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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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63화
163화
“책임? 무슨 책임 말인가?”
“사사자께선 본문과의 협력을 매우 중하게 생각하고 있소. 그런데 귀하가 우리를 믿지 못해서 되돌아가게 한다면, 우리 역시 사사자와의 협력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지 않겠소? 좌우간 물건을 내주지 않을 거면 서신이라도 돌려주시오. 그래야 사사자께 따지기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독고무령은 적수천을 만나기 위해 썼던 방법을 한 번 더 써먹어봤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것은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아니던가.
아니나 다를까, 중년인은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콧소리를 냈다.
“험, 누가 내주지 않겠다고 했나? 잠시만 기다리게.”
그러고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곧 무사 하나가 꾀죄죄한 소년을 끌고 건물을 돌아 나왔다.
창백한 얼굴, 빼빼마른 몸, 힘 하나 없는 움직임.
마치 지독한 병에 걸려서 석 달 열흘은 시달린 환자처럼 보였다. 거기다 옷마저 구질구질해서 오물통에 빠졌다가 나온 듯했다.
모용설은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은 표정으로 그 소년을 바라보았다.
<너무 격동하지 마시오. 놈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니까.>
아마 독고무령의 전음이 아니었다면 달려가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을 것이었다.
독고무령은 모용설이 나서기 전에 먼저 소년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다.
“물건을 인수했으니 이만 가보겠소.”
“잠깐!”
그때 중년인이 독고무령을 멈춰 세웠다.
“왜 그러시오?”
“인수해가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독고무령은 중년인을 바라보며 이름 하나를 말해주었다.
“도룡이라 하오.”
그러고는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도룡(屠龍).
용을 잡아 죽인다는 말.
흔하디흔한 별호.
둥근 얼굴의 중년인은 별 다른 생각 없이 그 이름을 되뇌었다.
“도룡이라…… 그 얼굴에 그럭저럭 어울리는군.”
순간적으로 가명을 말한 독고무령은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어울린다고? 그래, 어울릴 것이다. 네놈들을 위한 이름이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확실하게, 철저히 부숴주마!’
독고무령과 모용설이 겁에 질린 모용소양의 손을 끌고 은룡산장을 나서던 그 시각.
은룡산장의 깊은 곳에 있는 철문이 힘들게 열렸다.
동시에 폐부가 찢어진 듯한 신음이 흘러나오며, 상반신을 벗은 한 사람이 문을 밀고 기어 나왔다.
군호광이었다.
“크으으윽!”
그의 신음소리가 잦아들기도 전, 네 줄기 핏빛 그림자가 천장에서 유령처럼 내려섰다.
핏빛 혈의를 입은 네 중년인.
그들은 금지인 혈왕동을 지키는 비밀위사들이었다.
“오사자, 어찌된 일입니까?”
시뻘건 눈을 부릅뜬 군호광은 목소리를 쥐어짜며 부들부들 떨었다.
“흐으…… 갑자기…… 마혈로가 모두 깨졌……. 크으으……. 내 모든 것도…… 거의 완성 단계였거늘…….”
선홍빛의 맑은 피가 군호광의 입술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 사이, 그의 얼굴과 손은 물론이고, 온몸의 핏줄이 지렁이처럼 툭툭 불거졌다.
손만 대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비밀위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한 눈을 부릅떴다. 십 년 이상 금지를 지켜온 그들이기에 그 모습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것이다.
“마, 맙소사!”
“저건…… 연공에 실패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그때였다.
퍽! 퍽!
군호광의 몸속에서 둑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군호광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며 피분수가 솟구쳤다.
“크억! 푸학!”
그것이 군호광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내지른 소리였다.
독고무령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군호광을 죽였다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한 채, 모용설 남매를 데리고 은룡산장에서 멀어졌다.
모용설은 은룡산장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러서야 울음을 터트리며 소년을 끌어안았다.
“소양아!”
소년은 그때까지도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독고무령과 모용설을 번갈아보았다.
