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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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33화
133화
반쯤 부서진 담장. 다 낡은 건물들은 한 차례 큰 바람이 불면 먼지처럼 스러질 것만 같았다.
은룡산장의 사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
암천위는 일단 주변 지리를 살펴보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지고, 독고무령은 한때 대웅전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부서진 창문, 옆으로 기울어진 기둥, 지붕 한쪽은 구멍이 뚫려 하늘이 보였다.
‘비바람을 견디고 서 있는 것만도 다행이군.’
독고무령은 중앙에 서서 노을 진 서쪽하늘을 바라보았다.
‘멋지군.’
어느덧 유시가 지나 술시로 넘어가는 시각.
시뻘건 석양이 서산으로 떨어지면서 서쪽하늘이 숯불마냥 타오르며 붉게 물들고, 폐찰도 벌겋게 달구어졌다.
독고무령은 홍시보다 더 붉어진 석양을 반개한 눈으로 바라보며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마치 석양을 빨아들이듯이.
일순간 심장이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 드는가 싶더니, 문득 단목승이 동판에 남긴 구결이 떠올랐다.
독고무령은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른 동판의 구결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그때였다. 그의 가슴에서 청량한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달아오른 심장을 서서히 식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바람이 흐르는 것, 대기가 어둠에 물들어가는 것, 눈에 보이는 대자연의 모든 변화가 새롭게 느껴졌다.
손끝에 걸린 바람을 붙잡아 검처럼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과 하나가 되어 움직일 것만 같았다.
단목승이 남긴 동판의 구결 중 첫 번째. 승천만화(昇天萬和)의 입문은 그렇게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핏덩이처럼 붉은 석양이 막 서산으로 녹아들 무렵.
호로롱!
숲속에서 산새 소리와 같은 소성(嘯聲)이 들렸다.
상대가 오고 있다는 신호.
독고무령은 숨을 길게 내쉬며 태천일심의 기운을 갈무리했다.
‘후우, 아직은 때가 아닌가?’
승천만화는 입문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열릴 듯 말듯 애를 태우며 그를 시험했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실망하지 않았다.
일단 문턱에 발을 디딘 이상 곧 넘어설 수 있을 것이었다.
‘아쉽지만 할 수 없지. 일단 문턱을 밟았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아쉬움을 접은 독고무령은 쓴웃음을 지으며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때 염부중과 기호정, 전학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들이 계곡으로 진입했습니다.”
염부중의 말에 독고무령은 고개만 끄덕였다.
반각이 지날 즈음.
적수천을 비롯한 네 사람이 폐찰로 들어섰다.
독고무령은 폐찰로 들어서는 자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앞장서서 걷고, 세 사람이 좌우와 후면을 자연스럽게 호위하고 있다.
앞장서서 걷는 자의 나이는 삼십 대 중반 정도.
큰 키에 조금 길어 보이는 얼굴, 꾹 다문 얇은 입술과 흔들림 없는 눈빛, 침착하고 명석해 보이는 자였다.
그는 일정한 보폭으로 걸었는데, 그의 허리에서 달랑거리는 도는 일반 도보다 폭이 좁은 대신 길이가 한 자는 길었다.
‘쾌도를 쓰는가 보군.’
보고 있는 사이, 적수천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독고무령의 이 장 앞에서 멈춰서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적수천이라 한다. 오래 기다렸나?”
대뜸 아랫사람 대하는 말투로 묻는다.
떠보자는 건가?
그렇다면 그에 맞게 답하면 될 터. 독고무령은 짧게 대꾸했다.
“별로.”
적수천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건방지게 느껴지는 말투인데도 막상 꼬투리를 잡기가 애매하다.
그는 턱을 치켜들고 독고무령을 싸늘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대는 그대가 속한 곳에서 어느 정도의 권한이 있는가?”
“귀하가 속한 곳에서 귀하가 지닌 권한보다는 많을 거요.”
마치 상대를 놀리는 것 같은 대답.
적수천의 눈빛에 한기가 돌았다.
“내가 어떤 지위에 있는지 알고 있나?”
