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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135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65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135화

 

135화

 

 

 

 

 

 

얼굴이 일그러진 범여종은 눈알만 돌려서 육풍원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다 뒤늦게 육풍원의 정체를 알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밀려들던 반탄력은 거의 사라진 상태. 다급히 내력을 회수한 그는 육풍원을 향해 돌아섰다.

 

“혹시 전마 육 선배가 아니시오?”

 

“우리가 만난 지 아마 십 년이 넘었지?”

 

“정확히 십일 년이지요. 그런데 육 선배께서는 무천단, 아니 암천회와 어떤 사이이기에…….”

 

“내가 임시로 암천회 최강의 단체, 암천단을 맡고 있다네.”

 

육풍원이 짐짓 목에 힘을 주었다.

 

어차피 밝혀질 일. 기왕이면 남들보다 강한 단체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의 성질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육 선배께서요? 강호 일에 거의 끼어들지 않던 분이 어떻게……?”

 

육풍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냥 넘어가길 바랐다. 비무에서 패한 게 무슨 자랑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일.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빌어먹을 놈, 하필 그런 걸 물어?’

 

그는 절대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열지 않자, 옆에 있던 우도진이 슬쩍 끼어들었다.

 

“회주에게 깨져서 어쩔 수 없이 맡은 거지 뭐.”

 

육풍원이 우도진을 째려보았다.

 

“그래도 나는 자네처럼 땅바닥에 처박히지는 않았어.”

 

“나야 큰 부상 없이 끝났지만, 자네는 가벼운 내상까지 입었잖아?”

 

“그거야 그만큼 내가 강하니까 반발도 컸던 거지.”

 

“아마 회주가 사정을 봐주지 않았으면 더 큰 내상을 입었을 걸?”

 

“회주가 어디 봐주는 사람이냐?”

 

“어쨌든 나는 멀쩡하고 너는 내상을 입었다는 것, 그것만이 진실이지.”

 

“오 초 만에 꺼꾸러진 게 무슨 자랑이라고…….”

 

“흥! 팔 초나 오 초나. 오십보백보지.”

 

두 사람의 말다툼이 이어질수록 천룡방의 간부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들은 두 사람의 언쟁을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육풍원과 말다툼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귀창(鬼槍) 우도진임이 분명했다. 품에 안고 있는 창도 그렇고, 전마의 친구는 오직 그뿐이었으니까.

 

전마는 산서의 십대고수 중 한 사람. 거기다 귀창도 전마와 차이가 거의 없는 고수다.

 

그런 전마와 귀창이 오 초, 팔 초 만에 패했다고?

 

그 말을 믿으라는 것 자체가 웃기는 소리다.

 

하지만 장만익만큼은 그 말을 듣고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육풍원은 자신의 패배를 남에게 자랑할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그런 장난은 더욱 하지 않는다.

 

‘정말로 전마가 팔 초에 꺾이고, 귀창이 오 초에 처박혔어.’

 

장만익은 경악한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제왕성과 은룡산장에 동시타격을 주겠다는 것. 그저 계략만 믿고 진행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좀 더 신중하게 일을 진행해야겠어.’

 

그때 독고무령이 북리사웅을 직시한 채 입을 열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했다.

 

“장 장로님께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만, 서로 간의 약속이 어긋나서는 절대 안 된다는 점,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약속을 어긴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북리사웅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책임을 묻겠다는 말.

 

감히 천룡방의 후계자인 자신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불만을 터트리지 못했다. 귓속을 파고든 장만익의 전음 때문이었다.

 

<일단 받아들이게나.>

 

현재 천룡방의 지휘자는 자신이 아닌 장만익이다.

 

북리사웅은 차마 장만익의 말을 무시하지 못하고, 굳어진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 걱장 마시오.”

 

범여종도 북리사웅이 순순히 대답하자 인상을 구겼다.

 

‘제길,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는군. 단숨에 무천단을 휘어잡아 우리 뜻대로 움직이려 했거늘…….’

 

바로 그때, 밖에서 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떼로 몰려왔군.”

 

“킁, 무령이를 돕기 위해 온 모양이야. 그럼 얘들도 무령이 졸개들인가?”