그러다 모용설의 얼굴에서 천이 반쯤 벗겨지자, 덜덜 떨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누, 누나……? 누나…… 맞지? 정말…… 누나지?”
모용설은 모용소양을 더욱 세차게 끌어안으며 소리치듯 말했다.
“그래, 나다. 소양아, 누나야, 설 누나!”
“어, 어, 어…… 허엉……. 누, 누나가…… 누나! 누나야!”
“이제 걱정 마. 내가 왔으니까. 누구도 너를 못 잡아갈 거야.”
“허엉, 왜 이제 왔어……. 양이, 두려워서 죽을 뻔했단 말야……. 아프다고 하면 때리고. 말 안 듣는다고 때리고……. 흐엉…….”
모용설은 모용소양을 끌어안은 채 흐느꼈다.
지난 수년의 세월, 오늘을 위해 산 그녀였다.
막상 품속에 동생이 안기자 입술이 떨려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해…….”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독고무령은 코끝이 찡해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모용설과 모용소양이 떨어진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제야 독고무령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보정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히고 뭘 좀 먹이지.”
모용소양은 겁먹은 눈으로 독고무령을 쳐다보았다.
무시무시한 얼굴을.
모용설은 동생이 왜 그러는지 알기에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웃었다.
“그거, 이제 벗으면 안 돼요?”
“아직 놈들의 지역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먼저인 것 같군.”
모용소양은 걷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독고무령이 업으려 하자, 모용소양은 머뭇거리며 업히지 않았다.
결국 모용설이 나서서 몇 번이나 괜찮다고 한 후에야, 모용소양은 독고무령의 넓은 등판에 몸을 맡겼다.
은룡산장에서 보정까지는 팔십 리 정도.
세 사람은 곧장 보정으로 갔다.
* * *
독고무령은 보정에 들어서기 직전 인피면구를 벗었다.
그제야 모용소양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조금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보정에 들어가 객잔에 방을 얻은 그들은 모용소양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몸과 여기저기에 난 상처를 본 모용설은 또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방 안에서 모용설과 모용소양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독고무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도 먹고 있어. 나는 나가서 밀호방 사람을 찾아볼 테니까.”
이호에게 밀호방의 정보원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본 터였다.
그는 방을 나가서 점소이에게 명하루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았다. 다행히 명하루는 객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로를 오십 장쯤 걸은 독고무령은 명하루라 쓰인 깃발이 보이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입구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기둥 한쪽에 작은 호리(狐狸)가 새겨져 있었다.
독고무령은 호리의 주둥이가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만두를 파는 좌판이 하나 있었는데, 손님은 없고 파리만 날아다녔다.
그때 언뜻, 좌판 옆에 조잡하게 그려진 호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여우를 전혀 닮지 않은 장한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툭.
좌판으로 다가간 독고무령이 좌판을 치자, 졸고 있던 장한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만두 사러 왔수?”
“여우 모양의 만두 열다섯 개만 주시오.”
세상에 여우 모양의 만두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장한은 당연히 있다는 듯 팔을 걷어붙였다.
“누가 먹을 거요?”
누구냐는 말.
독고무령은 장한, 십오호의 귀에 입을 바짝 갖다 대고 나직이 말했다.
“독고무령이라는 사람이 먹을 거요.”
십오호는 멈칫하더니, 해연히 눈을 크게 떴다.
“회, 회주님?”
독고무령은 조용히 웃으며 만두통을 가리켰다.
“일단 만두부터 맛봅시다.”
“예? 예…….”
십오호는 다급히 만두통 속에서 만두를 꺼냈다. 만두는 여우를 조금도 닮지 않은 둥근 모양이었다.
독고무령은 만두를 하나 베어 먹으며 그를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몇 사람이나 있소.”
“저까지 셋이 있습죠.”
“한 사람을 태원까지 안전하게 옮겨줘야겠소.”
“그럽지요.”
