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41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41화
141화
배후에서 공격한 자들을 단순하게 무천련의 무사들이라 생각했거늘, 그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무공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한다면.
“훗, 알아봤으면 이제 죽어라!”
냉소를 흘린 북리사웅은 시퍼런 검기가 넘실거리는 검을 뻗어 군호광을 가리켰다.
북리사웅의 무위는 군호광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군호광이 지친 몸이었으니, 그가 조금만 적극적으로 몰아붙였다면 끝을 낼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북리사웅은 자꾸만 주변 광경에 신경을 썼다. 피가 튀고 살점이 튈 때마다 멈칫거리며 공격의 고삐를 늦췄다.
비록 그 시간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군호광 같은 고수에겐 생명줄과도 같았다.
군호광은 어렴풋이 북리사웅의 마음을 눈치 채고, 그 점을 철저히 이용했다.
퍽!
허리가 잘린 시신 하나가 군호광의 발길질에 북리사웅을 향해 날아갔다.
북리사웅은 군호광을 공격하던 검의 방향을 틀어 시신을 쳐내고는, 옆으로 두 걸음 미끄러졌다.
순간, 군호광은 혼신의 힘으로 검을 휘둘러 북리사웅을 공격했다.
붉은 광채가 번뜩이고, 한 줄기 검강이 북리사웅을 사선으로 쓸어갔다.
“어림없는 짓!”
북리사웅은 냉랭히 소리치면서, 군호광의 검강 속으로 검을 집어넣고 휘저었다. 이미 그의 검첨에서도 시퍼런 검강이 솟구친 상태였다.
후우우웅!
두 사람의 강기가 엉켜드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콰광!
굉음과 함께 군호광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지금까지의 격전을 생각하면 의외라 할 정도.
그러나 그것은 군호광이 원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삼 장 밖에 내려선 군호광은 땅을 박차고 신형을 날렸다.
튕겨진 여세를 빌어 신형을 날린 상황. 북리사웅이 미처 잡을 수 없는 빠르기였다.
“네놈이 어디서!”
북리사웅은 뒤늦게 군호광의 의도를 알고 버럭 소리치며 쫓아갔다.
하지만 그 사이, 군호광의 신형은 십여 장 밖을 달렸다.
‘분명 등천신룡검이었어! 천룡방주의 무공이 어떻게 여기 나타난 거지?’
천룡방주의 무공이 나타난 것은 절대 단순하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일부가 아닌, 천룡방 전체가 본격적으로 끼어들었다는 말.
어떻게든 그 사실을 전해야만 했다.
군호광은 적이 많지 않을 곳을 골라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십여 번의 도약으로 사오십 장을 벗어난 그는, 계곡 양편의 등성이가 눈앞에 보이자 즉시 땅을 박차고 신형을 뽑아 올렸다.
바로 그때!
고오오오!
온몸을 짓누르는 가공할 기운이 뒤에서 밀려왔다.
이를 악문 군호광은 몸을 둥글게 말고는, 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쾅!
귀청을 찢어발기는 단발음!
온몸이 울리며 눈앞이 노래졌다.
하지만 그는 혀를 깨물어 정신을 차리고 계곡의 등성이로 올라섰다.
“웩!”
한 움큼의 핏물이 그의 입에서 쏟아졌다.
군호광은 입을 닦을 새도 없이 발을 놀렸다.
뒤에서 한 사람이 날아오는 게 보인다. 자신이 혼신의 힘으로 막아낸 것은 그자가 날린 한 자루 철검이었다.
이십여 장 밖에서 검을 던져 자신을 부상 입힐 자가 있을 줄이야!
노태군에 못잖은 무공을 지녔다는 뜻.
두려웠다. 그가 오기 전에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독고무령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서 내력을 실어 던지고, 검을 따라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군호광이 죽을힘을 다해 도주하는 걸 보고는 그대로 놔두었다.
‘북리사웅, 어리석게 천룡방주의 무공을 드러내다니.’