“꼭 그걸 알 필요는 없다고 보오만. 제왕성과의 싸움을 목전에 두고 최고책임자가 이 자리에 나오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오.”
당연히 그럴 거라는 자신 있는 말투.
적수천은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사실이니까.
피식, 마치 비웃는 것처럼 입술을 비튼 적수천이 비꼬듯이 말했다.
“생김새와 다르게 말재주가 뛰어나군.”
“칭찬해 줘서 고맙긴 한데, 귀하도 그리 잘생긴 얼굴은 아닌 것 같구려.”
생각지도 못한 반박. 적수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어이가 없는 한편으로 은근히 속이 쓰렸다.
솔직히 자신의 얼굴도 그리 잘생긴 얼굴은 아니다.
하지만 못생긴 사람에게 너 못생겼다고 하면, 기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마를 좁힌 그는 독고무령을 노려보며 마지막이라는 듯 목에 힘을 주고 쏘아붙였다.
“항상 사람을 대할 때 그런 투로 말하나? 정보장사를 하는 사람이 그래서는 오래 살기 힘들 텐데 말이야.”
독고무령도 적수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상대 나름 아니겠소? 나는 적절히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소만.”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본인이 더 잘 알 거 아니오?”
두 사람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기세를 잡기 위해 한 치도 밀리지 않는 신경전을 벌였다.
한마디, 한마디 비수가 번뜩이는 말투.
당사자들보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더 긴장될 지경이다.
눈을 가늘게 뜬 적수천은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독고무령을 짓눌렀다.
“세상에는 혀를 잘못 놀리는 바람에 제 명을 못사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아야 할 거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거 보니 시간이 많은가 보구려. 나는 귀하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오.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면 이제 그만 가봐야겠소. 밀린 대금이나 주시구려.”
독고무령은 처음이나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순간 적수천의 두 눈에 서리가 꼈다.
그때 적수천의 마음을 지레짐작한 장한 하나가 넌지시 으름장을 놓았다.
“겁이 없구나. 얼굴을 믿고 그러는가 본데, 입을 함부로 놀리면 목이 달아난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독고무령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 얼굴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요.”
“뭐야!”
적수천은 손을 들어서 수하의 행동을 말렸다.
“만경,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얼음장처럼 싸늘한 목소리.
발끈했던 장한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속하가 그만…….”
적수천은 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는, 다시 독고무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독고무령의 말대로 무의미한 말싸움 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어쨌든 아쉬운 것은 자신이었다.
“좋아. 자네가 원하는 대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내가 지닌 것 이상의 권한이 있다고 했던가? 그럼, 내 제의에 대한 판단도 이 자리에서 내릴 수 있겠군. 안 그런가?”
독고무령은 미리 준비한 가상의 문파 이름을 들먹이며 대답했다.
“우리 암문(暗門)은 정보를 사고파는 장사꾼이오. 어떤 말이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소. 그러니 일단 말해 보시오.”
판단을 이 자리에서 내릴 수 있냐는 말에,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만 한다.
교묘하게 정곡을 피해가는 대답.
적수천도 그걸 알았지만,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암문이라 했던가? 우리는 암문이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정보를 팔고 사는 장사꾼이오. 가격만 적당하다면, 지불할 여건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오.”
“단순히 정보만 팔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만의 눈과 귀가 되어 활동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지.”
기다리는 동안 어느 정도 짐작하기는 했다.
기실 기세싸움을 벌인 것도, 그러한 요구를 할 경우 상대가 자신을 얕보지 못하게 만들려 한 것이었다.
“은룡산장의 일부가 되라는 말이오?”
“바로 그거다. 그 대가로 일 년에 황금 일만 냥을 지불하지.”
황금 일만 냥이면 은자 이십만 냥이다.
밀호방의 일 년 총 예산이 은자 십만 냥. 그럼 십만 냥이 고스란히 남는다는 말이었다.
‘운양이 들었으면, 주먹이 통째로 들어갈 만큼 입이 크게 벌어질 말이군.’