 

“허허허, 그럼 이 신선어르신이 자비를 베풀어서 성약을 하나씩 선물해야겠군.”

 

독고무령은 쓴웃음을 지으며 밖을 향해 말했다.

 

“오셨으면 그만하시고 들어오시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밖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곧 문이 슬며시 열리더니 삼괴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들어온 그들은, 눈알을 굴려서 북리사웅과 범여종을 비롯한 천룡방의 간부들을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다가온 치선이 범여종의 위아래를 쓱 훑어보고 말했다.

 

“허허허, 좋은 몸이군. 아주 좋아. 내 선단을 잘 소화시킬 수 있겠어. 어떤가? 이거 한 알 먹어보겠나?”

 

치선이 손을 쑥 내밀었다. 언제 꺼냈는지 그의 손바닥에는 엄지손톱만 한 약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약을 먹으면 이틀 정도는 무공을 펼칠 수 없을 것이다.

 

전력 손실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독고무령이 치선을 말렸다.

 

“선공 어르신.”

 

치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뒤로 돌리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무슨 일로 부른 것이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세 분은 제 말이 있기 전에는 절대 제 곁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지요?”

 

독고무령은 조금 불안했지만, 실보다는 득이 많을 것이기에 삼괴를 데리고 다니기로 했다.

 

귀도가 뒷짐을 진 채 자신의 마음과는 조금 다르게 대답했다.

 

“흥, 우리도 다른 놈들과는 함께 있고 싶지 않다.”

 

마불이야 어차피 포기한 터였고.

 

“킁, 그런 걱정 말고, 죽이고 싶은 놈 있으면 말만 해라.”

 

치선은 어떻게든 새로 만든 약을 독고무령에게 먹이고 싶었다.

 

“허허허, 당연하지. 네가 다치면 내 선단이 필요할 텐데…….”

 

북리사웅과 범여종은 그 즈음에야 삼괴의 정체를 알았다.

 

장만익이 전음으로 알려준 것이다.

 

두 사람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맙소사! 북천삼괴가 왜 여기에……!’

 

‘저 강호의 골칫덩이들이 왜 암천회주의 말을 듣는 거지?’

 

경악한 두 사람은 남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북천삼괴가 암천회에 있다니!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 된 기분.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때 묵직한 목소리가 조양전에 울렸다.

 

“기다렸던 천룡방의 무사들이 왔으니 이제 움직이지요.”

 

모든 사람들의 눈이 독고무령을 향했다.

 

북리사웅과 범여종을 비롯한 천룡방의 간부들도 굳은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곧 독고무령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 싸움으로 승패가 결정 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의 적이라 할 수 있는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힘 상당부분이 소모될 겁니다. 우리의 전쟁은,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언젠가는 저들도 우리의 존재를 알게 될 테지만, 그 시기가 늦어질수록 동료들의 죽음도 늦춰질 겁니다. 모두 그 점을 명심하고, 움직임에 있어 최대한 조심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무거운 분위기에 전염된 듯 입을 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독고무령의 눈이 북리사웅을 향했다.

 

“바로 이동할 수 있겠습니까?”

 

분위기에 휩쓸린 북리사웅은 이런저런 말을 할 정신이 없었다. 그는 한마디로 짧게 대답했다.

 

“물론이오.”

 

“좋습니다. 그럼 점심을 먹은 즉시 각자가 맡은 위치로 이동하기로 하지요.”

 

독고무령의 주도하에 일사천리로 모든 것이 결정된 상황. 천룡방은 앞으로의 계획에 끼어들 틈도 없었다.

 

북리사웅은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장로님이 쉽게 상대할 자가 아니라더니, 헛말이 아니었어.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거다.’

 

 

 

* * *

 

 

 

산자락 곳곳에서 피어난 화향 대신 비릿한 혈향이 봄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퍼졌다.

 

아우성! 악다구니! 비명과 신음! 자기그릇이 깨지는 듯한 병장기 격돌소리!

 

시간이 지날수록 모란꽃보다 더 붉은 혈화가 귀원장 일대의 온 산을 뒤덮었다.

