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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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43화
143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오. 각 조당 한 사람씩 그곳을 아는 사람을 붙여 주겠소.”
“알겠소. 그럼 바로 이동합시다.”
그가 적극적으로 찬성하자 천룡방의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암천회와 천룡방의 간부들을 바라보며 주의를 주었다.
“각 조의 인원은 스무 명 정도로 하고, 행적이 남지 않도록 철저하게 조심해야 할 거요. 적에게 발각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조는, 절대 백천산이나 수양으로 가지 말고 평정이나 양천에 머물면서 연락을 기다리시오.”
평정이라는 말이 나오자 철검보의 무사들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때 구양소현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회주, 철검보에 들렀다 가면 안 될까요?”
용설의 부탁을 외면한 독고무령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독고무령이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가면서 들르도록 하지.”
구양소현의 차갑게 얼어붙었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고마워요.”
* * *
홍시처럼 달아오른 석양이 서산에 부딪쳐 붉은빛을 쏟아낼 무렵. 철검위와 암천위만 대동한 독고무령이 철검보에 도착했다.
철검보는 불길이 타오르던 그날의 상황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손님들을 맞이했다.
담장도 검고 땅도 검다.
반쯤 무너진 채 흉물스럽게 서 있는 검게 탄 건물들.
불길에 타버려 숯처럼 변한 앙상한 나뭇가지.
스산한 바람에, 화마의 잔재 사이에서 자라나던 잡초가 흔들린다.
독고무령은 처참하게 바뀐 철검보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 한곳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저만치 구양소현이 넋을 잃고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소리는 나지 않지만,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 우는 듯하다.
그녀는 철검보에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과거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행복했던 과거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시커멓게 타버린 건물과 나무들뿐.
아마 지금 구양소현의 마음속에서는 하얀 재만이 날리고 있을 터였다.
“회주, 정말 보주가 살아있을까?”
옆에서 구양소현을 보고 있던 진사혁이 나직이 물었다.
독고무령도 그 일에 대해선 확실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시신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불길에 타버려 뼈만 남았을 수도 있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지는 것은, 독고무령 일행이 빠져나간 반대쪽으로 부상당한 몇 사람이 빠져나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늘은 알겠지.”
“그분이 살아 계시면 구양 누님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는데…….”
진사혁은 구양은의 안위보다 구양소현이 걱정되는 듯했다.
독고무령은 진사혁의 마음을 알기에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구양소현이 몸을 돌리더니 이를 악문 모습으로 다가왔다. 철검보에 도착한 지 반 시진, 어스름이 철검보를 짓누를 즈음이었다.
“그만 가요, 회주.”
구양소현의 눈가에는 굵은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안쓰럽게 보였는지 진사혁이 품속에서 작은 천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저기, 누님. 이걸로 얼굴을…….”
구양소현은 천을 받아들고 대충 얼굴을 닦았다. 그러고는 천을 진사혁에게 건네고 돌아섰다.
“고마워, 곰.”
돌아서는 그녀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사혁은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독고무령은 돌아선 구양소현의 힘없이 처진 어깨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려 철검보를 훑어보았다.
어둠이 내리는 철검보는 을씨년스러웠다.
수백의 생명이 사라진 곳이어서 그런지 귀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세상에 영원히 지속되는 영화는 없다고 했던가? 위지천백, 노태군. 그대들의 영화도 절대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제6장 태원(太原)에 혈풍이 불어오고……
산서가 또다시 요동쳤다.
단순히 요동친 것이 아니라 화산이라도 폭발한 것처럼 뒤흔들렸다.
-서연에 남아있던 제유 공노명이 호위대와 함께 암천사신 독고무령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싸움이 끝나갈 즈음, 무천단이 나타나서 양대 세력의 남은 인원들을 척살했다고 한다!
-무천단은 어디에 있는가!
-한을 지닌 자들이여! 암천사신을 찾아가자!