독고무령은 군호광이 사라진 숲을 싸늘한 눈으로 응시하고는 몸을 돌렸다.
현세의 지옥으로 변한 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뻘건 핏물이 내가 되어 흐른다.
그곳에서 움직이는 자들은 대부분이 암천회와 천룡방의 사람들뿐.
마침내 싸움이 거의 끝나간다.
와중에도 끝까지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는 자가 보이긴 하지만, 극히 미미한 숫자다.
완벽한 승리!
독고무령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서서히 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위지천백, 이제 숨겨 놓은 힘을 드러내 봐라!’
공노명이 말했다.
제왕성의 힘은 결코 겉으로 드러난 게 전부가 아니라고. 위지천백에겐 세상 사람들이 미처 모르는 숨겨진 힘이 있다고.
그러면서 죽기 전, 조소를 띤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성주가 직접 나서면…… 세상이 피로 물들 것이다. 나의 죽음으로 그 일이 앞당겨질 것이니…… 너는 반드시 오늘의 일을 후회할 것이다, 독고무령.”
‘후회라……. 공노명, 그대가 어찌 알겠느냐? 처음부터 후회할 수도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나라는 것을…….’
독고무령은 눈을 내리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싸움이 완전히 끝나고, 암천회와 천룡방의 사람들이 사상자를 돌보며 부산하게 오가는 게 보였다.
독고무령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북리사웅은 붉게 타오르는 하늘 아래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완벽하게 승리했다.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승을 했으니 즐거워야 마땅했다. 환호하는 수하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해야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빈 듯한 기분.
주위를 둘러보는 북리사웅의 얼굴이 쥐어튼 것처럼 일그러졌다.
사방이 핏구덩이요, 잘려지고 부러진 시신들이 널려 있다. 개중에는 내장이 흘러나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시신들도 많다.
적뿐이 아니라 수하들의 시신까지.
생사를 걸고 싸울 때는 그렇게까지 생각되지 않았는데, 막상 싸움이 끝나고 정신을 차리니 그 모든 게 낯설기만 하다.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는 걸까?
내가 정말 저자의 목을 자른 걸까?
자신의 검에 죽어간 자가 눈을 뒤집어 깐 채 자신을 노려본다.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은 표정.
북리사웅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빈속을 쥐어짜서라도 무엇이든 토해내고 싶을 정도였다.
‘빌어먹을!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개싸움이 아니었어!’
하지만 자기변명일 뿐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흐르는 전쟁이 어디 있단 말인가.
북리사웅도 그걸 모르지 않기에 입술을 씹으며 억지로 고개를 틀었다.
그때 문득, 저만치 암천회의 사람들을 향해 다가가는 독고무령이 보인다.
독고무령을 바라보는 북리사웅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처참하게 죽었는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다니. 정말 수라귀 같은 놈이군!’
그가 생각하기에 독고무령은 절대 정파의 무인이 될 수 없었다.
잔혹한 마도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긴 단체의 이름을 암천회라 지은 것부터가 스스로를 흑도의 무리라 설정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흥! 마도의 무리에게 질 내가 아니다. 최후에 이기는 자가 진정한 승자가 된다 했다. 독고무령, 오늘은 네가 주인공이 되었지만, 최후의 승자는 내가 될 것이다!’
그때 장만익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소방주, 우리도 저쪽으로 가세.”
“꼭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금 삐딱하게 들리는 목소리.
장만익은 노회한 강호인답게 북리사웅의 마음을 눈치 채고는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이곳에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 보세.”
북리사웅도 계곡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할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힘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적을 공격했는데도 천룡방의 무사와 암천단의 무사 중 오십여 명이 죽고, 전궁산장과 일원장의 무사들 역시 이십여 명이 죽었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자는 그 배도 더 되었다.
사람들은 동료들의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묻고 부상자들을 손봤다.
