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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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62화
162화
“무슨 말이죠?”
“제왕성과 은룡산장이 벌이는 전쟁에 대한 것은 잘 아실 겁니다. 그가 그 싸움에 끼어들어서 두 세력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는데, 제유 공노명 역시 그의 손에 죽었지요. 그 바람에 분노한 제왕성에서 그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태원으로 비밀무사를 파견했는데, 그가 그 비밀무사들을 모두 제거한 모양입니다. 그의 세력은 무사하고요.”
제왕성과 독고무령 간의 싸움이 그녀에게는 남다른 뜻으로 다가왔다.
독고무령이 제왕성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 다시 말해 적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유하령은 막도환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언젠가는 그곳으로 돌아오겠군요. 그리 멀지 않은 시일 안에.”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루주.”
막도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얼마 전만 해도 유하령이 왜 그를 악착같이 찾으려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알 것 같았다.
아버지 때문에?
물론 그것도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큰 듯했다.
처음 보는 모습. 차갑게만 보이던 눈빛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이전의 유하령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이다.
‘주군, 아가씨의 얼어붙은 가슴에 꽃이 피나 봅니다.’
그는 유하령의 스승인 백낙선자(白樂仙子)를 열두 살 시동일 때부터 삼십 년 넘게 모셨다. 백낙선자가 오 년 전, 일흔일곱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을 때부터는 유하령을 따랐고.
하기에 유하령의 가슴에 꽃이 피는 것을 누구보다 반겼다. 여인의 가슴에는 서리보다 꽃이 어울렸다. 더구나 유하령처럼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람을 더 보내서 확실한 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총관에게 사람을 몇 데리고 태원으로 가라고 하세요. 부총관이라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걸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기한이나 자금은 걱정하지 말고, 최대한 자세히 알아보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루주.”
유하령은 막도환이 나간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오갔다.
독고무령이 적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려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가 어떻게 아버지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을까?’
이제 남은 문제는 그것뿐이었다.
‘어쩌면 제왕성과 싸우던 중에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을 만나서 부탁을 받았을지 몰라. 그게 아니라면 그가 어떻게 아버지를 알 수 있겠어?’
생각할수록 자신의 판단이 옳게 느껴졌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제왕성의 적인 그가 아버지에게 해 될 일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마음이 홀가분해진 그녀는 방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연.”
“예, 아가씨.”
“따뜻한 목욕물 좀 준비해줘요.”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지금의 기분을 좀 더 깊게 음미하고 싶었다.
온몸을 푹 담그면 그의 얼굴이 더 확실하게 떠오를지도 몰랐다.
‘내가 유하령이란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며칠 후면 그가 보내는 사람이 온다. 그자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를 알려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를 앞에 두고,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싶었다.
-제가 바로 당신이 찾는 유하령이에요.
그 상황을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양 볼에 연분홍 복사꽃이 피었다.
‘호호호, 아마 많이 놀랄 거야.’
제3장 도룡(屠龍) 악룡을 잡다
은룡산장의 정문은 세 대의 마차가 동시에 통과할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유월의 어느 날 오후.
두 사람이 은룡산장의 정문 앞에 서서 수문위사에게 한 장의 서신을 건넸다.
북경으로 가는 길에 낭아산 자락의 은룡산장을 방문한 독고무령과 모용설이었다.
“사사자가 보낸 것이니, 가서 상관에게 보여주시오.”
오만한 표정으로 독고무령을 쳐다보던 수문위사는 ‘사사자(四使者)’라는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위장님께 말씀드리도록 하겠소.”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이곳에서 기다리기는 좀 그렇소만. 햇빛이 너무 강한데, 안으로 들어가 기다리면 안 되겠소?”
수문위사는 동료들을 힐끔 쳐다보고는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좋소. 일단 들어오시오.”
수문위사는 독고무령과 모용설을 객방처럼 보이는 곳으로 안내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요. 어디 가지 말고 반드시 이곳에 있어야 하오.”
“걱정 마시오. 길을 잃고 욕먹기는 나도 싫으니까.”
독고무령은 수문위사가 서신을 들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몇 걸음 앞으로 나와서 은룡산장의 내부 모습을 살펴보았다.
‘정말 엄청난 규모군.’
전체 크기로만 따진다면 제왕성이 더 클 것이었다.
하지만 건물의 화려함과 거대함은 제왕성조차 따라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른 곳도 살펴보고 싶었지만 공연한 의심을 자초할지도 모르는 일. 독고무령은 근처만 배회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독고무령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에서, 대기에서 전해오는 기운을 읽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기운, 밀려왔다 건물을 휘돌아가는 바람의 흐름. 모든 것이 그의 감각에 잡혔다.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자신이 주위 상황을 어디까지 읽을 수 있을까?
혹시 중요한 뭔가를 알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전에도 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이 필요한 부분을 읽는 것에 집중했었다. 적의 움직임 같은 것만.
‘어디 해볼까?’
독고무령은 마음을 비운 채 태천일심의 기운을 서서히 전신으로 퍼트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며 눈을 반쯤 감고, 대기를 흐르는 기운에 의지를 싣고서 전체를 관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처음에는 객방 부근에서 그 너머의 건물로, 그리고 일각가량이 지나자 근방 백 장 안의 흐름마저 손 안에 잡힐 듯했다.
