간 운양은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탁자를 치웠다.
그러고는 벽을 만져 고리를 찾아냈다.
끼이익!
고리를 잡아당기자 벽이 통째로 당겨지고, 곰팡이 냄새가 확 밀려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곰팡이 냄새에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적이다!”
“적을 막아라!”
“제, 제왕성이다! 도망…… 으악!”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사람들의 등을 떠밀었다.
구양조와 그의 부인이 먼저 들어가고 운양이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뒤를 따라 비밀통로로 받을 딛던 구양손이 멈칫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건가?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근처의 사람이라도 부르면 몇 명이라도 구할 수 있을 것 같네만.”
운양이라고 해서 어찌 그러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제왕성이 작정하고 공격한 이상, 구하려고 나가봐야 나간 사람들의 생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구양 대협!”
“운 방주 말대로 일단 몸을 피하고 보세, 아우.”
운양과 구양조가 구양손을 재촉했다.
구양손은 운양과 구양조를 번갈아보고는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들리는 비명과 악다구니!
수하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소리다.
그 소리에 구양손의 가슴에서 의기가 끓어올랐다.
몇 달 간의 노력으로 본신무공 중 칠팔 할 정도는 되찾은 상태. 잘 하면 몇 정도는 구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음을 굳힌 구양손은 여량삼호를 향해 소리쳤다.
“먼저들 가게! 형님도 먼저 가십시오! 제가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데려오겠습니다.”
구양손은 빠르게 소리치고는, 여량삼호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엉겁결에 여량삼호가 비밀통로로 들어가자 구양손은 벽을 밀어 닫고 밖으로 달려갔다.
구양조가 소리치며 구양손을 불렀다.
“아우!”
운양은 다시 위로 올라가려는 구양조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곧 오실 테니 어르신이라도 먼저 가셔야 합니다! 어서요!”
구양조는 운양의 손길에 이끌려 안쪽으로 내려갔다.
한쪽 팔을 쓸 수 없는데다 대부분의 공력마저 잃은 그였다. 밖으로 나가봐야 구양손에게 짐만 될 뿐.
그걸 아는 이상 피눈물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가서 도우면 어떻겠소?”
여량삼호 중 첫째인 여호원이 나섰다.
그러나 운양은 그들이 나가봐야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허락할 수 없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놈들이 오면 비밀통로를 들킬지도 모릅니다. 일단 통로를 빠져나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 보지요.”
“하지만 구양 대협이…….”
“혼자 몸이면 어떻게든 빠져나오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은 그분을 믿는 수밖에요.”
한편, 구양손은 검을 찾아 들고는, 문을 한 뼘 정도 열고 조심스럽게 밖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장원의 마당에서는 참혹한 도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당 곳곳에 널브러진 시신들이 즐비하다.
풍운장 내의 인원은 무사 사십여 명과 하인 삼십 명을 합쳐서 칠십여 명 정도다. 그런데 호각소리가 나고 잠깐 사이에 무사들 중 반은 죽은 듯 보였다.
‘실력에서 너무 차이가 나.’
단순한 무사들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고수들이다.
도저히 끼어들 엄두도 나지 않는 상황. 누군가를 부른다는 것조차 쉬워 보이지 않는다.
“빌어먹을!”
구양손은 이를 지그시 악물고 비밀통로가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벽 앞에 선 그는 구석에 삐죽 나와 있는 고리를 보았다. 고리를 잡아당기면 문을 여는 거야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고리를 잡지 않고 망설였다.
자신이 들어가면 흔적이 남는다. 탁자가 치워져 있으니 놈들이 수상하게 여길지 모르는 일.
어금니를 지그시 악문 구양손은 오히려 고리를 잡아서 뜯어내고는, 탁자를 움직여서 통로의 입구를 감추었다.
“제길, 이판사판이지 뭐.”
구양손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돌아섰다.
이제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었다.
“까짓 거,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오랜만에 피가 끓었다.
조양표국에서 도혼단과 싸울 때처럼.
‘그날은 정말 굉장했는데…….’
씩, 웃은 구양손은 방을 나와 전각의 문을 향해 달려갔다. 뒷문 쪽으로.
그가 뒷문을 막 빠져나간 순간!
쾅!
전각의 앞문이 부서지며 세 명의 흑의장한이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젠장! 빨리도 왔네!’
구양손은 엉덩이에 불이 붙은 황소처럼 정신없이 몸을 날렸다.
“저기 한 놈이 도주한다! 잡아!”
“멈춰라!”
뒤에서 침입자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구양손은 그들의 말을 들어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뒤를 보지도 않고 전력을 다해서 담장으로 달려갔다.
남은 거리는 오 장. 그는 풍운장의 담장을 넘기 위해서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그때였다.
“쥐새끼가 어딜 도망가려 하느냐?”
나직한 일갈과 함께 엄청난 경력이 밀려들었다.
구양손은 이를 악물고, 몸을 날린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쩌정!