제왕성에 오랜 세월 한을 품어온 사람들이 무천단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힘이 없어 곁가지처럼 지켜보기만 했던 그들에게 무천단의 활약은 어둠 속에 피어오른 마지막 등불과도 같았다.
여름 햇살에 산서의 황무지가 뜨겁게 달구어지던 유월 초.
산서의 강호인들은 산서를 휩쓸 제왕성의 분노를 걱정하며 숨죽인 채 상황을 주시했다.
하지만 제왕성은 더위 먹은 나귀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고요해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루, 이틀…… 닷새…….
제왕성의 침묵이 길어지자 수많은 억측이 돌기 시작했다. 심지어 제왕성이 겁을 먹은 것 아니냐는 말조차 돌았다.
그러나 제왕성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더욱 겁에 질려 깊숙이 몸을 숨기고 숨소리조차 죽였다.
그들은 아는 것이다.
제왕성의 침묵은 폭풍의 전조(前兆)!
그들이 침묵을 깨고 검을 뽑으면, 지금까지 흘렀던 피보다 훨씬 더 많은 피가 산서의 산하를 붉게 적실 거라는 걸.
그렇게 제왕성이 침묵에 잠겨 있던 어느 날.
태원 동문을 지키는 수문위장 장추가 집에서 쉬고 있는데, 흑의장한 하나가 그를 찾아왔다.
“뉘슈?”
장추는 지위에 대한 오만함이 몸에 젖어 있는 전형적인 관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자신 앞에 나타난 자에게는 함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상대의 회색 눈을 보는 순간 오금이 저린 것이다.
“그대가 동문을 지키는 위사들의 수장, 장추라는 잔가?”
아랫사람을 대하듯 깔아뭉개는 말투.
장추의 눈이 쭉 찢어져 올라갔다. 그래도 꾹 참고 되물었다.
“그렇긴 한데…… 왜 그러슈?”
“나와 함께 잠깐 갈 곳이 있다.”
“킁, 나는 일이 이제 막 끝나서 좀 쉬어야겠수. 그러니 그만 가보슈.”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너는 무조건 나와 함께 가야 된다.”
“가지 않겠다면?”
순간이었다. 눈앞에서 뭔가가 번쩍, 하는가 싶더니, 한 자루 검이 장추의 목에 닿았다.
“그럼 머리만 떼어갈지도 모르지.”
검날의 싸늘한 감촉. 죽은 자의 눈처럼 한 점 동요도 없는 회색 눈.
장추는 갑자기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허풍이 아니다!
그는 앞에 있는 자가 충분히 말대로 하고도 남을 자라는 걸 본능으로 느꼈다.
“대, 대체 왜 나를……?”
“너무 걱정하지 마라. 순순히 말하면 오히려 돈까지 받아서 돌아올 수 있으니까.”
“나, 나는…….”
장추는 뭔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흑의장한은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한 가지 더. 너의 졸개 셋도 그곳에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 나를 따라가겠는가, 아니면 머리만 따로 보내겠는가?”
흑의장한은 그 말을 하며 조용히 웃었다.
장추는 그 웃음을 본 순간, 하체에서 물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가, 가겠소.”
장추가 흑의장한과 함께 간 곳은 서쪽 성문 근처에 있는 사합식의 작은 집이었다.
하지만 그 집은 규모가 작음에도 지하석실이 만들어져 있었다. 흑의장한은 장추를 곧바로 그곳으로 데려갔다.
장추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억지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쪽은 제법 큰 석실이었다.
유등불이 타오르는 석실 안에는 흑의장한과 똑같은 흑의를 입은 두 명의 무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 있는 쇠로 된 의자에는 세 사람이 묶여 있었는데, 그 세 사람은 자신의 졸개들이었다.
피로 목욕한 듯 시뻘겋게 변해 졸개들을 본 장추는 두려움조차 잊고 버럭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짓……!”
하지만 그는 소리를 다 지를 수도 없었다.
퍽!
눈앞이 하얗게 변한 장추는 입을 쩍 벌린 채 정신을 잃어버렸다.