하지만 독고무령은 조금도 양에 차지 않는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우리는 지금도 그 이상 벌고 있소. 그러니 그 제의는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게 좋겠소.”
적수천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제의를 수정했다.
“그럼, 이만 냥은 어떤가? 그 이상은 줄 수 없다.”
지불 금액이 두 배로 뛰었다. 길게 가지 않고 단숨에 찍어 누르겠다는 뜻.
독고무령은 가죽을 팔던 장 노인이 떠올랐다.
‘훗, 장사를 할 줄 모르는군. 장 노인에게 많이 배워야겠어.’
독고무령은 내심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상대의 제의를 담담히 거절했다.
“황금 이만 냥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우리는 어디에 얽매이는 걸 좋아하지 않소. 그러니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요.”
적수천은 독고무령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마지막 패를 꺼냈다.
“만일 제의를 받아들이면, 암문의 간부들에게 관직을 주지.”
독고무령의 눈 깊은 곳에서 파문이 일었다. 정말로 놀란 것이다.
“관직이라 하셨소?”
“분명히. 아마 고위급간부들에게는 제법 높은 지위가 하사될 것이다. 물론 일일이 우리에게 지시를 받지 않고 개별적인 활동도 할 수 있지.”
상당한 유혹이었다. 독고무령이 정말 정보상인이었다면 당장 승낙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독고무령은 진짜 정보상인도 아니었고, 관직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슬쩍 적수천의 신경을 건드려 보았다.
“으음, 은룡산장이 황궁과 연관되었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나 보구려.”
적수천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난 수십 년 간 감춰진 은룡산장의 진정한 정체마저 알고 있다니.
자신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정보력.
‘위험한 자들이군.’
그의 목소리가 좀 전과 달리 싸늘해졌다.
“그걸 안 이상, 너는 무조건 나의 제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그럼 너는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암문도 오래지 않아 사라지게 될 거다.”
독고무령의 입꼬리가 슬며시 비틀렸다.
“밖에 있는 자들을 믿고 그러나 본데, 쉽지 않을 거요.”
안에 들어온 네 사람이 전부가 아니다. 밖의 숲속에는 이십여 명의 수하들이 숨어 있다.
적수천은 독고무령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 정도는 파악해야 상대하는 맛이 있지 않겠는가.
“어디 정말 그런가 볼까?”
적수천이 말끝에 슬쩍 고갯짓을 했다.
그와 동시, 뒤쪽에 서 있던 세 사람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독고무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독고무령의 옆에 서 있던 염부중과 기호정, 전학이 도검을 빼들고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쩌저저정!
어둠속에서 불꽃이 튀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폐찰에 울려 퍼졌다.
어둠이 갈기갈기 찢겨지며 비명 같은 격돌음이 이어진다.
천장에서 우수수 먼지가 떨어지고, 바닥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울렸다.
순식간에 사오 초의 공방이 오가는가 싶더니, 여섯 사람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막상막하의 접전.
적수천의 눈매가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예상외로 강한 암천위의 무공에 놀란 듯했다.
그는 의심하는 눈빛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정보조직은 아닌 것 같군.”
“가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다반사요. 우리가 약했다면, 정보를 얻기도 전에 목숨부터 잃었을 거요.”
너무도 담담한 표정. 한 점 흔들림이 없는 눈빛.
적수천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하긴, 그도 그럴법하군. 강호에서 자신의 목숨은 남이 지켜주는 게 아니니까.’
그는 일단 의심을 반쯤 접고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흠, 그도 그렇군. 그럼 이번에는 그대의 실력 좀 볼까?”
적수천이 말을 끝맺기도 전.
쉬이익!
대기가 쩍 갈라지며 한 줄기 도광이 어스름을 갈랐다.
예상했던 대로 역시나 쾌도(快刀)다.
뒤로 슬쩍 한 걸음 물러선 독고무령은 좌수엄지로 검을 튕겨 올렸다.
찰나, 한 줄기 뇌전이 적수천의 도를 정통으로 후려쳤다.
쩡!
굉음이 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화악, 먼지가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