손아귀가 찢어지고 검이 손에서 빠져나갈 것만 같은 가공할 충격이 구양손의 전신을 흔들었다.
이 장 뒤로 튕겨진 구양손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꾹 참고, 상대의 경력과 부딪친 충격을 이용해서 옆으로 몸을 틀었다.
모용회는 구양손이 도주하는 걸 보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 번 부딪쳐본 결과로 상대의 무위를 알아냈다.
겨우 일류의 경지에 오른 자다. 절정의 경지에도 오르지 못한 자를 직접 쫓아가기 위해서 자리를 지울 수는 없었다.
그는 담장 위에 서서 수하들이 구양손을 쫓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제 쥐사냥이 거의 끝나가는 상황.
그런데 뭔가가 미진하다.
‘역시 쥐구멍이 있다는 건가?’
구양손은 목구멍으로 치솟는 핏덩이를 억지로 눌러 삼키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적의 공격을 피했다.
한 명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자들이었다. 그간 쌓인 경험이 없었다면 사오 초를 받아내기도 전에 죽음을 당했을 것이었다.
일개 수하들이 이렇게 강하다니. 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이리도 강하단 말인가!
‘제길!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그는 적을 물리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살아서 도주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목적이었다.
문제는 도주조차 쉽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가 담장으로 밀린 채 흑의장한의 공세를 겨우겨우 감당하고 있을 때였다.
전음 한줄기가 귀청을 파고들었다.
<옆으로 물러서라!>
구양손은 누가 보낸 전음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옆으로 구르듯이 비켜났다.
순간!
쉬이익!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그의 몸 위로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땅! 퍽!
구양손에게 공세를 퍼붓던 흑의장한은 어깨를 움켜쥔 채 뒤로 물러섰다.
절호의 기회!
구양손은 땅을 박차고 담장을 향해 달렸다.
뒤늦게 두 명의 흑의장한이 그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와 동시, 두 개의 나뭇가지가 비도처럼 어둠을 가르며 흑의장한을 향해 날아갔다.
쉬식!
이를 악문 구양손은 담장이 보이자, 뒤쪽의 결과는 돌아보지도 않고 몸을 날렸다.
찰나였다.
“쥐새끼가 어딜!”
노호성이 어둠을 흔드는가 싶더니, 한 자루 검이 십오륙 장의 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구양손의 등을 향해 날아들었다.
쉬이익!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든 검은 막 담장을 넘어가려던 구양손의 등을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퍽!
‘크억!’
구양손은 숨이 콱 막히는 기분과 함께 전신의 힘이 쭉 빠져버렸다.
‘제기랄…….’
순간, 누군가가 축 처진 그의 몸을 낚아챘다.
구양손은 고개를 돌려서 자신을 움켜쥔 자를 보고 싶었지만,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어디서 감히!”
후루룩, 허공으로 떠오른 모용회는 구양손을 구해가는 정체불명의 복면괴인을 향해 쌍장을 뿌렸다.
삼 장의 거리를 두고 웅혼한 장력이 복면괴인의 등을 향해 밀려갔다.
복면괴인은 한 손으로 구양손을 옆구리에 끼고, 나머지 한 손으로 모용회의 장력에 대항했다.
쾅!
일성 굉음과 함께 어둠이 뒤흔들리며 복면괴인의 신형이 담장 너머로 훌훌 날아갔다.
모용회는 뒤늦게야 복면을 쓴 괴인이 자신의 장력을 이용했다는 걸 알고 다시 땅을 박찼다.
“너구리같은 놈이!”
하지만 그 사이 괴인은 한 걸음에 칠팔 장씩 이동하며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용회는 복면괴인을 쫓으며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너희들은 쥐구멍을 찾아라! 분명 장원을 빠져나가는 비밀통로가 있을 것이다.”
비밀통로는 풍운장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일반가옥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곳 역시 풍운장의 소유였다.
운양은 비밀통로를 빠져나오자마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출구가 있는 곳은 그리 크지 않은 방이었다.
‘아무도 없나?’
그때 한 사람이 출구가 있는 방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운양은 긴장된 표정으로 방문을 바라보며 비밀통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곧 밖에서 긴장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분이 방문하신 겁니까?”
들어본 목소리. 운양의 얼굴이 펴졌다.
“나야, 구옥.”
상대도 운양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다급히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밀호방의 십칠호 정구옥이었는데, 비밀통로가 열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방주?”
“제왕성이 쳐들어왔다. 혼자야?”
운양이 나직한 목소리로 다급히 대답하고 방 밖을 둘러보았다.
“십육호가 같이 있었는데, 지금 풍운장을 살펴보러 갔습니다.”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일. 운양은 일단 십칠호에게 빠르게 명을 내렸다.
“이분들을 이동시켜야 하니, 나가서 상황을 살펴봐라.”
“예, 방주.”
십칠호가 황급히 밖으로 나가자, 운양은 비밀통로에 있던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