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16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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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161화
161화
“서신을 한 장 써주시오. 그럼, 사람을 보내서 그 아이를 데려오겠소.”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
적수천은 주머니를 품에 넣으며 뒤를 향해 말했다.
“가서 문방사우를 가져와라.”
잠시 후, 적수천은 독고무령이 보는 앞에서 한 장의 서신을 썼다.
독고무령은 서신을 받아들고 나서야 적사보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마상훈련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제왕성이 귀하들의 진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소. 좀 더 넓은 곳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이 있는 곳으로 나오기를 말이오.”
제왕성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럴 수밖에 없다. 자신들은 귀원장에 둥지를 틀기 위해 온 것도 아니고, 제왕성과 사이좋게 산서의 대지를 나눠 갖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니까.
징벌!
주인을 물기 위해 달려드는 개를 때려잡기 위해 온 것이 아니던가.
적수천은 침음성을 흘리며 억지반박을 했다.
“으음, 그들이 우리에게 위협이 될 거라 보나? 우리는 단순한 군병들이 아니다. 기마무사 몇 백이 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거의 없다.”
“강호인들의 싸움은 분명 군병들이 싸우는 것과 다를 거요. 하지만 지금처럼 양편의 숫자가 많을 때는 완전히 다르다고 볼 수만도 없소. 만일 고립된 지형에 몰려 있을 때 급습이라도 받으면, 순식간에 엄청난 피해를 입을 거요. 비슷한 전력에서 몇 백 명이 단숨에 쓸리면 어떤 결과가 나올 거라 보시오?”
“그건…….”
적수천은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일천 대 일천의 싸움에서 어느 한쪽의 무사 이삼백이 한순간에 무너지면, 어느 쪽이 불리한 것인지는 굳이 따져볼 것도 없었다.
“더구나 숫자도 그들이 많다는 걸 잊지 마시오. 물론 전체 세력에서도 밀리지 않고 말이오.”
독고무령은 마지막 쇠못을 적수천의 가슴에 박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수 정예의 산발적인 싸움으로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오만…… 귀장에도 뛰어난 지략가가 많을 테니 더 관여하지는 않겠소.”
적수천은 몸을 돌리는 독고무령을 잡지 않았다.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물속 깊이 가라앉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찮게 보였던 정보장사꾼의 등이 오늘따라 커 보인다.
자신이 그동안 저놈을 잘못 판단한 건가?
그러나 앞에 있는 놈이 얼마나 대단한 놈이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암문의 정보가 필요하다는 것.
전쟁을 앞둔 지금은 그것만이 중요했다.
‘제길, 진즉 정보망을 더 확충했어야 하거늘.’
그랬다면 굳이 암문에 의존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기분을 느낄 필요도 없고.
‘일단 저놈에 대한 것은 악조응이 돌아온 다음에 결정해야겠어.’
* * *
장원을 나선 독고무령과 모용설은 즉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낭자관(狼子關)을 넘어 하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빠르게 십 리쯤 내려간 두 사람은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향했다.
모용설의 입이 열린 것은 그 즈음이었다.
“굳이 그걸 다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요?”
“만약을 위해서 발을 붙잡아 놓은 거다.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게 알려지면, 적어도 우리가 북경에 다녀오기 전까지는 움직이고 싶어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설마 그런 이유일 줄 몰랐던 모용설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고 해서 의문이 다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다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요. 저들 역시 우리의 적인데…….”
고마운 것은 고마운 거고, 불만은 불만.
그녀는 철천지원수인 은룡산장에 독고무령이 중요한 정보를 계속 건네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보를 주지 않으면 더 빨리 무너질 것이거늘, 왜 정보를 준단 말인가.
독고무령도 그녀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자신의 계획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간단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강하게 부딪칠수록 충격도 큰 법. 더욱 더 철저히 무너뜨리기 위해서다. 다시는 일어설 수도 없이, 완벽하게. 제왕성도, 은룡산장도…….”
옆에서 걸음을 옮기던 모용설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고는, 힐끔 독고무령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독고무령이 제왕성에 원한을 지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룡산장이야 철검보의 일을 같이 겪었으니 말할 것도 없고.
문득 궁금해졌다.
저 사람은 왜 제왕성에 저리 깊은 원한을 지니고 있는 걸까?
“저기…… 제왕성과는 어떤 관계죠?”
그녀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고는 독고무령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걸음만 옮겼다.
말을 꺼낸 모용설은 무안한 마음에 괜히 물어봤다는 후회를 했다.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멍청이같이 회주의 마음도 모르고…….’
그때 독고무령의 대답이 갑자기 들려왔다.
“제왕성은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간 곳이지. 은룡산장의 지시에 따라…….”
모용설은 홱 고개를 돌려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는 독고무령의 눈빛이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느 때와도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것은 증오에 찬 눈빛 같기도 했고, 슬픔과 그리움이 범벅된 눈빛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그도 순간이었을 뿐, 독고무령의 눈빛은 전처럼 무채색으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더 묻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사람의 가슴속에 어떤 아픔이 있기에 저런 눈빛을 보인 걸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아픔이 있다면 함께 나누고 싶었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결국 그녀는 태행산 계곡 길로 들어설 즈음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자세히 알면…… 안 되나요?”
언뜻 독고무령의 어깨 옷자락이 흔들린다 느껴졌다. 바람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질문을 던지고 묵묵히 독고무령을 따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독고무령이 걸음을 늦추더니, 깎아지른 절벽의 아래쪽을 타고 흐르는 물가로 걸음을 돌렸다.