한쪽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모용설은 그런 독고무령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가 이상한데 그 이상한 점이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뭘 보았는지 입을 반쯤 벌렸다.
‘발이…… 허공에 떠 있어. 뭐, 뭐지?’
그랬다. 언뜻 보면 평범하게 땅을 밟으며 걷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발바닥이 땅에서 반 치 정도 떠 있는 것이 아닌가.
모용설은 어이가 없어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상한 점을 또 하나 깨달았다.
독고무령은 눈을 거의 감은 채 사오 장 거리를 오가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자신이 허공에 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시선은 어느 특정 부위를 보는 게 아니라 막연한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그 끝이 어딘지, 그것은 오직 본인만이 알 것이었다.
그녀는 독고무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고 객방의 기둥에 몸을 기댔다.
‘놔두자. 뭔가 생각할 게 있나 보지 뭐. 더구나 회주는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있는 고순데, 저럴 수도 있지.’
그녀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부르지 않음으로써 독고무령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상상도 못한 채.
그 시각.
대기의 흐름을 따라가던 독고무령의 의지를 정체불명의 음악(陰惡)한 핏빛 기운이 가로막았다.
음악한 기운은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존재 자체가 불투명한 미지의 기운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자신의 의지가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독고무령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디에 있는지, 실제로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데도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느낌.
독고무령은 무의식중에 태천일심의 기운을 의지에 실어 공격해 보았다.
음악한 기운은 필생의 대적을 만난 것처럼 달려들었다.
콰아아아!
고오오오!
곧 두 기운이 천공에서 맞부딪친 신룡과 악룡처럼 얽혀들었다.
독고무령은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아닌데도 혼신을 다해서 악룡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악룡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더욱 강한 핏빛을 띤 채 태천일심에 대항했다.
두 기운의 싸움이 어찌나 격렬한지, 광풍이 불고 벼락이 떨어지고, 대지가 뒤집히며 거꾸로 솟구치는 듯했다.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는 팽팽한 접전!
독고무령은 형체가 없는 태천일심의 기운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순간, 태천일심의 기운이 거대한 손처럼 변하더니 악룡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넷이 여덟이 되고…….
쿠구구궁!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울렸다.
끄아아아아!
진저리치는 비명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거대한 손 그림자는 하늘을 가득 메운 채 핏빛의 악룡을 찢어발기고, 산산이 터트려서 소멸시켰다.
그러던 어느 순간.
쩌정!
백 장 두께의 얼음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을 끝으로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동시에 독고무령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허공에 떠 있던 발도 땅에 닿았다.
우뚝 선 독고무령은 머리를 하늘로 쳐들고 눈을 감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진다. 꿈을 꾼 것처럼 정신이 몽롱하다.
하지만 그는 환호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모두…… 생각난다!’
머릿속 저 어딘가에서 엄청난 격전이 벌어졌다. 대기 중에 섞인 어떤 기운에 태천일심이 반응하면서 벌어진 일인 듯했다.
그 와중에 구겁무가 펼쳐졌다.
처음부터 여섯 번째 춤까지.
그런데 설마, 설마 하면서 되새겨 보니,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모든 것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물론 익히려면 또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섯 개의 그림이 이제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그 춤을 추면서 단목승이 남긴 첫 번째 동판의 구결, 승천만화의 결을 따라 기운을 움직였다.
입문을 하고도, 승천만화를 막연하게 태천일심의 기운을 움직이는 구결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그가 상상도 못한 효능이 숨어 있었다.
승천만화는 하늘에 올라 만 가지 기운을 화합한다는 뜻.
그 뜻의 내면에는, 그 어떤 것에든 태천일심의 기운을 심어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원수의 대지에서 제마와 승천의 무공을 얻다니. 그대들을 파멸시키라는 하늘의 뜻인 것 같군!’
독고무령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깍지 낀 두 손을 턱에 기댄 채 독고무령을 바라보던 모용설이 고개를 모로 틀었다.
“뭐 좋은 일 있어요?”
독고무령은 모용설의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해주었다.
“악룡을 한 마리 때려잡았지.”
뜬금없는 대답에 모용설의 의문은 더욱 커져만 갔다
‘갑자기 웬 악룡?’
그때 저만치서 둥근 얼굴의 중년인이 수문위사와 함께 오는 게 보였다.
중년인은 독고무령 바로 앞까지 다가오더니, 거만한 표정으로 독고무령과 모용설을 번갈아보았다.
“그대들이 서신을 가지고 왔는가?”
“그렇소.”
“흠, 사사자의 서찰은 분명한 것 같다고 하는데…….”
조금 늦다 했더니, 그동안 서신의 진위를 확인해 본 듯했다.
둥근 얼굴의 중년인은 말을 흐리며 독고무령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턱을 치켜든 채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정말 서신의 주인인지 믿어도 될지 모르겠군. 요즘은 세상이 워낙 험해서 말이야. 혹시 아나? 그대들이 어디서 주운 것을 가져왔는지.”
“본문에서는 귀장이 원하는 물건을 찾아서 돌려주었는데, 설마 이제 와서 거래를 뒤집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뭐 거래를 뒤집겠다는 건 아니고…….”
“나야 빈손으로 돌아가도 상관없지만,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은 귀하가 책임져야 할 거요.”
독고무령이 예상외로 강하게 나가자 중년인의 이마에 깊은 골이 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