회색 눈의 사나이, 제왕밀전의 이령주인 남호종은 장추가 힘없이 무너지자 흑의장한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의 흑의장한은 쇠로 된 의자에 묶인 장추의 졸개들을 풀어주었다.
의외로 세 사람은 별 어려움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을 향해 남호종이 말했다.
“순순히 입을 열어서 살려주는 거다. 그러니 밖에 나가 절대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될 게야.”
세 사람의 얼굴이 밝아졌다. 영락없이 죽을 줄 알았는데 큰 상처도 없이 살아났으니, 그들로서는 하루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 셈이었다.
세 사람은 허리를 땅에 닿도록 굽혔다.
“어찌 소인들이 나으리의 말씀을 어기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집을 나가기 전에 몸에 묻은 피를 씻도록.”
“예, 나으리.”
그랬다. 세 사람의 몸에 묻은 피는 상처를 입어 묻은 피가 아니었다. 장추를 속이기 위해 묻힌 것일 뿐.
남호종은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장추를 바라보며 하얀 웃음을 지었다.
“놈을 깨워라.”
촤악!
물이 뿌려지자 장추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남호종의 회색 눈과 마주치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아이들은…… 어떻게 된 거요?”
“그대가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달려있지. 제대로 된 대답을 한다면, 너나 그들도 살 것이고,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너 역시 그들 꼴이 될 것이야.”
장추는 입술이 떨려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뭐, 뭘…… 워, 원하…… 는데……?”
“사월에서 오월 초,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사들이 동문을 통해 들어왔다고 하더군. 그들에 대해서 말해 봐.”
“무, 무사들? 무사들이야…… 하루에도 수십 명씩…….”
“내가 원하는 것은, 네놈이 돈을 받아먹고 통과시킨 자들을 말하는 거다. 한 번에 십여 명씩 들어왔으니 설마 모른다고는 않겠지?”
그제야 장추는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그때 남호종이 녹이 잔뜩 슨 톱을 하나 들어 장추의 어깨에 대고 말했다.
“미리 말하지만, 우리는 제왕성에서 나왔다. 무천련의 잔당을 잡기 위해서라면 너 하나쯤 갈가리 찢어 죽이는 거야 일도 아니지. 죽고 나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 순순히 부는 게 좋을 거다. 물론 그자들의 인상착의까지 기억하면 더 좋고.”
부들부들 떨던 장추는 톱이 자신의 어깨를 그어 내리자 입을 딱 벌렸다.
“끄어……. 자, 잠깐…… 만…….”
남호종은 서너 번 긋다다 손을 멈추었다.
비록 깊게 박히진 않았지만, 장추의 어깨에선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최대한 머리를 짜내라. 일 년 전 꿈속에서 보았던 사람의 얼굴까지 모조리 기억해내. 그것만이 네가 살 길이라는 점, 명심하고.”
“흐으, 흐으…… 알았으니…… 제발…….”
장추는 무려 다섯 시진에 걸쳐 머리를 쥐어짰다.
자신의 머리가 이렇게 좋았던가?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그는 많은 것을 기억해냈다.
당시 동문을 통과한 무사들의 숫자는 물론이고, 그들 중 몇몇은 얼굴까지 떠올랐다.
그는 녹이 잔뜩 슨 톱에 몸이 잘려서 죽고 싶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라면 세 살 때 굶어 죽은 부모님의 얼굴까지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호종은 그가 말한 내용은 모두 받아 적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다른 흑의장한은 장추가 말한 것을 토대로 사람의 얼굴을 그렸다.
다섯 시진이 지나자, 모두 열일곱 명의 얼굴이 종이 위에 그려졌다. 장추는 그중 아홉 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호종은 무감정한 회색 눈으로 아홉 장의 그림을 살펴보고는 옆의 흑의장한에게 넘겨주었다.
“령주께 가져가라.”
“예, 조장.”
남호종은 흑의장한이 종이를 말아들고 밖으로 나가는 걸 보며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태원에 벌써 피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군.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