 

태양도 질렸는지 구름 속으로 몸을 숨기고, 산짐승들은 굴속에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싸움이 벌어진 지 두 시진이 지날 무렵, 아침 햇빛과 함께 해일처럼 밀려들었던 제왕성 무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일각, 산짐승들을 굴속으로 도망가게 만들었던 모든 소리들이 가라앉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는, 후퇴를 알리는 소리와 남은 자들의 신음소리뿐이었다.

 

마침내 뒤쫓는 자들의 함성도 들려오지 않는 기괴한 전쟁이 첫 번째 막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남은 자도, 후퇴하는 자도 알지 못했다.

 

이제 시작이라는 걸. 어둠이 밀려들고 있다는 걸!

 

 

 

조양표국을 나선 독고무령은 곧장 북쪽으로 올라갔다.

 

철검위와 암천위 그리고 삼괴가 그와 함께 움직였다. 목적지는 수양에서 오십 리 북쪽의 해수촌(解愁村)이었다.

 

해수촌은 오십여 호의 작은 산골 마을이었는데, 서연과 우현의 중간지점에서 남쪽으로 이십 리가량 떨어진 곳으로, 양쪽 상황을 살피기에는 최상의 요지였다.

 

미시 무렵, 독고무령이 삼괴를 비롯한 이십여 명의 호위대와 함께 해수촌에 도착하자, 밀호방의 요원들이 거점으로 쓰기 위해 마련한 통나무집으로 안내했다.

 

독고무령이 통나무집에 도착한 지 일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귀원장의 소식이 전해졌다.

 

“제왕성의 무사 일천 중 후퇴한 자는 육칠백. 그중 부상을 입은 자가 반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은룡산장의 무사 팔백 중 사망자는 대략 이백오십. 중경상자는 사백 정도입니다.”

 

독고무령은 이호가 밀호방 요원들로부터 전해진 보고를 마치자 곧 질문을 던졌다.

 

“제왕성은 곧바로 서연으로 향했소?”

 

“아닙니다. 그들은 삼십 리가량 후퇴한 후, 부상자를 치료하며 전열을 정비하고 있다 합니다.”

 

독고무령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바로 서연으로 가지 않고 전열을 정비한다는 것은 또 다른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재공격을 하겠다는 건가?”

 

독고무령의 독백에 이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회주.”

 

“그럼 서연에 있던 자들도 그들과 합류할 가능성이 크군.”

 

“그렇다고 봐야 할 겁니다.”

 

독고무령의 두 눈에서 해저의 일렁임 같은 파동이 일었다.

 

“암천단과 천룡방에 즉시 연락해서 뒤로 물러나라 하시오. 놈들이 이차 접전을 벌인다면, 그 후 작전을 개시할 것이니까.”

 

“예, 회주!”

 

“그리고 즉시 귀원장에 제왕성의 움직임을 전해주시오. 서연의 무리가 움직일 거라는 것, 무천련의 잔존세력이 그들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것까지.”

 

이호는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리고는,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회주!”

 

독고무령의 명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서연으로 간 사람들에게는, 놈들이 서연의 장원을 떠나면 즉시 나에게 연락하고 조심스럽게 그들의 뒤를 따르라 하시오. 내가 도착할 때까지 절대 공격하면 안 된다는 점 명심하라 하고.”

 

옆에 있던 석도명이 흠칫하며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회주께서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귀원장에 있는 자들이 소식을 들으면 보고 있지만은 않을 터. 결국 그들이 원하는 시기보다 더 빨리 싸움이 일어나겠지요. 물론 피해도 그만큼 많아질 테고. 그럼…… 우리가 굳이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소.”

 

석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상황이 독고무령의 예상대로 된다면, 제왕성과 은룡산장의 무사들은 만신창이가 된 후 암천회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될 터였다.

 

그 광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때 진사혁이 물었다.

 

“그럼, 아예 지금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독고무령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이차 접전을 벌일 것인지 아직 확실하지가 않아. 미리 움직였다가 저들이 엉뚱한 행동을 하면 그만큼 뒷수습이 어려워지네. 어차피 거리도 얼마 안 되니 서두를 이유가 없어.”

 

말을 끝내고 입을 다문 독고무령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깊어졌다.

 

‘서두르다가는 자칫 양쪽에서 공격을 받게 된다. 그럼, 최악이야…….’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이 있다. 저들이라고 해서 다시 친구가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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