“조금 쉬었다 가지.”
모용설은 고개를 끄덕이고 독고무령을 따라 물가로 갔다.
물가의 커다란 바위에 엉덩이를 걸친 독고무령은 계곡물을 손으로 떠 얼굴에 끼얹었다.
모용설은 그 앞쪽의 바위에 앉아 물속에서 노니는 작은 가재를 바라보았다.
그때 독고무령이 물 묻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며 말문을 열었다.
“비옥 십팔호실이라는 곳을 아나?”
흠칫한 모용설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에요.”
독고무령은 깎아지른 절벽꼭대기에 시선을 두었다.
두 마리의 학이 절벽 틈을 비집고 자라난 소나무 위에서 놀고 있는 게 보였다.
크기가 많이 차이 나는 것이 어미와 새끼 같았다.
부러움과 동시, 아버지와 함께 침상에 누운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행복했거늘…….
독고무령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곳은 제왕성의 비밀 고문실이었지. 이십 년이 넘도록 그곳에 들어간 죄수들 중 살아나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진 채 인간으로선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서 죽어갔지. 수많은 비밀을 쏟아내고서……. 그 숫자가 아마 수백은 될 거다.”
모용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였다.
“맙소사! 어떻게 그런 곳이…….”
“비옥 십팔호실은…… 인간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지옥이었지.”
“그런 곳이 있었다면, 그동안 왜 강호가 몰랐던 거죠? 누군가는 알았을 것이 아니에요?”
“위지천백은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지옥을 만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자다. 누군가가 알아채고 소문을 내려 했다면, 그의 주위 모든 사람들을 죽여서라도 입을 막았을 것이다. 어쩌면 벌써 그랬을지도 모르지.”
모용설은 새삼 독고무령이 왜 그리 위지천백을 조심스럽게 상대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곳을 회주는 어떻게 아는 걸까?
“그런데…… 회주는 그걸 어떻게 안 거예요?”
독고무령은 절벽 위의 학에게서 시선을 떼고, 모용설의 두 눈을 직시했다.
“당연히 알 수밖에. 그곳이 바로…… 내가 태어나고, 아버지와 함께 자란 곳이거든.”
쿵!
심장이 떨어진 기분.
모용설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문득, 모용설의 뇌리에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의 방에 찾아온 독고무령이 했던 말들이.
“나는 생살이 찢어진 사람 옆에서 음식을 먹으며 자랐지. 그리고 매일, 온몸이 헤집어진 자의 비명을 들으며 핏속에서 뛰놀았다. 걸음마를 할 때부터 말이야. 만약 그보다 더 참혹한 상황에서 살아왔다면 네의 말을 이해해주지.”
“나는 세상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게 자라는 줄 알았다, 열여섯에 그곳을 탈출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사실이었어. 그때 한 말이 전부. 오오오, 맙소사…….’
그녀는 가슴이 미어져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을 열어 뭔가 말하고 싶은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찢어진 가슴을 달래주고 싶은데, 손이 덜덜 떨려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아요.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햇살 아래 서 있잖아요.’
독고무령은 모용설의 떨리는 눈빛이 부담스럽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연한 말을 한 것 같군. 그만 가지.”
순간이었다.
“바보 같은 사람…….”
모용설이 갑자기 독고무령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독고무령은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달려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마음이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품안에 안겨든 모용설의 머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장유유에게 느낀 감정이 포근함이라면, 모용설에게선 거부할 수 없는 절절한 감정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녀의 얼굴이 밝혀지던 그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부터 싹튼 감정인 듯했다.
그 감정이 맞닿은 몸을 타고 전해진다. 심장에서 시작된 열기가 온몸을 태울 것처럼 퍼진다.
그는 그 감정을 떨치고 싶지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게 조금 문제이긴 했지만.
모용설은 막상 일을 저질러 놓고도, 가슴이 쿵쾅거려 입이 열리지 않았다. 허리를 두른 팔도 굳어버린 듯 풀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독고무령보다는 그녀가 나았다. 겨우 용기를 낸 그녀는 독고무령의 가슴에 얼굴을 댄 채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회주는 나보다 더 바보 같은 사람이에요.”
“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일단 입이 열리니 그 다음부터는 좀 더 쉬웠다.
“내 사람은 버리지 않는다고 했죠? 고마워요.”
“그건…….”
“앞으로는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요.”
“나는 아픈 데가 없는데?”
“여기가 아프잖아요, 제 귀에는 아프다고 몸부림치는 소리가 들려요.”
독고무령은 고개를 좀 더 숙여 모용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얼굴을 가렸던 천은 밑으로 내려가 그녀의 얼굴이 모두 보였다. 두 눈에 맺혔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도.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여인. 자신의 아픔을 귀로 듣는 여인이 품 안에 있다.
독고무령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모용설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만히 모용설의 등 뒤로 손을 두르고 나직이 말했다.
“그렇게…… 하지.”
* * *
머릿결을 따라 빗질을 하던 유하령은 방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손을 멈췄다.
“접니다, 루주.”
총관인 막도환이었다. 왠지 들뜬 듯한 목소리.
그녀는 빗을 내려놓고 돌아앉았다.
“들어와요.”
막도환은 방으로 들어오더니 유하령의 맞은편에 앉았다.
“찾아냈습니다, 루주.”
유하령은 막도환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막도환이 뭘 찾아냈는지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다.
“어디 있죠?”
“얼마 전까지 태원에 머물렀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머물렀다? 그럼 지금은 없단 말인가요?”
“지금은 태원에 없습니다만, 그는 그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