그리고 어둠이 내려앉자, 부상자들을 부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5장 천검무왕(天劍武王)의 분노
독고무령은 암천회와 천룡방의 사람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한 후, 태행산맥의 줄기를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독고무령이 은룡산장의 거점인 귀원장을 치지 않고 그냥 지나치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두 시진가량 이동하고 잠시 휴식을 취할 때다. 장만익이 넌지시 물었다.
“회주, 왜 귀원장을 그냥 두는 건가? 다 도주하고 기껏해야 부상자들만 남아 있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인지 독고무령의 답을 기다렸다.
독고무령의 생각은 그들과 조금 달랐다. 이견이라기보다는 관점의 차이였다.
“남아 있는 숫자가 얼마 안 된다 해도, 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들면 적지 않은 피해를 보게 될 겁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쓸데없는 피해를 볼 필요가 없지요.”
“그래도 거점을 부수면 의미가 크지 않겠나?”
그에 대한 것도 생각이 조금 달랐다.
“거점이 남아 있어야 그들이 하북에서 건너와도 파악하기가 쉬워집니다. 공격해서 불필요한 피해를 보는 것보다 귀원장을 이용해서 적을 끌어들이는 것이 더 나을 거라 본 것뿐이지요.”
거점이 없어지면 그들의 행적을 파악하는 데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물론 그들이 또 귀원장을 거점으로 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곳에 거점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은 이상, 멀쩡한 거점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전체적인 상황으로 봤을 때, 귀원장을 놔두는 것이 치는 것보다 득이었다.
장만익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바람에 용설의 마음만 다급해졌다.
귀원장이 바로 소양이 갇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입술을 깨물고 독고무령에게 말을 건넸다.
“회주, 귀원장으로 가지 않을 거라면, 저라도 보내주세요.”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독고무령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혹시 그곳이 소양이라는 사람이 잡혀 있는 곳?”
“맞아요.”
독고무령의 표정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나인창마저 죽은 마당. 용설로서는 더욱더 소양이라는 사람을 구하고 싶을 것이었다.
“그대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가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거다. 그대가 원하는 그 어떤 것도 그곳에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용설의 눈빛이 자잘한 파동을 일으켰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고무령의 말속에 깃든 뜻을 알아듣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철수하는 자들이 소양을 남겨 놓고 갔을 리가 없다는 말.
“정말…… 없을까요?”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했던가? 용설, 그대가 그들의 수장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끝내 용설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소양은 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쓸모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단 둘 남은 가문의 핏줄 중 하나로서 붙잡고 있으면 뭔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데리고 갔을 가능성이 컸다.
고개를 든 용설은 입술을 깨물어 북받친 마음을 최대한 자제하고 독고무령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소양은…… 이 세상에 남은 저의 유일한 핏줄이에요.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소양이를 꼭 구할 거예요. 회주, 도와줄 수 있나요?”
독고무령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용설은 아직 자신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어떤 비밀이 있어서 감추는 걸까?
궁금했지만 직접 말해줄 때까지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묻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처럼 용설도 같은 마음일 테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은룡산장을 반드시 무너뜨릴 거라는 것. 그때까지 소양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구할 수 있겠지.”
용설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막연한 대답이었다. 문제는 그 이상의 다른 방법이 당장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내 모든 걸 걸고 약속하지.”
그들은 위지천백을 움직여 나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들. 하늘과 땅을 붉게 물들이는 한이 있어도 모조리 죽이고야 말 것이다.
세상이 나를 아수라라 부른다 해도!
독고무령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지며 몸을 돌렸다.
* * *
어둠이 관제산을 집어삼킨 술시 무렵. 제왕성에 공노명의 죽음이 알려졌다.
위지천백은 보고를 올린 신이당의 당주 능효를 내보내고 제왕전 문을 걸어 닫았다.
사람들은 걱정이 되었지만, 누구도 제왕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제왕성의 장로와 가족들조차 제왕밀위의 제지를 받고 몸을 돌려야만 했다.
뎅, 뎅, 뎅…….
그렇게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온 후에야 위지천백의 입이 열렸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나서야 할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