“운양에게 데려가서 용설의 동생이라고 하면 알아서 할 거요.”
“알겠습니다.”
십오호는 주먹 두 개 크기의 만두를 하나 더 내밀었다.
독고무령은 만두를 받아들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맛있는데, 왜 이리 장사가 안 되는 거요?”
십오호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손님이 많으면 마음대로 일을 할 수 없어서, 제가 억지로 손님에게 성질을 부리다 보니까 좀 그렇습니다. 그리고 회주님께 드린 것은 특별히 제가 먹으려고 만든 거라 맛이 좀 더 낫지요. 흐으…….”
입꼬리를 비튼 독고무령은 만두를 마저 먹으며 몸을 돌렸다.
“반시진 후에 저쪽에 있는 영원객잔으로 와서 이 층 맨 구석방으로 오시오. 아마 십이호실이라고 쓰여 있을 거요.”
“그럽지요. 반시진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객잔으로 돌아가자, 모용소양은 이야기를 나누다 지쳤는지 잠들어 있었다.
모용설은 모용소양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독고무령이 들어서자 고개를 돌렸다.
“잠들었어요. 잠들기 전에야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였는데, 마치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웃어보는 것처럼 보였어요.”
독고무령은 모용설에게 밀호방의 십오호를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모용설은 안심이 안 되는 듯 망설였다. 태원까지 가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심정인 듯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산서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녀의 우려도 기우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용소양을 데리고 북경까지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면 적어도 사흘은 더 걸릴 터. 작금 상황에서 사흘은 천하가 뒤집히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독고무령은 굳이 설득시키려 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른 제안을 했다.
“아무래도 동생과 함께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
모용설은 몇 번이나 망설이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라고 해서 왜 독고무령과 함께 북경에 가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몇 년 만에 만난 동생을 이대로 혼자 보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미안해요.”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소매를 걷었다.
그리고 팔목 안쪽에 단단히 매여져 있는 팔찌를 풀어냈다.
“이것은 생전에 어머니가 가지고 계시던 거예요. 북경에 가셔서 도찰원(都察院)의 첨도어사(僉都御史) 중 정수교라는 분이 있는지 알아보세요. 그리고 그분이 계시면 만나서 이걸 보여주세요. 그분은 어머니와 사촌간이신데, 어머니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셨던 분이라고 들었어요. 아마 그분이라면 어머니 가문의 물건인 이걸 알아보실 거예요.”
그녀도 한때 정수교를 만나볼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동창이 깊숙이 관여되어 있는 일. 도찰원주의 보좌관 격인 첨도어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정수교가 비록 외가친척이고 어머니를 아꼈다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조카를 위해서 집안이 멸문 당할지도 모르는 일에 나서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자칫하면 자신마저 동창에 잡힐지 모르는 일.
그녀는 몇 번의 숙고 끝에 그를 만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던 모용설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적수천이라는 자에게 준 청홍봉황패가 뭔지 알아요?”
독고무령은 고개를 저었다.
모용설은 이마를 찌푸린 채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말했다.
“자세히는 모르고, 그저 황태자와 관련된 물건이라고 들었었어요. 그 물건이 어떻게 은룡산장과 연관된 것인지는 모르지만요.”
동창, 은룡산장, 황태자와 관련된 물건.
왠지 역겨운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모용회가 그걸 어떻게 얻었는지 아나?”
“그건 아무도 몰라요. 다만 숙부가 북경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얻은 것 같아요. 그 후 석 달이 지나지 않아서 은룡산장의 무리들이 본가를 찾아왔거든요. 당시만 해도 단순히 귀원장으로 알았지만.”
독고무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용설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조심해서 돌아가라.”
순간 모용설이 독고무령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한 번 해봐서 그런지 그리 망설임 없는 행동이었다.
독고무령도 잠시 멈칫했을 뿐, 곧 손을 돌려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독고무령의 품에 머리를 기댄 모용설이 소곤거리듯 말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